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 파리코뮌의 조치와 성과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15)-4

0
2016-08-18 13:47 | 최종 업데이트 2016-08-18 22:23

4. 파리코뮌에 의해 취해진 조치와 성과

3월 29일 제1회 코뮌평의회가 구성한 열 개의 위원회는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1일, 코뮌평의회는 집행위원회의 위원을 ‘대표’(délégué)로 임명하여 다른 아홉 개 위원회의 업무를 지도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구스타브 클뤼즈레(군사; 5월 1일 루이 로셀, 5월 10일 다시 샤를 들레클뤼즈에 의해 대체), 외젠 프로토(사법), 오귀스트 비아르(식량공급), 에두아르 바이앙(교육), 라울 리고(일반안전; 4월 24일 프레데릭 쿠르네, 5월 13일 다시 테오필 페레에 의해 대체), 레오 프랑켈(노동·산업·무역), 쥘 안드리유(공공사업)가 대표로 선출됐다.

이 결정으로 집행위원회의 권한이 강화됐으나 반대로 ‘혁명독재’를 위한 기반이 마련되는 계기가 됐다. 5월 1일에는 공안위원회(le Comité de Salut public; Committee of Public Safety)가 설립되어 코뮌평의회 산하 위원회 기능을 잠식했다. 또, 더러는 공안위원회와 다른 위원회의 권한 행사 범위가 서로 혼동되어 갈등이 야기됐다.

코뮌평의회는 5월 20일까지 존속했다. 이때까지 입법을 포함한 다수의 조치가 채택되어 72일 동안 시행됐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 평의회는 적법한 권한을 가진 정부기관이 아니었으므로 파리코뮌이 진압되자마자 그 모든 조치는 폐지할 필요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코뮌평의회가 채택한 일부 조치가 제5공화국에 의해 다시 채택·시행된 것은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비록 72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파리코뮌은 새로운 유형의 정치체제를 제시했다. 또한 코뮌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 나아가 세계 각국의 시민, 정치가와 사상가들에게 개인자치와 통치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이념과 작동원리에 대한 수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파리코뮌이 성취한 많은 업적 가운데 주요한 몇 가지에 대해 살펴본다.

① 코뮌: 세계 최초의 ‘인민국가’

맑스는 파리코뮌을 ‘노동자 국가’라는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실현된 사회혁명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보겠지만, 파리코뮌 당시의 ‘프롤레타리아’를 오롯이 ‘무산자’ 혹은 ‘노동자’로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는 프랑스 혁명 이래 사회의 정치적 주체로 활동한 ‘인민’(Peuple; People) 혹은 ‘민중’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인민은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서 ‘시민’(citoyen; citizen)으로 불렸다(현재열, 101쪽). 파리코뮌의 참가자 절반 이상이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파리코뮌은 파리의 인민·민중 또는 ‘시민’들의 주권으로 성립된 세계 최초의 ‘인민국가’·‘민중국가’ 혹은 ‘시민국가’로 보아야 한다.

인민주권은 “민중 대중을 포괄하는 개인들의 총체인 인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의미한다(Rémond, p.53; 현재열, 102쪽에서 재인용). 인민주권이 행사되는 파리코뮌에서 인민은 그들의 대표자 또는 평의회 위원들을 통하여 그들의 정치적 권리가 행사되지 않는다. 코뮌평의회를 비롯한 산하 위원회의 위원들은 인민들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자(délégué(s)), 즉 수임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위임자인 인민이 원하지 않으면, 또는 원하면 언제든지 해임 또는 소환(리콜)될 수 있었다.

파리코뮌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는 국민군 중앙위원회의 3월 22일자 선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코뮌평의회의 위원들이 인민대중의 여론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감시받고,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고, 또 그들이 해임되고,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에게 부여된 위임은 강제적인 것이다.”

파리코뮌의 이 입장은 주권자로서 시민이 직접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가해야 한다는 시민권사상에 의거한 직접민주주의와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1793년에 채택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프랑스 인권선언)이 ‘헌법 정신’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저항권(le droit à l’insurrection)이 현실적으로 발현된 것이기도 하다. 이 선언 제35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부가 인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저항은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절대적 의무로서 인민을 위한 것이고, 또 인민 각자의 몫을 위한 것이다.”

“Quand le gouvernement viole les droits du peuple, l’insurrection est pour le peuple, et pour chaque portion du peuple, le plus sacré des droits et le plus indispensable des devoirs.”

저항권은 시민들의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절대적인 의무”라는 이 조항이 내포하고 있는 ‘헌법 정신’에 따라 실제 파리코뮌 당시 법관을 포함한 모든 관리는 철저한 리콜제에 따르고, 관리의 정치적·직업적 선서 의무는 폐지되며, 그들의 월급은 노동자의 최고임금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이 의미에서 20구 중앙위가 9월 22일의 선언에서 말한 코뮌은 ‘인민 자신에 의한 직접민주정부’였던 셈이다.

② 노동·사회정책

“우리는 3월 18일의 혁명이 노동자계급에 의해 이뤄졌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코뮌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지 않겠다.”(레오 프랑켈)

인민대중의 정치혁명의 결과물로 탄생한 코뮌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조건과 그 사회적·경제적 및 법적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조치를 채택했다. 파리코뮌은 19세기 프랑스 노동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사회 전반에서 노동자들의 정치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파리코뮌은 국제노동자협회가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 해방”(l’émancipation des travailleurs par les travailleurs eux-mêmes)이 달성된 ‘노동자 국가’였다.

파리코뮌에 의해 채택·시행된 사회노동입법조치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첫째, 프랑켈의 발의로 4월 16일, “경영자에 의해 버려진 공장시설 접수와 노동자 협동조합에 의한 그 관리·운영에 관한 법률(데크레)”이 제정됐다. 이 법은 공장시설 접수 후 경영자가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 보상조치가 이뤄지면 그 공장을 노동조합의 소유로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주간 노동 시간은 최대 10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사업장의 경영진은 노동자에 의해 선출되도록 정하였다.

둘째, 4월 27일에는 노동자에 대한 벌금제와 임금공제가 금지되고, 4월 28일에는 빵 굽는 노동자의 야간노동을 금지하는 법령이 공포됐다. 하지만 양 조치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이에 대항하여 코뮌평의회는 전자에 대해서는, 공공조달을 위한 입찰 시 최저임금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업체는 제외시켰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위반자에 대한 생산제품 차압 등의 제재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코뮌평의회는 기업에서 노동자의 자주경영이 개시된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모든 기업에서 경영진(지도부)은 사업장별로 매 15일 마다 선출·교체되며, 경영진은 노동자들의 주장이나 의견을 들을 의무가 있었다.

이 외에도 코뮌은 사회민주주의의 실현에 관한 다양한 입법을 채택했다. 이를테면, 주택임대료법 제정, 채무만기법 폐지, 정부의 빈곤자 구제의무화, 공창제도 폐지 및 도박 금지 등을 그 주요 정책으로 들 수 있다.

tele
Print Friendly, PDF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