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칼럼] 9.11 15주년을 맞아 테러리즘을 생각한다

전쟁 자체가 테러리즘인데 어찌 ‘테러에 대한 전쟁’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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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9 12:59 | 최종 업데이트 2016-09-19 13:00

15년 전 로스쿨을 갓 졸업하고 뉴욕의 한 비영리 공익로펌에서 일을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뉴저지에 살고 있던 나는 회사에 가기 위해 뉴저지에서 맨하탄 월드트레이드센터로 들어가는 패스라는 전철을 탔다. 그리고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몇 블럭 떨어져 있는 월스트리트 역으로 가서 다른 지하철로 갈아타야 했다.

9월 11일 화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월드트레이트센터에서 나와 유서 깊은 트리니티 교회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하늘을 올려 보니 빌딩 숲 사이로 하얀 종이들이 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어디서 가스 폭발사고라도 났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무슨 일인가 달려가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제 겨우 한 달도 안 된 신참이 지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월스트리트역으로 내려가 마침 도착한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월드트레이드센터를 빠져나온 직후 제1타워가 첫 테러 공격을 당한 것이다. 그때 내가 서 있던 곳에선 빌딩들에 가려 제1타워가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지하철을 타고 그 지역을 빠져 나온 것이다. 내가 탄 지하철을 마지막으로 시내의 지하철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창밖으로 항상 보이던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화염에 싸여 있었다. 그리고 곧 무너져 내렸다. 시의 모든 다리와 터널의 교통이 통제되어서 나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매일 지나다니던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다시는 갈 수 없게 되었다.

▲2011년 9.11테러 당시 [사진=Flick.com Robert J. Fisch]
▲2011년 9.11테러 당시 [사진=Flick.com Robert J. Fisch]

뉴욕 시민들은 3,000명에 가까운 무고한 사람의 희생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깊이 애도했다. 또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 세계 초강국 미국의 한복판, 세계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그 상징적 건물인 월드트레이드센터가 테러 공격으로 무너졌다. 어느 한 곳 안전한 곳이 없다는, 하루아침에 뉴욕도 바그다드나 히로시마처럼 불바다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애도의 뜻으로 곳곳에 성조기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연일 미디어에서 떠들어 대는 불순한 ‘외부인들’과 무고한 ‘우리들’의 편가름 속에서 무슬림을 비롯한 이민자들은 우리가 제오열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압력을 받았다. 자신의 집 앞에, 차에 성조기를 내거는 것은 우리가 외부불순세력과 아무런 연계가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표현이었다. 곳곳에 내걸었던 성조기 물결은 단순히 복수를 다짐하는 호전적 애국주의가 아니라 추모와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이러한 애도와 공포 분위기를 중동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절호의 찬스로 이용했다. 부시 정권은 곧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군사 보복을 감행했다.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카에다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이 타깃이 됐다. 하지만 타깃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8년 민주당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사람들은 미국이 중동에서의 전쟁과 학살을 끝낼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오바마는 부시의 제국주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파키스탄, 예멘, 소말리아, 시리아, 리비아 등으로 미국의 직간접적 군사 개입을 더 확대해 왔다. 2011년 마침내 9.11테러의 책임자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의사회(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에 의하면 2015년 초까지 테러와의 전쟁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만 2백만 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계속되는 군사행동에도 테러의 위협은 줄어들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더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말대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전쟁 자체가 테러리즘인데 어떻게 테러에 대한 전쟁을 할 수 있을까? 테러리즘을 테러리즘으로 대응하는 것은 더 많은 테러리즘을 불러올 뿐이다.

9.11테러 이후 정치인들은 미국이 ‘개방된 민주주의 사회’라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취약하다며 공권력 확대와 대국민 사찰 그리고 이민 규제 정책을 앞 다투어 제안했다. 대표적인 반테러법인 애국법(The USA PATRIOT Act)이 9.11테러가 일어난 후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민주, 공화 양당의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하지만 이 법안은 테러리즘 방지를 빙자한 미국 내의 민주적 권리들에 대한 제한과 반전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한 시도였다. 서방의 다른 국가들도 ‘테러와 싸운다’는 미명 하에 이와 비슷한 법을 통과시키면서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을 강화하고 자국민에 대한 억압과 사찰을 강화해 왔다.

주류 언론과 정치인들 그 누구도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왜 미국이 타깃이 되었을까? 왜 미국이 전 세계인의 혐오 대상이 되었나?

