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노동자와 시민사회 / 함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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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8 15:32 | 최종 업데이트 2016-12-08 15:32

이번 시위에서 가시화된 최대 성과는 노동운동이 직접적으로 노동문제가 아닌, 시민사회 전체 정치투쟁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다. 아직은 1/n수준이지만, 2008년 ‘광우병 시위’와는 다른 양상이다. 사회 생산구조로 볼 때 분명 노동자는 모순 극복 주체인데, ‘자본주의 시민사회’ 모순 극복 주체로 등장하지 못해왔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기존 시민사회 개념과 운동을 비판하고 이론을 제기할 필요를 느낀다.

시민사회 무엇인가?

맑스 시대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발전하는 사회다. 이때 ‘부르주아 시민사회’란 소도시 규모에 산업시설이 들어서는 생산사회다. 맑스가 관찰한 시민사회는 생산과 분배를 두고 자본과 임노동이 매우 단선적으로 대립하는 사회였다. 그는 당시 시민사회 본질을 통찰하여 노동자는 투쟁으로 자본가 지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낙관론을 전개했다. 국가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의 경제 갈등(자본가와 노동자 갈등)이 팽팽하게 대치한 조건에서 부르주아들이 장악해 노동자와 민중을 억압하는 장치로 인식했다. 본은 시민사회이며 국가는 부차적이다. 그래서 자본가과 노동자 갈등은 국가가 해결할 수 없고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갈등하는 시민사회’ 개념의 원조는 헤겔이다. 그는 국가만이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헤겔은 자신의 철학이 지닌 전반적인 진보 기조와는 달리 정치에 있어서 보수성을 보였다. 그 이전 계몽주의 사상가 존 로크와 볼테르 등은 시민사회란 ‘노동하는 자본가 사회’로 파악하고 일하지 않는 봉건지주를 비판한다. 그래서 이들 이론은 부르주아 시민사회와 국가를 옹호한다.

포스트모더니즘, 그람시 시민사회의 왜곡

오늘날 시민사회에서 계급투쟁은 그람시의 통찰력으로 그 그림이 그려졌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잉여가치 수탈이 늘어나면서 여러 계급·계층이 형성되고 문화가 다양해진다. 시민사회는 단순 생산영역이 아니라 생활영역으로 확장한다. 대규모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자의 ‘죽은 노동’은 생산수단을 넘어 수탈자의 삶에 투입되면서 소비와 문화의 공간이 형성된다. 노동자 역시 투쟁을 통해 노동력 재생산비를 늘려 도시화에 적응하고자 한다.

노동자는 두 개의 공간에 놓인다. 하나는 생산현장, 또 하나는 생활현장이다. 를 주목한 자본가와 국가는 생산현장만이 아니라 생활현장을 이데올로기 장치로 포획한다. 교회, 학교, 연구소, 연예인 등 이데올로기적 기구를 동원하고, 억압적 국가기구를 무기로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이전에 치안 질서나 유지하는 경찰국가와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람시 이론은 변혁운동에서는 무시되고 자본주의 이론가에게 활용되는 기현상을 초래했다. 특히, 변심한 유렵 사회주의자들은 그람시를 이용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고자 이론적으로 숙고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로 배를 갈아탈 때 그람시, 루카치 등을 ‘노’로 삼았다. 알튀세르, 르페브르, 영국문화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더욱 심화시킨 네그리, 들뢰즈 등이 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이다.

그들은 수탈한 잉여가치 누적으로 이룩한 시민사회를 비경제갈등 영역으로 파악하고 숙의민주주의(하버마스)가 통용하는 영역으로 규정한다. 겉으로는 민주주주의를 지향하는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자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혹은 라클라우·무페의 급진민주주의론에서처럼 겨우 1/n로 제한했다.

이들은 맑스가 국가를 시민사회 갈등의 반영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관점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오히려 국가가 이데올로기를 지배한다(알튀세르)거나 생산양식까지 창조한다(르페브르)고 왜곡시킨다. 자본의 전령사인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은 시민사회에서 노동자의 투쟁 주체성을 말살한다. 아마 ‘은혜로운 국가’가 노동을 벌주어 자본가 지배를 돈독히 하기를 바랄 것이다.

거울보기

또 한쪽에서는 거울보기 현상이 일어난다. 민중사회와 시민사회를 구분하고 민중사회는 노동자가 주도하는 사회이고 시민사회는 시민(citizen)이 주도하며 이들은 부르주아라는 17세기에나 어울릴 법한 이론을 주로 노동 관련 이론가 일부가 주장한다. ‘시민사회는 원래 개량적’이라는, 무지하고, 마치 전쟁 포기 선언과 같은 언술을 뱉는다. 이들의 주장은 바로 노동운동의 경제주의로 귀결된다. 레닌과 마오가 들으면 반드시 언짢아 할 일이다.

