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왜 대구에서 태어난 거냐”…왜 부끄러움은 대구사람 몫인가요?

대통령 사진 걸어 둔 식당, "한 표 찍어 준 게 억울해서 걸어 놨다"
매일 늘어나는 대구 촛불...19일, 1만명 시국대회 예고

12:40

대구 중구 삼덕동1가 5-2. 프렌차이즈 빵집과 대형 문구점 사이 골목길에는 금연구역을 피해 담배를 피우러 나온 이들이 하나둘 모여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인증샷을 찍는다. “이런 거 없애라. 난리 나는 거 아니야?”하며.

바로 대구 시내 한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다. 대구 중구는 이곳에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 현판을 세웠다. 현판에는 “박근혜 대통령은 이곳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1953년 서울로 이사하였다”고 소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1952년생이니 생후 1년 동안 행복한 유년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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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삼덕동1가 5-2, 인증샷을 남기는 시민들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판에는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과 ‘박근혜 하야해’라고 적힌 종이컵이 꽂혀 있기도 했다. 최근 잇달아 불거지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점점 등을 돌리는 대구 민심이다.

20대 딸과 함께 시내에 나온 김 모(57) 씨는 “딸 보기 제일 부끄럽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 씨는 “대구에서 믿고 밀어줬는데, 나이 먹은 우리가 많이 부끄럽지요. 박정희 대통령 얼굴에 먹칠은 안 할 줄 알았는데, 대구 산다는 자체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박근혜 생가터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와 불과 100m 떨어진 대구시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광장에서는 2주째 ‘내려와라 박근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뒤로는 ‘A4 데모’가 한창이다.

최 모(71) 씨는 “우리는 관심이 없었지.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거 보니까 실감이 나네. 허무감이 제일 크지. 나이 많은 사람들은 실망감이 지금 대단하다”며 “앞으로 대구에서 큰 사람 나오면 안 돼. 대구 이미지 나빠져. 우리도 4.19 때 데모하고 다 했는데, 또 이렇게 해서 해결되겠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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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동성로 ‘A4 데모’

정치적 고향이라 불리는 대구 곳곳에서 박근혜 대통령 흔적을 볼 수 있다. 대구시 중구 약전골목에 있는 ‘ㅇ 삼계탕’ 가게는 박 대통령이 지난 2012년 다녀간 곳이다. 박 대통령이 삼계탕을 먹는 사진이 4년째 걸려있다.

가게 주인 정 모(66) 씨는 “방에 액자에다가 해 놨는데 어르신들이 이제 대통령도 됐는데 액자가 저게 뭐냐 그래서 2년 전 리모델링하면서 액자도 좋은 거로 바꿨다. 바꿔 놨더니 이렇게 됐다”며 입구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금빛 액자에 담긴 박 대통령 사진은 가게 밖에서도 훤히 보인다. 정 씨는 “어르신들은 오면 사진 보고 다 불쌍하다 한다. 대구는 옛날 박정희 향수에 젖어 있다”며 “젊은 사람이 와서 이거 이제 내려야 안 되냐고 하는데, 내가 한 표 찍어 준 게 억울해서 걸어 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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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삼계탕’, 금빛 액자 속 박근혜 대통령(가운데)이 삼계탕을 먹고 있다.

정 씨는 “아버지 밑에 교육받았으면 대통령이 잘해야 하는데. 뭐에 세뇌 교육이 됐는지. 공주로 커서 뭐를 아나. 사람은 순수해도. 잘할 줄 알고 찍어줬는데”라며 “옛날에 북한에 애들 ‘김일성, 김일성’하면서 그런 거처럼 어릴 때부터 최태민, 최순실한테 완전 세뇌 교육이 된 거 아니가”하고 덧붙였다.

지난 11일 대구백화점 앞에서 열린 ‘내려와라 박근혜’ 대구 2차 시국대회에는 5천여 명 대구 시민이 모였다. 주말을 지나 평일 열리는 촛불집회에는 꾸준히 100여 명 이상 시민이 모인다.

14일 오후 7시 촛불집회를 지켜보던 고3 학생 3명은 “대통령이 왜 대구에서 태어난 거냐”며 입을 모았다. 이들은 “저희는 투표권이 없으니까 사실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막상 이런 일이 터지니까 너무 부끄럽다”며 “청소년도 투표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커진다”고 말했다.

시내에 놀러 나왔다는 대구대 학생 3명은 촛불집회가 열리는 가장자리에 서서 앉을까 말까 이야기를 나눴다. 한 학생은 “많이 참여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좀 부담된다. 오늘 시내에 놀러 안 왔으면 이런 집회를 하는 줄도 몰랐을 텐데, 대구 시민들도 박근혜 대통령 내려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생 처음 집회에 나왔다는 김 모(60) 씨는 “오늘 집회 처음 나와 봤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하다 하다 지쳐서라도 (대통령이) 내려오겠지”하며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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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박근혜 대통령은 1998년 15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내리 4선을 지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이후 대구지역 대통령 지지율은 9%까지 떨어진 바 있다.

‘박근혜퇴진촉구대구비상시국회의’는 오는 19일 오후 5시, 대구시 중구 중앙로네거리(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1만 명이 모이는 3차 시국대회를 예고했다. 경북대학교 총학생회는 오는 18일 박근혜 정권 퇴진 건을 논의 안건으로 학생총회를 열기로 했다.

대구 촛불집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호가 있다. “대구에서 끝장내자”.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고향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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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대구백화점 앞, 대구 2차 시국대회에 5천여 명 대구 시민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