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 파리코뮌의 역사적 배경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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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리코뮌의 역사적 배경

코뮌(commune)은 프랑스의 시, 읍, 면 등 최소행정자치단체(혹은 최소행정구)를 말하는 것으로 파리코뮌(Commune de Paris(불); Paris Commune(영))이라 함은, 파리의 최소행정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파리코뮌이라 함은, 1871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72일 동안 파리민중들의 봉기에 의해 수립된 혁명자치정부를 일컫는다. 혹자는 이를 ‘1871년 파리코뮌’(Commune de Paris de 1871)이라 부르기도 한다. 파리코뮌 이후 파리는 ‘유럽의 심장’, ‘혁명의 메카’가 되었다.

파리코뮌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코뮌 참가자의 폭과 범위는 어떠했는가? 당시 코뮌에는 일부 특권계급을 제외하고 파리의 노동자, 상공업자, 여성 및 외국인 등 거의 전 시민이 열광적으로 참가하여 시민자치의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만큼 코뮌에 참가하는 민중의 폭과 범위는 다양하였다. 둘째, 왜 ‘1871년의 프랑스 파리’인가? 다시 말하여, 유럽의 다른 도시가 아니라 왜 파리에서, 또 1871년에 민중권력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가?

[사진=jdennehy.com]
[사진=jdennehy.com]

물론 파리코뮌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리고 위 질문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서는 ‘1871년’을 전후한 프랑스의 사회정치 상황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폴레옹 3세의 집권에 의한 제2제정의 성립과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의 프랑스의 패배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만 파리코뮌의 발발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18세기는 막을 내리고, 유럽에서는 ‘혁명의 세기’로 불리는 19세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유럽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거센 요구로 봉건적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과 실험의 시대였다. 이런 가운데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혁명은 프랑스는 물론 영국, 독일 및 이탈리아 등 유럽전역에서 빈체제를 붕괴시켰다(‘1848년 혁명’). 이 혁명으로 유럽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저항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프랑스에서는 2월혁명의 발발로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이 해산되고, 공화정이 성립하였다. 2월혁명의 최대 수혜자는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다. 그는 2월혁명 이후 수립된 새로운 공화국에서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그 후 쿠데타를 통해 제2제정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은 국내의 노동자·농민, 부르주아의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유지를 꾀하고, 국민의 인기를 얻기 위하여 국내외적으로 여러 정책을 폈다.

나폴레옹 3세는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흐름에 따라 경제 개발에 힘써 농업국가였던 프랑스를 공업국가로 탈바꿈시켰다. 또, 파리만국박람회를 개최하고(1855년), 오스만 남작과 함께 파리개조사업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실시로 그는 인민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국내정책에 대한 평가와는 달리 대외정책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는 크리미아전쟁·러시아전쟁·인도네시아출병·이탈리아통일전쟁은 물론 멕시코전쟁에도 참가했으나 크게 실패한다. 이로 인해 대중의 그에 대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나폴레옹 3세의 정치적 실각의 최대 원인은 보불전쟁의 실패다.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비스마르크와 대립하면서 프로이센과 전쟁을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만다. 심지어 나폴레옹 3세는 스당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싸우다 항복하고 포로가 되기까지 한다. 결국 나폴레옹 3세는 폐위됐고, 제2제정도 붕괴한다.

제2제정 치하에서 반정부 운동을 했던 급진파 강베타는 1870년 9월 4일, 파리시청에서 임시국방정부를 구성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임시국방정부의 임무는 프로이센의 점령하에 있던 일부 프랑스 영토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의 조기 실현을 바라는 임시정부와 철저한 항전을 요구하는 민중은 대립하였다.

1870년 9월 5일에는 인터내셔널파의 발의로 ‘공화국회의’가 개최되었고, 임시정부와 시정 감시를 위해 파리 각 구에 감시위원회(Comité de vigilance)가 설치되었다. 그 결과 9월 13일 파리 각 구 대표 4명을 비롯해 총 80명으로 구성되는 중앙대표기관인 ‘파리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Comité central républicain des Vingt arrondissements. 이하 ‘20구 중앙위’)가 발족했다. 20구 중앙위는 <제1차 붉은 포스터>(Affiche Rouge)로 알려진 성명을 게시하고, 국가경찰의 폐지, 파리시 공무원과 사법관의 선출, 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생활필수품의 징발과 그 배급제, 전 시민의 무장, 그리고 지방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위원 파견 등을 제시했다.

프로이센은 임시국방정부에 강화를 제안했으나 인터내셔널과 20구 중앙위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항전하기로 결정했다. 임시국방정부와 20구 중앙위는 다음 4개항의 결의를 채택한다.

① 공화국은 영토를 점령한 적과 교섭할 수 없다.
② 파리는 항복보다는 폐허에 몸을 묻기로 각오한다.
③ 파리와 다른 시도에 총동원령을 내린다.
④ 파리시경찰을 곧바로 파리코뮌에게 넘긴다.

이에 프로이센은 1870년 9월 19일부터 132일 동안 파리를 포위하고 압박하였다. 1871년 1월 18일 심지어 프로이센은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였다. 1월 28일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휴전조약을 맺었다.

1871년 2월 선거로 의회가 구성되었고, 티에르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의회의 다수는 왕당파가 차지하였다. 2월 26일 티에르와 비스마르크 사이에 알자스와 로렌의 할양,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조건으로 하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굴욕적인 휴전 및 강화조약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농성하고, 프로이센에 항전하였다. 3월 1일 프로이센군은 파리에 입성했으나 파리 시민들의 저항으로 사흘 후인 3월 3일 파리에서 철수한다.

당시 파리에는 프로이센에게 포위되어 있던 겨울 동안 프랑스 정부가 국민군(파리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었던 대포가 도처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대포가 시민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티에르 임시정부는 이를 되찾기 위해 정부군을 파견한다. 3월 13일 파리민중들은 파리코뮌을 만들어 정부에 저항하였다. 파리 시민들의 저항에 밀린 티에르는 베르사유에 군대를 집결하고 파리 탈환을 위한 총공세를 준비하였다.

3월 17일부터 18일 밤까지 외무부에서는 파리의 국민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협의하기 위한 각료회의가 열렸다. 작전 제1단계는 파리국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뷔트 몽마르트, 벨빌고지, 뷔트 쇼몽, 탕플 교외, 바스티유광장, 뤽상부르 공원 등 주요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또한 저항하는 국민군 병사는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정부군의 치밀한 작전에 따른 진압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파리코뮌 지도부는 거의 무방비상태에 있었다. 3월 18일 새벽 여명과 함께 ‘파리코뮌’의 서막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