세월호 참사가 바꾼 우리, 그리고 ‘희망의 바깥은 없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구사람들 이야기 (7) 북구여성회 416지킴이들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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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들어 일찌감치 욕심을 내서 시작한 인터뷰를 이제야 글로 옮긴다.

대구 북구 칠곡지역에서도 풀뿌리시민단체 소속 416약속 지킴이들이 지난 2년간 수요일마다 세월호 선전전을 진행해왔다. 이들 중에서 북구여성회(대표 장지은) 상근자인 남숙경 씨(구암동/43)와 회원 박경희(국우동/35세)씨, 북구여성회 부설 책마실 도서관 관장인 김경희 씨(구암동/42세), 그리고 이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온 터라 모두 북구여성회 회원인 줄 알고 있었던 정의당 김지훈 씨(읍내동/34세)를 만났다.

▲2016. 6. 8 책마실 도서관 앞에서, 왼쪽부터 박경희, 김경희, 남숙경, 김지훈씨와 아이들 [사진=한유미]
▲2016. 6. 8 책마실 도서관 앞에서, 왼쪽부터 박경희, 김경희, 남숙경, 김지훈씨와 아이들 [사진=한유미]

식당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북구여성회에서 상근 활동을 하는 남숙경 씨, 책마실 도서관과 인연으로 북구여성회 회원이 된 박경희 씨는 모두 세월호를 통해 우리 사회와 국가의 민낯을 대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식당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아이들한테 살갑게 함께해 주지 못했던 게 늘 미안했다는 남숙경 씨는 식당 손님들이 잘 보이는 곳에 기억엽서를 비치해 두었었다. 더러 왜 이런 걸 두냐고 시비를 거는 손님도 있었지만, 남숙경 씨는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함께 하는 일이라면 영업에 다소 무리가 생기더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엽서를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남숙경 씨 말을 옮겨본다.

“제가 처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지금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사람이었어요. 우리는 대구 사람들이잖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고 여자가 남자보다 장점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어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이후 나라에서 하는 일을 보면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배가 뒤집혔는데 승객을 구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진실을 밝히자는 것을 굳이 막고. 1주년 때는 그 독한 캡사이신을 유가족들에게 뿌려대고. 그냥 슬퍼하겠다는데 그것조차 내버려 두지 않고 어쩌면 이렇게까지 하는가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정부가 이런 모습을 국민들에게 들키지 않았었는데,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다 보여주었던 것 같아요.”

▲수요서명 중인 416지킴이들과 박경희 씨 [사진=구완모, 최해경, 북구여성회 제공]
▲수요서명 중인 416지킴이들과 박경희 씨 [사진=구완모, 최해경, 북구여성회 제공]

박경희 씨도 남숙경 씨처럼 북구여성회 회원이 되고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여러 사회문제를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수요 서명전에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한편으로는 보람도 느꼈지만, 어려움도 겪으면서 우리 사회와 이웃에 대한 생각도 많아졌다고 한다.

“여자들만 서명을 받고 있으면 꼭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 번은 잔뜩 화난 표정의 아저씨가 당신들이 뭔데 서명을 받느냐고 따진 적이 있었어요. 선전물을 주면서 보시면 내용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했더니, ‘나는 이런 건 관심 없고, 애들이 배 타고 가다가 사고 나면 빠져 죽을 수도 있는 거지. 이렇게 서명을 받고 난리를 피우는 이유가 뭐냐?’라며 막무가내로 화를 냈어요.

무섭기도 하고 화가 났지만, 속으로는 정말 그 아저씨 마음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일인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가, 아직도 저렇게 분노하는 이유를 도리어 제가 묻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저는 정말 북구여성회 오기 전에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진짜 무관심한 것이 제일 나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세월호 참사 하나로 많은 게 바뀌었어요.”

아, 그동안 서명한 사진을 보면 모두들 활짝 웃고들 있었는데, 이런 어려움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동구 반야월에서 서명전을 이어 오고 있는 약속지킴이분들도 주민이 신고해서 경찰 조사를 받고, 욕하며 대드는 시민을 상대하면서 이제는 싸움꾼이 되는 걸 마다치 않고 있다.

