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가 지배하는 노동자의 도시 구미, 그리고 아사히비정규직노동자들

[기고] 김태영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장

13:36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경향이 있다. 하버드대 대니얼 사이먼스 교수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으로 이를 증명해 보였다.

‘실험참가자들에게 흰옷 입은 3명과 검은 옷 입은 3명이 뒤섞여 농구공을 패스하는 1분짜리 동영상을 보여준다. 사회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몇 번의 패스가 오갔는지 세어 볼 것을 지시했다.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의상을 입은 사람이 천천히 걸어와 9초간 머무르면서 가슴을 치는 모습을 삽입했다.’

사회자는 동영상이 끝난 후 “시청 중에 고릴라를 보았느냐?”는 진짜 질문을 던진다. 실험참가자 중에서 대부분인 54.3%는 아무것도 못 봤다고 했다.

‘이런 데가 있는지 몰랐어요’ 민주노총 문을 어렵게 열고 노동조합 설립 상담 오는 노동자들의 하나같은 대답이다. 그토록 많은 거리 선전활동과 투쟁을 해 왔지만, 일상의 노동자에게 민주노총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였다.

‘그래도 민주노총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민주노총이 직장 내 신변의 위기가 닥치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구미공단은 화학섬유산업의 쇠락으로 과거의 화려함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경북지역 가장 큰 노동자 밀집지역이다. 그러나 구미공단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경북 내 비슷한 규모의 노동자 밀집지역인 경주와 포항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노동자가 밀집되어 있지만 노동조합이 미약한 구미공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구미공단에는 삼성과 LG라는 거대 재벌기업이 있다. 두 재벌기업 계열 하청업체에는 노동조합이 거의 없다. 아사히글라스는 삼성과 LG에 유리기판을 납품하는 하청업체다.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 노동자들은 단순히 노동조합을 만들었기 때문에 해고된 것이 아니다. 구미공단을 지배하는 삼성과 LG라 재벌기업의 무노조 또는 친기업 노조 노무관리 시스템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노동조합 설립이 대부분 그렇듯 최초에는 분노로 조직된다. 아사히글라스는 정규직은 식당, 사내하청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동호회 활동 금지, 징계조끼 착용, 통근버스 미배정 등 2015년 대한민국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억압과 차별, 무언의 폭력이 공장 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노동조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아예 노동자들이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폭력적인 노무관리 행태다.

아사히사내하청노동자들이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 하청업체 사장은 교섭하자고 했다. 그러나 원청업체인 아사히가 느닷없이 하청업체에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하청업체 사장은 졸지에 노동자 170여 명의 업체 하나를 잃어버리고도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경북지방노동위원회는 이들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각하했다. 구미시와 구미노동지청의 대응도 일사불란했다. 하청노조 하나를 깨자고 벌인 작당은 아닐 것이다.

4.13총선 구미갑 지역에 출마한 노동자 후보 남수정 동지는 약 39%로 진보정당 전국 최고의 득표를 올렸다. 이는 기존 구미지역에 출마한 노동자 후보 누구도 획득하지 못한 득표다. 개인의 득표역량도 있겠지만, 구미지역 노동자들의 눈에 노동자 후보가 들어온 것이다. 노동자 후보가 선택된다는 것은 노동자의 신변에 중차대한 위기나 분노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이 겪었을 억압과 차별, 무언의 폭력이 구미공단의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보태 최근 나타나고 있는 제조업 전반의 선제적인 구조조정 위협이 공포로 작동하고 신변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사히5

금속노조 구미지부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은 아사히 공장 앞 선전활동뿐만 아니라, 구미공단 내 삼성, LG 하청업체 공장 앞에서 선전활동을 하고 있다. 여기에 자본과 경찰, 공공기관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분고분했던 노동자들이 경기침체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노무관리의 공포에서 촉발된 위기의식으로 인해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은 억압과 차별, 공포와 폭력적인 노무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구미공단을 예리하게 뚫고 나온 송곳이다. 경북지역 최대 노동자 밀집지역인 구미공단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절실하다. 구미공단 노동자들은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투쟁을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싸움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은 스스로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돈이 없어 투쟁을 멈춘다는 눈물 섞인 하소연을 들을 수는 없다. 우리는 구미지역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연대를 확장하고 있다. 구미지역의 모든 노동조합이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투쟁과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의 힘만으로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투쟁을 엄호하기에는 힘이 달린다.

감히 호소드린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이 뚫고 나온 송곳의 파열구를 통해 구미공단의 많은 노동자가 노동조합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과 여전히 억압과 차별, 폭력에 갇혀있는 구미공단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가 절실하다. 23명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투쟁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연대, 1만원 CMS 2300명 조직에 적극 동참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한 기금마련 CMS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