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100호-노동의 인문학] 성장시대의 종언과 노동 /김종철

2017-03-29 15:41 | 최종 업데이트 2017-03-29 15:49

[편집자 주=이 글은 계간 <삶이 보이는 창> 100호(2014.9.24)에 실린 글입니다. 뉴스민은 <삶이 보이는 창>과 컨텐츠 제휴를 맺고, 필자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성장시대의 종언과 노동 

김종철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해 현재까지 활발한 생태운동을 펼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땅의 옹호』 『간디의 물레』 등, 번역한 책으로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 등이 있다

(지금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을 밀어붙이고 있는 한전 직원들도 모두 다 공기업 노동자들인데, 말로는 공공성 강화, 안전제일을 떠들어대면서도 밀양 주민들과 연대하지는 못할지라도 내 부에서 양심선언이 나오지도 않고, 문제제기도 나오지 않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것은 『녹색평론』 2014년 7-8월호 특집 좌담 「한국이라는 나라, 희망은 있는가」에서 나온 발언의 하나이다. 이 발언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노동 세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노동운동은 불가피하게 쇠퇴 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암암리에 지적되어 왔다. 식민지 시대와 오랜 독재 체제 밑에서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당하며 억압에 눌려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최소한도나마 인정받고, 그에 따라 불충분한 대로 합법적인 공간에서 노동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지 불과 수십 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오늘날 이 사회의 노동 세력은 심히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가장 서글픈 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가 자기 아이들에게 세습적으로 승계될 것을 바라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그것을 단체협약에 명문화해줄 것을 기도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갈수록 악화하는 고용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가족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명백히 노동운동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알려주는 단적인 징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주인이 된 세상을 꿈꾸며,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 누구나 자유인으로 살며 연대와 공생의 원리에 입각한 평화로운 세상을 창조해낼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그리고 세계의) 노동 세력이 보여주는 나약한 의지와 왜소한 모습으로는 그러한 희망은 헛된 몽상으로 끝나버릴 공산이 크다.

그러나 노동 세력 혹은 노동운동의 약화는 노동자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차별 없는 세상,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나라를 만들고 유지하자면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의 전횡과 자본가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사회적 대항 세력이 불가결하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대항 세력이 없을 때 권력(정치 및 경제 권력)은 반드시 전제(專制)적 권력이 된다. 이것은 인간 역사에서 철칙과도 같은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깊이 천착한 인물이 바로 몽테스키외이다. 그에 의하면 다수 인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정치 시스템은 공화주의 체제이며, 이 공화주의 체제의 지속 여부는 권력의 집중을 막고 견제할 수 있는 분권적 시스템의 확립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오늘날 의회민주주의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 민주주의일 뿐 사실상 대통령 중심 독재체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는 국가권력의 독주를 견제하고 권력의 합리적 행사를 돕는 분권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분권적 시스템을 위해서 불가결한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민중 권력의 강화이다. 어느 때에나 민주주의의 내실화를 위해서 민중 권력은 중요하지만, 지금 그 것이 무엇보다 절박한 것으로 된 것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국내외의 일반적 반민중적, 비민주적 정치 상황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대체로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정당정치를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기실 엄밀한 의미의 정당정치는 이미 효력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간주되어온 서구 세계에서 보수와 진보 정당들 간의 합종연횡이 일상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설령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지금은 어떤 국가에서든 보수파와 진보파 간의 정책적 노선 차이는 모호해져버렸고, 따라서 전통적으로 보수 혹은 진보적인 가치나 정책이었던 것들이 반대 측 정당들에 의해서 도 얼마든지 제창되거나 수용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새로운 계급의 등장과 군림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가계급’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보수ㆍ진보의 경계를 초월한 특권계급의 출현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 세계는 이 정치가 계급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군림하는 체제로 굳어져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선거라는 것도 이 정치가 계급이 번갈아가며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돕는 단순한 요식행위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정치가 계급’의 궁극적 관심사는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영속화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국익 혹은 공익으로 위장ㆍ은폐한다. 그리하여 규제 완화, 민영화, 자유무역 따위의 그럴싸한 경제 논리를 내세우며,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본과 긴밀히 결탁된 정치는 거리낌 없이 폭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노동자를 포함한 사회의 기층 민중의 생활ㆍ생존의 기반은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거침없는 폭주는 특히 90년대 초 소비에트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은 자본과 국가는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고 양보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노동 세력이 무기력해져버린 것은 물론 여러 복합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 중에서 매우 흥미로운 해석의 하나는, 세계경제에서 에너지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관련해서 이 문제를 논하고 있는 역사학자 티모시 미첼의 ‘탄소민주주의(carbon democracy)’론에서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보통선거권, 8시간 노동, 최저임금 보장 등 노동자들을 위시한 일반 민중의 기본권 보장과 제반 복지 시스템이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의 보편적인 상식이 되고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광범위하게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산업국들이 석탄이라는 에너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석탄이라는 것은 그 채굴과 운반과 실제 사용의 과정에서 매우 혹독하고 강도 높은 작업을 요할 뿐만 아니라 대규모 집약적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배층은 노동자와 빈민들의 요구를 최소한이나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막장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석탄을 채취하는 광부들의 존재 없이는 산업체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 분명한 이상, 노동 세력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대체로 19세기 중엽 이후 20세기 전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가 광산노조의 힘을 꺾는 데 성공하고, 그 이후 영국을 위시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운동이 사실상 쇠퇴 일로를 걷게 되면서 서서히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끈질긴 투쟁과 지배층으로부터의 양보를 통해서 획득된 노동자와 기층 민중의 기본권과 복지 시스템은 뿌리에서부터 훼손되는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철의 여인’ 대처가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강력한 노동 세력으로 알려져 있던 광산노조를 분쇄할 수 있었던 것은 따져보면 ‘탁월한’ 개인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이미 시대적으로 석탄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대신 석유가 핵심적 에너지원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티모시 미첼의 해석을 따르면, 석탄과 석유는 동일한 탄소 에너지원이지만, 그것들이 각기 갖는 정치적 함의는 매우 다르다. 즉 석탄 시대가 하층 민중의 민주적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한다면, 석유 시대는 오히려 석탄 시대에 획득된 민주적 권리들이 축소·훼손되는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된 것은 한마디로 석유 시대가 되면 더 이상 대규모 집약적 노동력이 필요 없어지고, 따라서 지배층은 예전처럼 노동자의 요구에 특별히 양보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석유라는 자원은 국내의 탄광이 아니라 주로 중동 지역에서 생산될 뿐만 아니라 석유의 채굴과 생산을 위해서 대규모 인력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산업사회의 핵심적 에너지원을 장악ㆍ통제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먼 중동 지역에서 생산된 석유는 유조선으로 원양을 통과해서 수송되기 때문에 노동자보다 더 필요한 것은 군대가 되고, 따라서 보다 강화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의 존재가 요청될 뿐이다.