이분들은 나처럼 처음부터 학생운동이나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사람들도 아니다. 오래 살아온 동네에서 피켓을 들고나와 서 있는 것만도 어색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도 세월호 참사를 겪은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감수하며 2년을 함께해 왔다. 많이 고맙고, 어려움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미안했고, 그 과정에서 겪었을 두려움과 놀라움, 분노가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마음 한구석이 오래 아렸다. 그리고 정말 현 정권은 세월호 참사가 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이처럼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조차 마음을 거두고 있다. 그러니 진실을 밝히는 것은 더욱 두렵고 싫은 일이겠구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함께 이야기를 듣던 김경희 관장의 경험도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불쌍하다며 작정하고 시비를 걸던 할머니, 아이가 리본을 갖고 싶어 해서 주었더니 재수 없다며 내팽개치고 가던 아이의 아버지…

“저는 학교 수업 가는 버스에서 참사 소식을 처음 들었어요. 다 구조했다는 소식에 다행이다 안도를 했는데, 수업 마치고 오보라는 걸 알았어요. 집에 와서 기사란 기사를 다 찾아서 봤는데, 그때는 에어포켓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해서 애들을 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어요. 그런데 결국 한 명도 구해내지 못했고…며칠 지나면서는 너무 힘들고 무기력했어요. 뭘 같이 해 보자고 주변 사람들이 말했을 때도 바로 용기가 나지 않을 정도로요. 지역 단체들이 모여서 서명전을 해 보자고 의논을 할 때야 비로소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혼자나 몇몇은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지만, 같이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원들은 모두 세월호 참사 1주기, 대구백화점 앞에서 열렸던 대구시민대회를 기억하고 있었다. 써서 가져간 편지글을 읽지도 못하고 내내 울었던 사람이 바로 김경희 씨였다. 남숙경 씨도 마치 아이들이 다녀가는 것처럼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던 1주년 집회를 기억하고 있었고, 우리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1년이 지나고 나니까 정말 분노스러운 거예요. 그동안 서명받을 때 희한하게 저랑 지훈 씨가 나가면 비가 왔었어요. 비 오는 게 너무 슬펐어요. 아이들 우는 것 같고, 서명전 잘해 보려는데 비가 와서 속상하고, 피켓 들고 서 있으면 참사 생각이 더 많이 나서 힘들기도 했었거든요.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1년을 보내고도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었으니까요.”

이어 남숙경 씨가 힘든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해요. 한편으로는 내 나라 내 조국인데 이렇다는 걸 아는 게 참 힘들고 괴로워요. 부모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면 부끄럽고 괴로운 마음이 드는 것처럼. 그리고 알면 알수록, 열심히 하면 할수록 세상이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다는 현실에 부딪히고, 그때마다 강한 절망감을 느낍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아주 작은 일인데, 힘 있고 돈 있는 높은 사람들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과연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작은 액션으로? 세월호 안에 재벌가 자식 하나만 있었더라면 이런 일 절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우리가 투표를 아무리 잘해도 그놈이 그놈인데 싶은 절망감…”

▲2016.4.16. 동성로, 세월호참사 2주기 대구시민대회 부스 운영 중인 남숙경 씨 [사진=세월호참사대구시민대책위 제공]
▲2016.4.16. 동성로, 세월호참사 2주기 대구시민대회 부스 운영 중인 남숙경 씨 [사진=세월호참사대구시민대책위 제공]

남숙경 씨 이야기는 그동안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심정이다. 1년도 길었는데, 2년이 지난 지금도 세월호와 9명의 미수습자는 바다에 잠겨 있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에 철근 400톤이 실려 있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항적도, 국정원과 세월호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의문들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세월호특조위 활동을 중단시켜 더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다. 특조위 활동을 보장해달라며 국회의원 153명이 발의한 특별법 개정안은 국무회의에 상정도 되지 않았으며, 유가족의 농성은 노란리본과 가림막을 빼앗기고 연행되는 등 경찰의 탄압과 싸우며 이어졌다.

지난 2015년 세월호 1주기 즈음 518광주항쟁을 겪은 어머니들이 세월호 어머니들을 만나 하셨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당시에 울고 다니지도 못했다. 왜냐면 우리 아이들이 그때는 폭도였다. 폭도를 자식으로 둔 부모는 울 수도 없었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길게 가야 하는 싸움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나서야 한다’라고 하셨던. 그 말씀은 세월과 오랜 고통을 견뎌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마침 김경희 관장은 지난 518 때 광주 망월묘역을 아이들과 함께 다녀왔다고 한다. 이야기로 듣던 것과 직접 보는 것이 매우 다르다는 걸 느꼈다며, 518 때는 통제를 당해 제대로 알릴 수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으냐며 ‘세월호 싸움은 아프지만 내게는 작은 희망’이라는 말을 꺼냈다.

