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17) 세계일주

13:44

세계일주

그대의 길은 잘못된 길이다
―세계일주를 하고 온 길은 잘못된 길이다
―세계일주를 떠났다는 것이 잘못된 길이다
너무나 잘못된 길이다
너무나 많은 잘못된 나라다

그 죄과(罪過)를 그 방대한 21개국의 지도를
그대는 선물로 나에게 펼쳐 보이지만
그대가 준 손수건의 암시처럼
불길한 눈물을 흘리게 했지만
그 분풀이로 어리석은 나는 술을 마시고
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고
지옥의 시까지 썼지만

지금 나는 21개국의 정수리에
사랑의 깃발을 꽂는다
그대의 눈에도 보이도록 꽂는다
그대가 봉변을 당한 식인종의 나라에도
그대가 납치를 당할 뻔한 공산국가에도
보이도록
지옥의 시를 쓰고 난 뒤에
그대의 출발이 잘못된 출발이었다고
알려주려고
모든 세계일주가 잘못된 출발이라고
알려주려고―

‘세계일주’는 <김수영 전집 1(시)>에서 인용했습니다.

지금이야 외국 여행을 가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됐지만, 예전에는 대한민국을 떠난다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수영이 살았던 1960년대 후반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이 시에 등장하는 “그대”는 단순한 외국 여행이 아니라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시적 화자에게 “21개국의 지도를” 펼쳐 보이며 그간의 동선과 그 와중에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2연의 3행~4행, 이 작품에서 “그대가 준 손수건의 암시처럼/불길한 눈물을 흘리게 했지만”이 약간 의아하지만 아마도 “그대”가 겪은 어떤 안타까운 일들에 대한 단순한 감정이입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시가 ”그대의 길은 잘못된 길이다“는 단언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면, 도중의 감정의 흔들림이 낯설어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런 다음에 ”그 분풀이로 어리석은 나는 술을 마시고/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고/지옥의 시까지“ 쓴다.

지인으로 추정되는 “그대”가 겪은 “봉변”에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표할 수 있지만, 시인의 이성은 “그대”가 겪은 “봉변”은 그것대로 두고 나서, “그대”가 “세계일주를 하고 온 길은 잘못된 길”이다 못해 아예 “세계일주를 떠났다는 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말한다. 왜 시적 화자는 “세계일주를 떠났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길”이라고 이토록 단호하게 말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이 작품 내부에서 드러난 것을 참조해 유추해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가 써진 시기가 1960년대 후반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작품 내부에서 단서를 찾아보면, 3연의 4행과 5행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대”가 “21개국의 지도를” 펼쳐 보이며 세계일주 중 겪은 일들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식인종의 나라”와 “공산국가”를 언급하며 그 나라의 어떤 후진성을 지탄했을 가능성이 높다. “식인종의 나라”에서 당한 “봉변”과 “공산국가”에서 당할 뻔한 “납치”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대”의 입에서 언급되었음 직한 “식인종의 나라”라든가 “공산국가”라는 언표는 이식된 식민주의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대”의 언표는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혐오와 경멸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일주를 하고 온 길은 잘못된 길이다”고 했다가 “세계일주를 떠났는다는 것이 잘못된 길이다”고 고쳐 말하는 것에는 어떤 전략이 숨겨져 있거나 아니면 악센트를 주기 위한 방법론적 선택이다. 그런데 왜 “세계일주를 떠났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길”이 되는 것일까. 시적 화자는 여기서 윤리적 판단을 기입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1960년대 후반에 “세계일주”를 한다는 것은 이른바 스폰서가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1970년대 초반 미당이 어떤 언론사의 후원으로 세계일주를 하고 남긴 시편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세계일주”를 가능케 한 “그대”의 물적토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그대”가 누구인지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없다. 하지만 스폰서가 나설 정도이면서 시적 화자이기도 한 김수영에게 찾아와 자랑하는 걸 보면, “그대”가 차지한 사회적 위치가 어디쯤인지 대략 짐작은 간다. 아무튼 시적 화자는 “그대”에게 “세계일주를 떠났다는 것이 잘못된 길이다”고 말하면서, 대신 그는 “술을 마시고/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고/지옥의 시까지”쓴다. 묘한 것은 이 구절의 앞에는 “그대”가 겪은 일들에 대한 감정이입 상태가 기술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감정이입 상태의 “분풀이로” “술을 마시고/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고/지옥의 시까지” 썼다는 점이다.

여기서 “분풀이”는 두 가지를 겨냥한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로는, “잘못된 길”을 떠난 “그대”에 대한 것이며, 다음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겪은 일들에 대한 자신의 감상주의를 겨냥한 “분풀이”이다. 아무래도 좋다. 김수영에게 중요한 것은, 감상주의나 광기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이 “지옥”이라는 것을 새삼 자각하는 일이다. 시는 지옥에서만 태어나는 법이니 모든 시는 “지옥의 시”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김수영은 자신의 모든 시가 “지옥의 시”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산대로/여편네를 때려눕혔”던(「죄와 벌」) 전적(?)이 있던 그가 다시 이 시에서 “술을 마시고/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는 만행을 저지른 걸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시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상황은 연극적 장치의 배열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주어진 현실을 ‘지옥’이라고 호명할 때 어떤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곤 하는데, 호명 주체를 ‘지옥’ 외부에 존재케 하는 게 그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 “술을 마시고/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는 행위는 시적 화자 자신을 먼저 ‘지옥’에 던져 넣는 번제의식에 가깝다. 김수영은 언제나 자신의 몸을 통과한 흔적을 통해 시를 사유했다. “술을 마시고/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는 만행이 실제 있었는지 아니면 작품의 극적 효과를 노린 시적 장치인지는 물론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수영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이 ‘지옥’임을 다시 몸으로 산 다음에 시를 썼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지옥임을 시시각각으로 망각하곤 한다. 시는 그러나 그 망각을 흔들어 실존의 좌표를 다시 세우고 존재의 들림을 향해 모험을 강행한다.

이 작품에서 “지옥의 시” 다음에 “사랑의 깃발”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치이다. 지옥에 사는 존재를 망각의 강에서 꺼내어 다시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일 없는 “눈동자는 거짓말이다/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기(「이혼취소」) 때문이다.

“그대”가 갔다 온 “21개국의 정수리에/사랑의 깃발을 꽂는다”는 진술은 명백히 산문적이다. 이 구절의 반복에서 김수영 특유의 산문적 ‘범람’은 보이지 않고 상투적인 진술을 되풀이하는 것은 과연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것도 “보이도록” 또는 “알려주려고” 같은 과시 혹은 계몽을 위해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힘은 “지옥의 시” 다음에 “사랑의 깃발”이 등장한다는 2연과 3연 사이의 행간에 있다. “지옥의 시”를 통해서만 “사랑의 깃발”은 가능하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이 작품의 감상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너무도 자유로운 외국 여행과 너무도 당연한 스폰서의 존재는 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점도 따져볼 문제이다. 시인이란 예술가인가? 시란 것은 물적 토대가 보장되어야 터지는 방언인 걸까? 하지만 우리는 경제적 지옥에서 살지 않는 시인들의 어떤 몰골들을 가끔씩 확인하곤 한다. 시인은 꼭 가난해야 하는가? 하는 항변은 애당초 물음으로서의 위의가 없다. 어쩌면 자기변명 또는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 문제는, 우리 시는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