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변홍철

[기고] 변홍철 녹색당 대구시당 공동운영위원장

12:06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쩐지 조금 서글픈 느낌을 주는 질문이다. 어느 사이엔가 한국사회에서 ‘행복’을 말하는 것이 왜 이다지도 한가하고 사치스럽다는 기분이 들게 되었나. 행복은커녕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 헌법에는 ‘행복’이라는 말이 이렇게 또렷이 적혀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헌법 전문)한다. 그리고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10조)

국가의 정체성과 목적, 국민의 권리와 의무 등을 밝히고 있는 헌법에 이토록 분명히 박혀 있는 ‘행복’이라는 말이 입에 올리기에 송구스런 말이 되어 버렸다면, 지금 이 나라는 분명히 잘못된 길, 한마디로 헌법 정신과 가치에 맞지 않는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오랫동안 덴마크 사회를 취재하고 연구해온 오연호 기자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미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읽고, 한때 ‘덴마크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금 우리의 착잡한 현실을 말하다가, 갑자기 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의 복지국가를 대조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썩 달갑지 않다. 그러나 다른 나라를 막연히 동경하거나 질투하기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불리는 그 사회에서,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찾고 배우려는 노력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엔은 2012년부터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행하고 있다. 156개국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해 국가별 행복도를 보여주는 보고서인데, 여기서 덴마크는 2012년에 이어 2013년에도 1위를 차지했다. … 덴마크는 다른 글로벌 조사기관들이 실시하는 행복지수 조사에서도 1위를 하거나 최상위권에 속해왔다.” (오연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프롤로그 중에서)

여기에서 이 책의 내용이나 덴마크 사회의 이모저모를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내 기억에 가장 깊게 남아 있는 이야기는 “덴마크의 노조 조직률이 70퍼센트 전후로, 세계 평균 23퍼센트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었다.

노조 조직률과 행복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길 가며 만나는 누구라도, 카페와 술집, 도서관이나 공원에서 만나는 낯선 누구라도, “저이도 나랑 마찬가지의 노동자이고 노조원이겠지” 하고 느끼는 유대감, 친밀감. “저이의 권리가 곧 나의 권리, 저 사람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 하고 여기는 동료의식. 혹시 내가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누군가 기꺼이 나를 옹호해주고 함께 항의해줄 거라는 믿음.

그러한 ‘사회적 연대’가 든든하므로, 또 국가는 그렇게 노동조합과 다양한 협동조합 같은 아래로부터 축적된 ‘사회적 연대의 구조물’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까짓 일자리 잠시 없어도 상관없어. 더 좋은 일자리 알아보지 뭐” 하고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공기, 안정감.

‘행복’이란 결국 이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행복’을 단지 개인의 심리상태라고만 치부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헌법에 적혀 있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모든 국민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마치 치열한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승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전리품인 것처럼 희소해진다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나라인가.

다시 한 번 묻자.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오직 사회적 연대의 결과물로서, 함께 누리는 ‘공유재’일 때에만 오롯이 의미 있고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바로 노동조합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 나라의 노조 조직률은 사회적 연대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잣대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노조 조직률은 얼마나 되는가. 10퍼센트도 채 안 된다. 그것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있던 노조도 깨지고, 사측의 온갖 방해와 협박에 못 이겨 노조를 탈퇴하는 조합원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감, 행복지수가 하위권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추석 명절에도 농성장을 지키며 싸우는 장기파업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구미의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자들도 그 가운데 하나다.

“9년간의 최저임금, 시도 때도 없는 권고사직, 상시적인 인권침해를 당하면서도 회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더 이상 참고 일할 수가 없어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아사히가 도리어 노동조합을 만든 업체만 통째로 계약해지했다. 하청업체는 폐업했다. 지노위에서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는 각하되었다. 하루아침에 170명의 노동자가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되었는데 법은 불법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차헌호 지회장의 말이다.

아사히글라스는 어떤 회사인가. 차 지회장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아사히는 국내에 들어올 때 특혜를 받고 들어온 일본기업이다. 12만 평의 토지를 50년간 무상으로 임대받고 각종 세금을 5년간이나 면제받았다. 아사히는 특혜를 더해서 연평균 매출액 1조 원인 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하루아침에 9년을 일한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쫓았다.” (차헌호, 「단결의 힘으로, 투쟁의 힘으로」, 『레프트 대구』 제10호, 2015년)

해고된 지 1년 3개월, 6개월은 실업급여, 6개월은 금속노조 장기투쟁기금으로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며 싸워왔다. 그런데 다음 달부터는 조합원들이 생계기금을 지급 받지 못할 상황에 부딪쳤다. 9월 말까지, 월 1만원씩 내는 후원인 2300명을 조직하려고 한다. 현재 투쟁하고 있는 23명의 조합원들이 그 기금을 월 100만 원씩 나눠가며,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서다.

구미지역 노동자들의 현실과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조 투쟁의 의미에 대해서는 얼마 전 <뉴스민>에 김태영 본부장(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이 잘 정리해 주었다.(공포가 지배하는 노동자의 도시 구미, 그리고 아사히비정규직노동자들)

무엇보다 차헌호 지회장의 다음 말이 이 투쟁의 사회적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 준다.

“아사히 비정규직 지회는 구미공단에서 최초의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구미공단에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우리 싸움에 달려 있다. 우리 투쟁이 어떻게 마무리되는가에 따라서 구미지역의 민주노조 운동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헌호, 「단결의 힘으로, 투쟁의 힘으로」, 『레프트 대구』 제10호, 2015년)

그런데 이것은 비단 ‘민주노조 운동의 운명’이나 ‘구미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우리 사회의 ‘행복’과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시민들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노조 조직률이 10퍼센도 안 되는 사회에서, 또 하나의 노조를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게 방치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에서 또 한걸음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일자리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지키기 위한, 즉 ‘헌법 가치’와 ‘공공성’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다.

그러므로 아사히 비정규직 노조를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책무이자,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나는 그러한 ‘사회’가 아직 남아 있다고 믿고 싶다. 손을 내밀어 그 투쟁을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은, 연대로써 이 사회를 지키는 촛불을 켜는 것이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서글픈 질문을 할 때, ‘헬조선’의 현실을 탓하고 저주하게 될 때, 냉소와 낙담을 털어내고 차라리 촛불 하나를 더 밝히자. 지금 성주 군민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아래 링크에 접속하면, 함께 촛불을 들 수 있다.
http://bonalee0602.wixsite.com/asahi-spon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