▲2016.6.23 수요서명중인 김경희 씨 [사진=신동희]
▲2016.6.23 수요서명중인 김경희 씨 [사진=신동희]

“마음이 답답할 때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노래 구절이 생각납니다. 피켓 들고 나가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가 있어요. 세상일을 알고 나면 정말 힘든데, 힘들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잖아요. 세월호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고, 욕도 듣지만, 제 기억에 세월호만큼 이렇게 오랫동안 모든 국민이 함께 행동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삼풍백화점 무너지고 성수대교 사고 있었을 때 모두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돌아서서 다 잊었었다’고 은화(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 학생은 아직 미수습자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세월호 싸움처럼 국민이 길게 끝까지 해 보려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이 일에서 한 번 끝을 보면 그다음부터는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세월호가 제게는 아프지만, 하나의 희망이기도 해요.”

조은화 학생 어머니와 함께했던 간담회를 남숙경 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여성회에서 제일 처음 한 세월호 참사 가족 간담회에 은화 어머니가 오셨어요. 궁금해서 제가 왜 이런 활동을 하시느냐고 질문을 드렸어요. 자식 잃은 부모가 자식을 찾으려고 하는 건 당연하지만, 가장 아프고 힘든 부모일 텐데 굳이 앞장서서 전국을 다니며 힘든 일을 하시는 이유가 뭐냐고. 그랬더니 은화 어머니가 이렇게 답하셨어요. ‘아이 한 명을 이렇게 잃었는데 남은 아이가 사는 세상은 달라져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야 우리도 살 수 있다’고요. 그 말씀이 제게는 ‘당신들도 아이들이 있지 않으냐?’고 물으시는 이야기로 들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쏟아지는 여성회 회원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던 김지훈 씨도 의견을 보탰다.

“세월호 인양에 대한 설문조사가 계속 있을 때는 세월호를 인양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60%로 확인이 되었는데, 결정된 후에는 더 이상 조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안 자체가 점점 잊혀지는 것 같았고, 세월호 인양을 원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축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총선을 치르고, 세월호 2주기 대구시민대회에 참가한 많은 사람을 보면서 드러나지 않았던 시민들의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어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모두 위축되었다가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마음의 힘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우리가 곳곳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것이 서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난 2년을 돌아보며 서로가 어떤 힘겨움을 갖고 지금까지 견뎌왔는지, 무엇을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세월호를 기억하고 행동해왔는지를 짚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회 활동을 돌아보면서 북구지역 지킴이들이 참 많은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했다.

▲2016년 책마실 도서관에서 [사진=북구여성회 제공]
▲2016년 책마실 도서관에서 [사진=북구여성회 제공]

수요 서명전은 물론이고 조은화 어머님부터 시작해 지난 2주기 때 다영이 아버님까지 중요한 시기마다 가족간담회와 다큐멘터리 상영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지역 어린이날 행사, 팔거천 축제에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부스를 설치하고 아이들이 직접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다른 지역과 달리 부설 도서관이 있어서 1주기 때는 ‘우리가 올리자’는 주제로 전국 작은 도서관 공동행동을 했고, 2주기 때는 ‘기억의 자리’를 마련해 어린이들이 종이배를 접고 리본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활동을 직접 하면서 세월호를 기억하고 생각하도록 했다.

이런저런 활동 기억을 되새기면서 남숙경 씨는 ‘중간에 수요 서명전이 어려워 어떻게 할지 의논한 적이 있었는데, 그만두었다면 모두 잊혀졌을 것’이라며 ‘계속 활동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박경희 씨도 ‘서명전을 하면 아직도 인양이 안 된 거냐. 진상조사 다 된 것 아니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다’며 ‘우리 활동으로 최소한의 사실이라도 알릴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는 이야기도 이었다.

다음은 인터뷰를 마치며 참가자 네 분이 한 이야기들이다.

박경희 씨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져서 빨리 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어요. 그런데 올해 들면서는 좀 길어지더라도 이번만큼은 진상이 정확하게 밝혀지고 정의롭게 일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길게 가야 할 싸움이니 강박감에 시달리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한편으로는 무리해서 일하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래 해야지요.”라며 밝게 웃었다.