우리의 투쟁은 부르주아 시민사회 내부 투쟁이다. 부르주아 시민사회에 외부는 없다. 그래서 그 외부에 건설하고자 하는 ‘대안사회’나 ‘자치공동체’는 허구이며 공상이다. 오직, ‘외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투쟁’만이 대안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경제주의 이론가 쌍방의 과실로 인해, 오늘날 생활영역과 생산영역의 분화와 통일인 시민사회를 노동자계급이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결과 낮에는 생산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지만, 집에 오면 생활현장의 정치에 무능할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의 정치세력

지금 시민사회는 양대 세력의 지배로 고정되어 있다. 첫째는 수구보수세력이다. 이들은 반공주의와 자본가 지배를 옹호한다. 사실상 시민사회를 주도한다. 재벌과 수구반공주의 세력이 연합했다. 둘째는 소부르주아지 상층이다. 이들은 완전한 자율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재벌에 하청계열화 된 측면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재벌과 주로 중소규모 기업가, 전문직들에 걸쳐져 있다. 이들은 언론과 일부 시민단체와 연합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이다. 현재는 후자가 시민사회에서 노동자·민중을 정치 측면에서 ‘허구적으로’ 대변한다. 민주화 이전에는 전자가 압도적이었으나 이후에는 후자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양자는 제도권에 새누리당과 민주당이라는 뚜렷한 정치세력을 두고 있다. 이들 사이의 갈등과 연합이 한국 사회 ‘지배 틀’이다.

이에 반해 노동운동은 시민사회 전체에 대한 개입을 삼가고 생산현장에서 자기의 경제 이익에 몰두하고 있다. 진보정당이 있지만, 이 정당은 ‘분견대’ 역할로 이해해야 한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의 압도적 다수 구성원인 노동자·민중은 사실상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 갈등

현재 대중의 투쟁은 박근혜의 무능과 악행에 대한 규탄으로 나타나지만, 근본은 경제 갈등이다. 재벌이 자행한 수탈에 대한 분노가 아직 즉자적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본질을 인식하는 데는 겨우 ‘한 꺼풀’이 씌워져 있을 뿐이다. 이를 드러내고 본질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존재가 바로 노동운동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싸움은 시민사회에 대한 자유부르주아지와 야당의 영향력 확장에 그친다.

젊은이와 청소년이 왜 집회장에 쏟아져 나오는가? 젊은이는 직장 없는 어려움, 청소년은 부모의 경제 빈곤에 대한 동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박근혜의 악행에 대한 도덕적 정의감 수준에서 자기를 표현한다. 여기에 노동운동가들이 그 경제본질을 알리고 향도한다면, 그들은 불만의 근원을 깨닫게 된다.

반공주의와 경제주의

오늘 노동운동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반공주의와 경제주의의 거울보기 때문이다. 반공주의는 45년 해방 이후 식민지반봉건사회 극복 과정에서 형성됐다. 미국과 친일파들이 협잡하여 민족을 양단으로 가르고, 자신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남한 내부도 반공을 잣대로 갈랐다. 그들은 진보를 빨갱이로 몰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이면서도 식민지반봉건의 요소를 안게 된 것이다. 반공주의는 반민주의 요체다. 반공주의는 식민지 반봉건의 잔재이며,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에 토대하는 파쇼체제의 산물이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천민자본주의인 것이다.

반공주의의 핵심목표는 노동운동에 타격을 가하여 자본과 지배연합이 경제적 이익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지도부를 거세하는 것이다. 혁명적 지도부 없는 노동자계급, 그건 경제주의 노동운동에 불과하다. 이는 노동자를 정치변혁의 주체로 이끌 지도세력이 없다는 것이며,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의식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향도하도록 노동운동을 이끌 지도세력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 존치의 핵심은 바로 이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경제주의 노동운동만 자리를 잡았다.

경제주의의 굴레, 이제 벗어버리자

경제주의 노동운동은 형식적으로 정치구호를 외치지만, 거기에 집중하는 정치세력이라고 할 수 없다. 시민사회를 이끈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은 각자 계급·계층의 경제적 이익을 따로 따로 보장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통된 요소, 모든 경제적 요소의 근본 원인인 정치지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즉 정치화한 노동자 계급의 향도로 전체 시민사회 성원의 이익을 실현하는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

경제주의 노동운동은 지배의 근본문제 해결이 아닌 현 체제 내 노동자 지위 상승을 꾀하는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 타 계급·계층들 즉 시민사회와 분리해서 자신만의 공간에서 이익을 취하고자 한다. 정치투쟁도 사회변혁이 목표가 아니라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는 데에 국한된다. 그래서 이 운동은 부르주아 틀 내의 노동운동, 즉 부르주아 노동운동인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특징으로, 당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세상을 바꿀 엄두를 내지 않는 것과 같다.

이번 시위를 통해 각종 민주개혁의 요구에 대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어야 한다. 특히 경제영역에서 민주주의 열망을 민주개혁의 구호로 표현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민주개혁을 열망하는 시민사회 대중운동을 이끄는 주체로 성장해야 한다. 이와 함께 시민운동은 소부르주아지 하층을 대변하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뉴스민에 실린 기고자의 글은 뉴스민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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