그 해답은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있다. 9.11 테러공격이 일어나기 전 20여 년 동안 미국은 그레나다, 리비아, 파나마, 이라크, 소말리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유고슬라비아 등에 군사적 공격을 감행해 왔다. 특히, 중동에서 미국은 자신의 지역패권을 충실히 지켜주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점령과 억압을 눈감아 줄 뿐 아니라, 1991년 이라크를 침공하는 걸프전을 벌이면서 수백만 아랍 민중의 원성을 사 왔다.

걸프전으로 20만 명의 무고한 이라크인이 죽었다. 중동의 부유한 나라였던 이라크는 걸프전 이후 ‘산업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후 90년대 미국이 주도한 유엔의 이라크 경제봉쇄 결과 50만 명이 넘는 이라크 어린이가 죽었다. 희생된 대부분의 아이들은 걸프전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1995년 당시 민주당 클린턴 정부의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아이들의 죽음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미국의 정책을 정당화했다.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다며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할 때마다 나는 올브라이트가 내뱉은 이 차가운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전쟁에 내몰린 이라크의 어린이들 [사진=pixabay.com @aneb13]
▲전쟁에 내몰린 이라크의 어린이들 [사진=pixabay.com @aneb13]

이런 반인류적인 학살과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계속 진행하기 위해 미국과 서방이 조장해 온 것이 바로 이슬람 혐오와 반 무슬림 인종주의다. 오마바 정권에서도 이는 변하지 않고 있다. 현재 공화당 대선 후보 트럼프의 반 무슬림, 반 이민자 데마고그 캠페인은 바로 지난 15년간 더 강화되어온 공화, 민주 양당의 일관된 인종주의적 반 무슬림, 이슬람 혐오 정책이 그 기반을 제공했다.

9.11테러 이후 나는 한동안 거의 매일 저녁 유니온스퀘어에 나갔다. 당시 유니언 스퀘어 남쪽 14번가부터는 전면 통행이 금지됐다. 그래서 유니온스퀘어는 무너져 내린 트윈타워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도 나는 도시 전체를 뒤덮은 뿌연 연기와 마치 사람의 살이 타는 듯한 지독한 그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도시 전체가 마치 유령의 도시로 변한 듯했다. 그 무거움에 눌린 사람들이 하나둘 유니온스퀘어에 모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반전운동을 벌이는 시민들 [사진=http://www.outsidethebeltway.com/]
▲반전운동을 벌이는 시민들 [사진=http://www.outsidethebeltway.com/]

낯선 사람들이 같이 울고 같이 노래도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한쪽에서는 9.11의 비극을 더 큰 비극으로 몰고 가지 말라며 미 제국주의 정책의 중단을 요구하는 즉석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곧 반전을 위한 연대 모임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9.11테러가 일어난 후 며칠 안에 조직된 뉴욕의 첫 반전연대 모임에 5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60년대 반전운동의 베테랑들부터 10대 학생들까지, 나이와 성별과 인종을 초월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테러 행위를 규탄하면서 동시에 반아랍, 반이슬람, 반이민자 그리고 모든 인종과 종교에 대한 편견과 폭력에 반대함을, 모든 종류의 군사적 개입에 반대함을 천명했다.

이런 자생적인 반전 모임은 미국의 다른 주요 도시들로 확대 되면서 9월 20일에는 36개 주 150여 개의 대학에서 일제히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그 다음 날인 21일에는 뉴욕에서 5천 명이 넘는 시위대가 ‘전쟁은 답이 아니다’, ‘이슬람과 아랍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9월 11일의 비극을 전쟁을 위해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9.11 직후 열흘 만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리고 이런 자생적 움직임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더욱 고조되어 2003년 2월 15일 미국과 유럽, 호주, 한국 등 전 세계에서 천오백만 명이 참여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전시위로 이어졌다.

15년이 흘렀다. 긴 시간이다. 나는 그사이 사무실에서 16년 차 고참 변호사가 되었고, 또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그 긴 세월 동안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됐지만, 세상은 조금도 더 안전해지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이 땅에 희망이 있을까 회의가 들 때마다 나는 떠올린다. 저들이 떠들어 대던 피의 복수와 애국심의 광기를 거부하고,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더 큰 비극으로 몰고 가지 말자고 함께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것이 내가 9.11테러 15주년을 맞으며 잊지 않고자 하는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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