티모시 미첼의 이러한 ‘탄소민주주의론’이 오늘날 노동 세력이 무기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설명한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간과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요인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자본의 득세와 노동의 패퇴’라는 시대 상황을 설명할 때, 지금까지 많은 논자들은 대체로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로 설명해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삐 풀린 초국적 자본이 국가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세계 도처의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들의 인권을 체계적으로 유린하는 메커니즘을 지적하는 데 열중해왔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압도적인 지배력 을 행사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에너지 문제가 개입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기초적인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흔히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티모시 미첼의 ‘탄소민주주의론’의 진정한 공적은, 그 이론이 에너지와 정치, 에너지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에 대해서 주목하게 만든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티모시 미첼에 의하면, 산업사회가 출현하여 석유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860년경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류 사회가 소모한 석유의 총량은 대략 2조 배럴에 달한다. 그런데 그중 첫 1조 배럴을 소모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30년, 즉 1860년부터 1990년경까지였다. 그렇다면 2010년까지 나머지 1조 배럴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신흥 산업국들의 가파른 석유 소비량을 생각한다면 석유 소비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식이라면 이용 가능한 석유 잔존량에 관계없이 석유 에너지에 기반을 둔 산업문명 시대는 조만간 종식될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석유 문명, 보다 정확히는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문명이 곧 끝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경제 성장 시대가 종언을 고할 날이 임박했다는 뜻이 된다. 결국 근본 문제는 ‘성장 시대의 종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엄밀히 보면 1970년대 초 1차 석유 쇼크가 발생했을 당시부터 이미 석유 문명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히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주류 경제학은 말할 것도 없고 좌파 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에서도 이 사실을 주목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당연한 전제로 해왔을 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주류 경제가 복합적인 위기에 처한 것도, 좌파와 노동운동이 침로(針路)를 잃고 헤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성장 시대의 종언’이 의미하는 바를 옳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성장 시대의 종언’이라는 전망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다운 삶이 재창조될 수 있을 것임을 내다볼 수 있는 정신적ㆍ사상적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좌파 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이 에콜로지 문제를 얼마나 핵심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독일 녹색당 창당의 중심 멤버로 활약했던 철학자 루돌프 바로는,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 시스템 바깥에서 생계를 도모하려고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자신도 모르게 ‘세계의 파괴’라는 거대한 악행에 가담하는 ‘사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예를 들어, 우리가 문명 생활의 도구로서 당연시 여기는 자동차도 핵무기 못지않게 세계를 죽음으로 이끄는 ‘흉기’라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이러한 발언을 단지 극단적인 ‘근본생태주의자’의 것으로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쳐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발언 속에는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진실’이 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갈수록 우리들 모두의 생명·생존에 있어서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는 ‘진실’ 말이다.

그러한 ‘진실’에 귀를 기울일 때만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미 그 가능성은 도처에서 시도되고 있다. 이 시도들 중에서 가장 뜻있는 것은 아마도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식량의 자급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다양한 운동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와 식량을 재생 가능한 방식으로, 또 자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환한다면, 그것은 단지 에콜로지적 생활 방식을 만들어낸다는 차원을 넘어가는 중대한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티모시 미첼의 ‘탄소민주주의론’의 논리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 논리에 따른다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불가피하게 지역 중심의 분권적 에너지 시스템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기층 민중이 스스로 에너지 시스템을 통제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자본과 국가에 복속되어 노예로 살아갈 필요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실질적 민주주의가 가능한 분권적 구조, 자립적 생활방식의 구축이다. 우리는 현재의 반민중적, 반생태적 지배 체제에 항거하여 끊임없이 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싸움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에너지와 식량을 중심으로 자치·자립·자급을 겨냥하는 연대와 협동 운동을 부단히 전개하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방향에 설 때만, 오늘날 혼돈과 무기력에 빠진 노동 세력 혹은 노동운동에도 비로소 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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