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국정교과서 최종본, 10월항쟁 왜곡 여전…이유는?

친일파 청산 실패한 미군정-이승만 정부에 대한 면죄부

14:46

어제(1월 31일) 역사 국정교과서 최종본이 발표됐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발표한 검토본에서 왜곡 논란을 일으킨 ‘10월항쟁’ 서술 왜곡은 여전합니다. 논란이 일자 일부 문장을 수정하면서도, 왜 10월항쟁 서술을 왜곡했을까요? <뉴스민>은 문제가 된 고등학교 역사 국정교과서 최종본을 통해 그 숨은 의도를 살펴봤습니다.

진실화해위, 대구시도 인정한 10월항쟁과 민간인 학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어떻게 왜곡했나

지난해 11월 28일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검토본이 공개됐습니다. 10월항쟁은 이 책 248쪽에 “신탁 통치 문제로 인한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조선 공산당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영남의 유혈 충돌 사건 등을 일으키며 미군정에 대한 물리적 투쟁을 전개했다.”는 한 줄로 10월항쟁을 서술했습니다. (관련기사=한국사 국정교과서, 대구 10월항쟁 왜곡(‘16.11.29))

이 서술이 왜곡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1946년 일어난 항쟁에 대해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희생자 발생, 친일파와 미군정 정책에 저항한 항쟁으로 인정했음에도 교과서는 이를 외면했기 때문이지요.

진실화해위가 2010년 발간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이 사건(10월 항쟁)의 일차적 책임은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살해한 현지 경찰에게 있다”며 “그러나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군정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에는 미군정이 남한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으므로 (중략) 미군정도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밝혔습니다.

대구시는 지난해 8월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검토본의 왜곡 사실 지적되자 최종본에서 10월항쟁에 대한 서술은 이렇게 수정됐습니다.

“한편, 신탁 통치 문제로 인한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조선 공산당은 1946년 9월 총파업을 일으키며 미군정에 대한 물리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대구, 영남 등지에서는 식량 등으로 대규모 소요 사건이 일어났다.”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을 따로 떼어놓았을 뿐 미군정에 의한 민간인 학살, 정부 책임이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0월항쟁을 왜 이렇게 왜곡 서술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보기 전에 기본적인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교육부가 공개한 한국사 국정교과서 최종본 250쪽.

‘조선 공산당’이 아닌 ‘조선공산당’입니다. 또, 총파업을 실제로 일으킨 단체는 ‘조선 공산당’이 아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소속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입니다. 그리고 ‘대구, 영남 등지에서’라는 표현도 틀렸습니다. 영남이라는 범주에 대구가 포함되지요. ‘소요 사건’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표현에 대한 부분은 접어두겠습니다.

다만, 왜 일어났는지 이유를 서술하는 데 있어 ‘식량 등으로’라고 쓴 부분은 참 어색합니다. 종이가 부족했던 걸까요? 식량 배급 요구라고 쓰더라도 몇 글자 늘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토지 문제와 친일파 출신 경찰에 대한 반발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정과 친일파, 지주의 정당성 보호를 위해
토지개혁 문제 말장난과 ‘반공’으로 포장

공부를 오래 하신 분들이 모여 교과서를 집필했다는데요(아, 물론 현대사 전공자는 집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만). 어떤 목표를 위해 일부러 왜곡하지 않고서야 실수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왜곡 서술에 참고한 사료도 궁금해집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미군정 지지를 등에 업고, 단독 정부 수립에 앞장선 이승만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섭니다. 1960년 부정선거와 4.19혁명에 이르면 이승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고 애씁니다. 반민특위 강제 해산과 친일파 청산 중단이 반공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승만 정부 또한 반민 특위 활동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며 공산화 위협에 대처해야 할 시급성 등을 들어 반공 경험이 풍부한 경찰을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국정교과서 한국사 최종본 254쪽)

그리고 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토지개혁을 긍정하는데 이릅니다. “북한의 농민들은 매년 생산량의 25%를 농업 현물세로 납부해야 했고, 분배받은 토지는 매매, 저당 및 임대가 금지되었다(254쪽)”며 부정적 평가를 합니다.

반면, 미군정의 토지 정책에 대해서는 “소작료를 3분의 1로 정해 과도한 소작료 수납을 금지하여 소작인을 보호하고 과거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귀속 농지를 유상으로 분배하였다(254쪽)”고 긍정하고 있습니다.

▲교육부가 공개한 한국사 국정교과서 최종본. 1948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강조하고 있다.

말장난이 보이나요? 25% 현물세를 분수로 바꾸면 4분의 1입니다. 소작료보다 적은 수치이지요? 또, 일본인이 소유했던 귀속 농지를 유상으로 분배하면 누가 이 많은 농지를 살 수 있을까요? 친일 경찰과 지주를 청산하지 못한 근본적 원인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정책에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어떤 책임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10월항쟁 왜곡의 핵심입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더불어 일제시기 독립운동의 정통성과 민중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던 좌익세력에 대해 탄압을 가합니다.1 9월 30일 대구에서 400여 명의 시민들은 시청 앞에 모여 쌀을 요구했고,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발포경관에 대해 중상을 입히고, 곧 대규모 시위로 확산됩니다. 2

9월 총파업에 참여했던 당시 전평 경북평의회 간사 이일재 씨는 “대구시투쟁위원회는 파업투쟁을 합법적인 틀 내에서 진행하고, 파업투쟁이 폭력적인 대중투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군정과 친일경찰에 대한 증오감은 우리가 막을 수 없었다” 3고 증언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통성으로 옹호하기 위해서는 해방 직후 일어난 민중의 요구를 제대로 기록해서는 안 되는 거겠지요.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잔재가 대한민국 곳곳에 살아남았음을 말할 수 없던 거겠지요.

교과서를 확인하고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님과 전화를 했습니다. 채 회장님 아버지는 10월항쟁 가담을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대체 쓰레기 같은 국정교과서를 왜 만드나. 10월항쟁이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지자 탄압하면서 10대, 20대 청년들을 많이 죽였잖아요. 그때 그들이 안 죽었으면 이 나라가 이렇게 인물난에 허덕이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국민이 바보입니까. 왜 국민과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에서 쓰면 안 되는 책입니다.”

  1. 김일수, 「10월항쟁 : 연구현황과 전망」, 『통일문제연구』30호, 2011, 49쪽
  2. 『대구시보』, 1946.10.15
  3. 천용길, 「오늘 우리에게 좌파란 무엇인가」, 『레프트대구』2호, 2011,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