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 파리코뮌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15)-1

13:43

벽에 등을 대고 아이는 소리쳤다. “나는 여기 있을래요.”

어리석은 처형은 수치를 부른다. 그래서 사관은 놓아주었다.

아이여, 나는 알 수 없다. 선도, 악도, 영웅도, 도둑도,
모두를 끌어넣어 흘러가게 하는 회오리 속에서,
무엇이 너를 이 전투에 끌어들였는지, 하지만 나는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마음이야말로 가장 기품 있는 마음이었음을.

– 빅토르 위고, 시집 『참혹한 해』(L’Année terrible)의 <길거리의 바리케이드 위에서>(Sur une barricade, au milleu des pavés) 중에서 –

1. 왜 다시 파리코뮌인가?

“자유로운 삶, 아니면 죽음을!”(파리코뮌의 구호)
“Vivre libre ou mourir!”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세월호와 함께 ‘대한민국호’도 침몰하였다. 대통령과 청와대, 장차관 등 고위공무원, 그리고 위정자들의 무능을 탓하고 비난하기에는 ‘주권자’로서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하였다. “내 손으로 저들을 뽑고, 내가 낸 세금으로 저들을 먹여 살리다니…”란 자괴감, 국제법 전공자로서 ‘국가 대 개인의 관계’를 연구하고 가르친 학자로서의 부끄럼과 무력감, 476명 중 295명 사망, 9명 실종이라는 수치 앞에 무덤덤한 가증스러운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스포츠 생중계를 보듯 침몰하는 배 안에서 죽어가는 존귀한 생명을 구하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란 해묵은 논제가 다시금 가슴으로 다가왔다. 정말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지만 학자로서 나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나 자신과 이 사회와 국가에 대한 분노와 좌절, 그리고 열패감 등이 뒤섞여 한동안 침울하였다. 동시에 나의 사고는 정지되었다.

내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자 화두인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나키즘’이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18~9세기 유럽의 전통적 아나키즘, 그중에서도 프루동, 고드윈, 슈티르너,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이었다. 개인의 절대자유를 지향하는 아나키즘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써서 대구경북지역 인터넷언론 <뉴스민>에 장기간 연재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의 사상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아나키사상(아나키즘)의 원형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에 대해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도 늘 가슴 깊이 내려앉은 부채(빚)랄까, 숙제랄까, 일종의 의무감이 나를 억압하고 있었다. 바로 ‘파리코뮌’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때로부터 약 100년간 프랑스는 파리를 중심으로 온갖 정치체제와 사상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실험무대와도 같았다. 그 실험의 마지막 무대이자 결말이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일어난 ‘파리코뮌’이다. 72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민중권력에 의해 자치가 행해진 대가는 유혈참극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파리코뮌의 혁명정신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 나아가 자유를 원하는 전 세계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크고도 깊었다.

▲2016년 7월 21일 서울역에서 열린 성주군민 사드 배치 철회 집회 [사진=워커스 김용욱 기자]
▲2016년 7월 21일 서울역에서 열린 성주군민 사드 배치 철회 집회 [사진=워커스 김용욱 기자]

이 글을 쓰는 중 지난 7월 8일 정부는 사드 한반도 배치를 발표하고, 13일 경북 성주를 설치 지역으로 확정하였다. 성주주민들과 일체의 협의나 형식적인 공청회도 거치지 않은 반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이날부터 ‘민중권력’ 성주시민들은 ‘중앙권력’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으레 그랬듯 정부는 ‘외부세력 개입 운운’하며 공안몰이를 시작했다. 대추리(평택미군기지), 제주 강정(해군기지), 밀양(송전탑) 등에서 보았던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다.

2016년 7월, 약 150년 전에 일어난 파리코뮌을 다시 불러낸다. 파리코뮌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자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파리코뮌을 어떻게 수용하고 평가할까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다만, 나는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던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개인으로서의 나의 해방이 집단으로서의 우리의 해방이니까. 알베르 카뮈는 평론집『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 1951)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Plutôt mourir debout que de vivre à genoux.”

▲1871년 파리코뮌 [사진=http://jdennehy.com/revolutions-the-paris-commune/]
▲1871년 파리코뮌 [사진=http://jdennehy.com/revolutions-the-paris-commu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