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니들이 이 맛을 아느냐? / 김수상

16:14

니들이 이 맛을 아느냐?

김수상

깃발들이 모였다
단풍은 지고 있는데
소성리로 가는 깃발이 울긋불긋하다
평화나비의 깃발
사무여한의 깃발
사드반대의 대형 깃발
성주가
김천이
원불교가
일본국의 교가미사키와 교토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깃발이 되어 초전에 모였다

징소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두드리고 땅을 울렸다
풍물을 앞장세우니 만장과 깃발도 따라서 들썩인다
사드배치 결사반대!
박근혜는 퇴진하라!
새누리당 해체하라!
구호도 깃발처럼 드높다

잿빛의 하늘에 성긴 눈발이 비치는가 싶더니
눈이 온다
아, 첫눈이 오신다
평화나비의 깃발이 첫눈을 맨 먼저 받아먹는다
소성리 할매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피었다
관절염 절뚝이는 다리로 깃발을 지팡이 삼아
잘도 잘도 걸으신다
눈발도 신이 났다

김천에서 온 할매 셋은 재잘대는 소녀처럼 걷는다
“이번에 사드 물리치면 우리는 원불교 믿을 거예요.
원불교가 우리한테는 참 큰 힘이라요.”
눈은 펑펑 내리는데,
별고을 사람들이 내주는 따뜻한 차에도
첫눈은 내리는데,
길목의 개들도 우리를 보고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며 목청 높여 짖는데,
아, 가슴 저 곳에서 치미는 이 뜨거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빠가 딸아이의 손을 잡고,
빨간 잠바는 파란 잠바의 손을 잡았다
깃대는 평화를 잡고
평화는 깃대를 잡았다
누구하나 흐트러진 발걸음 없이
평화의 발자국을 길 위에 새긴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걷는 이들은 이 첫눈을 눈으로 입으로 받아먹고
하늘 끝까지 신명이 뻗쳤는데,
걷다가 지칠까,
‘예그린’에서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신다
눈발 사이사이로 평화의 음표들이 떠다녔다

월곡지에 도착할 무렵 떡가루 같은 눈이 퍼붓는다
승복을 입은 김충환 위원장이 평화나비 깃발을 들고
풍물패 장단에 덩실덩실 춤을 춘다
사드를 타파하는 춤이다
이제 “사드타파!”는 성주 촛불의 인사가 되었다

아, 첫눈은 퍼붓고 뜨거운 눈물은 치미는데
노란 바탕의 붉은 글씨, 사드반대도 춤을 춘다
우리가 언제 첫눈 오는 이 길을
함께 걷게 될 줄 알았을까,
말들이 도란도란하다
주인을 따라나선 강아지들도 신이 났다
나도 강아지의 꼬리가 되고 싶었다

소성리로 가는 벽소로에는
떨어진 아기사과들이 눈발을 맞고 있었다
빨갛게 튼 아기사과의 볼이
성주 사람들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월곡지를 지나니 눈발은 더욱 퍼붓고
소성지의 억새들도 눈을 맞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얼어붙은 억새의 손들마저 우리를 반긴다
소성리 마을 분들이 어묵을 끓여놓고 기다린다
우리는 혁명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농민군처럼 기가 올랐다
아, 눈은 내리는데
큰 솥에서 끓고 있는 어묵의 맛이 천하일미다
눈 내리는 천막 밖에서
누군가가 잡목을 끌어와서 불을 지폈다
불은 따뜻하고
연기는 피어오르고
아, 눈은 내리고 어묵은 맛있고
뜨거운 국물 위로 다시 눈은 내리고
더 드세요, 더 드세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우리에게 해방이 있다면 이것이 해방이고
민주가 있다면 이것이 민주고
공화국이 있다면 이것이 공화국이다
우리는 소성리에 작은 공화국을 세우러 가는 사람들이다

얼마나 그리웠던가
이런 해방세상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눈발에 옷은 젖어도 사람들의 얼굴은 꽃처럼 피어났다
낯이 익은 소성리의 주민이 말했다
“소성리의 옛이름은 소야예요.”
소야(邵野), 아름다운 들,
소야가 첫눈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고 있었다

어제는 이백만의 촛불이 청와대를 에워쌌다는데,
차가운 차벽을 꽃벽으로 만들어버렸다는데,
단 하나의 폭력도 단 하나의 연행자도 없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평화로운 기적의 촛불이었다는데,
뇌도 없고 심장도 없는 너희들이
이 눈 내리는 소야의 벌판을 한 번이라도 걸어보았더라면
이런 패악의 정치, 치정의 정치는 하지 않았을 것인데

눈도 하얗고
떡국도 하얗다
소야의 마을회관에 오니
떡국이 끓는다.
인심이 만장(滿場)이다
웃음이 함박이다

나는 보았다
그 많은 떡국을 두 솥에 끓여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다시 끓여낸 떡국을 주기 전에
국자로 먼저 간을 보고 내어주던
그 인심, 그 배려, 그 사랑, 공화국의 벅찬 마음을
주사 맞고 약 처먹는 포르노 정권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우리 별고을 평화의 깃발들은
너희들에게 묻는다
니들이 이 맛을 아느냐?
이 해방공동체의 어묵맛과 민주공화군(民主共和郡)성주군의
떡국 맛을,
소야의 아름다운 벌판에서 온몸으로 맞는
평화의 첫눈 맛을, 니들은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