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희는 레이더 앞에서 참외나 깎아라, 우리는 싸울 테니

[기고] 김수상 시인

18:37
▲7월 15일 성주군청 앞 집회에 참석한 성주군민들.
▲7월 15일 성주군청 앞 집회에 참석한 성주군민들.

너희는 레이더 앞에서 참외나 깎아라, 우리는 싸울 테니

김수상

밥을 먹을 때도 시를 쓸 때도 기승전결이 있다.
연애를 하거나 하물며 죽음을 맞이할 때도 기승전결이 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칠 때도 마찬가지다.
기승전결은 서사다. 서사는 이야기다.

너는 기승전이 없이 왔다.
이야기가 없이 왔다.
무작정 왔다.
결론으로만 왔다.
통보로만 왔다.

기(起)는 뜻을 일으키고, 승(承)은 이어받아 전개하며,
전(轉)은 한 번 돌리어 변화를 주고, 결(結)은 마무리하는 것이다.
설득은 그렇게 하고 정치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너는 우리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와서 손님처럼 대해주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리며 오히려
우리를 불순하다고 몰아세운다.

옛사람 가야인의 무덤이 별처럼 돋아있는 별의 산 성산(星山)에
미사일이 온다고 통보하는 날,
참외밭 찜통하우스에서 참외를 따던 우리는
새까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천년의 바람이 아직도 놀고 있는 성밖숲의 왕버들은 분해서 잎을 떨었고
가야산의 여신도 고개를 돌렸다.

레이더가 오고 미사일이 오면
철조망이 쳐지고 전자파가 읍내를 뒤덮는다는데
아이들이 뛰어노는 운동장엔
전자파가 수영장의 물처럼 흥건히 고여 있을 텐데
어쩌나, 정말 그러면 어쩌나
벌들도 떠난 들판엔 참외 꽃만 혼자서 시들어갈 텐데
성산의 고분 위의 별들도 더 이상 돋아나지 않을 것인데

어떤 것을 함부로 거칠게 다루면 그것은 천하게 되고
초대받은 손님처럼 대하면 그것은 귀하고 기품 있게 된다.
너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을 함부로 대했다.
우리의 노동을 거칠게 대했다.
우리의 정갈한 밥상을 발로 차 엎었다.
밥상을 엎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죽는 어이없는 죽음을 수없이 보았다.
이 땅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법 없이도 가야산의 맑은 물처럼 살던 우리들은
군청의 앞마당으로 모여들어 촛불을 밝혔다.
교복을 입고 유모차를 끌고 밀짚모자를 쓰고
땀에 젖은 수건을 목에 걸고
전쟁반대 사드반대, 사드배치 결사반대를 외쳤다.
우리는 지역이기주의가 아니고
우리는 종북이 아니고
우리는 전문시위꾼이 아니고
우리는 외부세력이 아니다.

우리는 기가차서 뭉쳤고 억울해서 뭉친 사람들이다.
참외도 놀라서 주먹을 쥐었다.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열망하고
전쟁을 반대하고 폭력을 반대하고 미사일을 반대하고
전자파를 미워하는 성주에서 똘똘 뭉친 내부세력이다.

우리는 얼떨결에, 정말 얼떨결에 세계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성주의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워 평화의 파란 리본을 만들었다.
우리 성주는 이제 성지가 되었다.
반전평화운동의 성스러운 땅이 되었다.
너희는 우리를 함부로 대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평화의 채찍으로 매질하며
강철처럼 단련되고 있는 중이다.

나 오늘 울먹이며 고백한다.
나는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다.
아이들 다 키우면 성주 성산리로 내려가서
작은 집 하나 짓고 텃밭 가꾸며 살려 했다.
시가 안 써지는 날이면 성산리 고분에 가서
성산가야 옛사람의 별처럼 반짝이는 말씀도 받아쓰려고 했다.
사는 일이 숨찰 때마다 빚을 내서 마련한
성산리의 작은 집터에 이쁜 집을 짓는 꿈을 꾸었다.
지금 거기엔 미사일을 모르는 나비 떼만
여름꽃 위에 나풀거리며 놀고 있다.
내 집터에 미사일이 웬 말이냐,
억울해서 못 살겠다!
분해서 못 살겠다!
사드배치 철회하라!
평화세력 연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