자주 눈시울을 붉히며 울던 김경희 관장이 “도서관에서 노란 리본을 얻어간 중학생이 며칠 뒤 친구들 두 명이나 더 데리고 와서 같이 리본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또 기억의 자리를 만들었을 때는 큰 아이들이 동생들에게 세월호 이야기도 해주고, 배 접는 법도 가르쳐주는 걸 보면서 우리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이지만 우리 차에 붙은 노란 리본을 누가 몰래 떼 낸 적이 있었는데 평소 세월호에 대해 별말 없던 남편이 노란 리본 더 없냐고 찾으며 막 속상해했었어요. 저도 어디 행사나 모임 가보면 차마다 있는 노란 리본에 반갑고 힘이 나고요. 우리에게는 노란 리본이 그냥 노란리본이 아닌 거죠”라고 이야기하자 너도나도 같은 마음이라고 한마디씩 보태기도 했다.

김지훈 씨는 “제가 안전을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로 관심을 갖게 된 일은 지하철 3호선을 세울 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아직도 2003년 대구지하철 중앙로 참사에 대한 기억이 생생해요. 사고 현장 인근에 있었거든요. 두 번씩이나 지하철 사고를 낸 적 있는 대구에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또 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참사가 일어난 이유도 돈이 최고인 구조 때문인데 말이에요. 구의역에서 청년이 사망한 사건도 같은 이유로 일어난 일이고요.

곧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시기인데요, 사람 목숨을 돈으로 매기겠냐만은 사망사고 발생 시 보상금액을 높게 책정하게 되면 기업 입장에서 안전시스템 구축비용보다 보상비가 많게 되어 안전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되지 않을까, 사람 목숨을 함부로 대하는 시스템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포항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쇳물에 빠져 죽는 이런 일을 막지 못하는 후진적 시스템을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숙경 씨는 “지금까지는 이기는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되는 사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치하에서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구했는데도 북한 땅에 있다는 이유로 빨갱이가 되어서 그 자손들은 인정도 받지 못하는데,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사회니까요. 그래서 솔직히 지금은 ‘희망이 있어!’라는 마음보다 절망을 더 많이 배워서 힘든 마음이 큽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사회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감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면서, 조금씩 더 성장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바른 나라에서 살아가는데 보탬이 되는 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요,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지만,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인터뷰를 하고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녹취록이 있어 다시 듣고 이야기를 옮겨 적으며 당사자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제일 컸고, 다음으로는 이렇게 글이 늦어진 나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날마다 있는 다사다난한 일과 업무가 넘치는 현실은 여전했지만, 이전과 비교해 특별히 더 많아진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지난 2년여 동안 쉬지 않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부모들, 세월호참사대책위원회 활동가들, 대구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싸우고 견뎌왔다. 그 순간순간은 고스란히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며 온 마음과 몸을 써 온 시간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길어질 줄 알았지만, 2년이 지나고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 부모들이 길바닥에서 한뎃잠을 자야하고 연행을 당하고, 울고 다치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아프게 실감했다. 지난 2년여 동네를 지키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을 해 온 북구여성회 회원들의 수고와 아픔이 마치 미열처럼 나를 따라다닌 한 달이었다.

지난 6월 25일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 800일 대회에서 단원고 2학년 3반 유예은 학생의 아버지이자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인 유경근 씨는 ‘열 번을 지고 백 번을 지더라도 우리는, 단 한 번만 이기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 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과정이 마지막 순간, 단 한번 이기는 그 순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고 디딤돌이 될 것’이니 ‘참사의 원인이 밝혀지고 안전한 나라가 만들어지는 그날까지 긴 시간, 긴 여정을 함께 포기하지 않고 걸어왔구나, 서로에게 박수 쳐주고 환호성을 칠 수 있는 그 자리에 여러분들과 함께 끝까지 남아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호소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도종환 시인의 시 제목). 남숙경 씨 말처럼 오늘 우리의 현실이 어려울지라도 우리의 활동이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아가는 일, 그 나로부터 희망은 조금씩 지펴지고, 단 한 번 승리로 가는 날도 가까워질 것이다. 오늘 세월호참사의 진실과 안전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위해 거리에서, 자기가 있는 곳에서 땀 흘리고 마음을 보태는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 2주년 대구시민대회에 참가한 북구여성회 회원과 자녀들 [사진=북구여성회 제공]
▲2016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 2주년 대구시민대회에 참가한 북구여성회 회원과 자녀들 [사진=북구여성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