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100호-공간과 환경] 공장 환경에도 민주주의를 /김신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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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이 글은 계간 <삶이 보이는 창> 100호(2014.9.24)에 실린 글입니다. 뉴스민은 <삶이 보이는 창>과 컨텐츠 제휴를 맺고, 필자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공장 환경에도 민주주의를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실장. 생산과 소비가 만나야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고 노동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협동조합운동이 교통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최대 관심사다.

직업병의 발생 원인을 조사하는 일을 하다 보니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공장에 들어가면 천장이 얼마나 높은지 보고 공간의 체적부터 훑어보게 됩니다. 공간이 넓으면 유해물질이 발생하더라도 희석되면서 농도가 낮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눈을 돌려 먼지가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봅니다. 코로 들어오는 냄새를 맡고, 피부의 따가움도 느낍니다. 이 정보들은 공간의 크기와 맞물리면서 환경의 문제에 대한 예측으로 이어집니다. 측정 장비를 동원하는 것은 그다음의 일입니다. 제가 예측한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정밀 측정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제 예측은 대체적으로 맞는 편입니다. 나름 ‘촉’을 날카롭게 만드는 비결이 제게는 있거든요. 바로 공간 내의 ‘관계’를 읽는 것입니다.

똑같은 설계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공간에 똑같은 생산라인이 돌아가더라도 환경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설비와 사람,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가 환경을 달라지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한 공장은 창문을 열어 놓았고, 다른 한 공장은 창문을 꽁꽁 닫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척 큽니다. 그런데 공장의 창문은 노동자가 함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문을 열고 닫을 권리는 노동자에게 있지 않고 제품과 기계에 있습니다. 노동자가 답답하고 땀이 나느냐 보다 공정의 온도와 습도가 얼마로 유지되어야 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품과 기계와 화학물질과 노동자 중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것이 노동자입니다.

노동자가 흘리는 땀과 이산화탄소를 창문과 선풍기와 에어컨이 받아주고, 기계가 내놓는 먼지와 가스는 설비의 밀폐시설과 환기장치가 맡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노동 공간에선 직업병이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나 온 수많은 공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별것 아닌 이유로 노동자가 땀을 식힐 수 없고 유해가스가 노동자의 코밑까지 도달합니다. 그 별것 아닌 이유가 바로 공간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전 공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애씁니다. 노동자들이 불평불만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곳에서는 드러난 문제만 읽어내면 되고, 이런 곳들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안전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눈치를 보며 말을 조심하는 곳은 숨겨진 위험이 존재할 가능성이 큽니다. 노동조합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은 당연히 하늘과 땅 차이겠지요.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조합원을 무시하고 군림하는 곳은 조합이 없는 곳과 다르지 않습니다. 회사의 태도도 아주 중요합니다. 회사가 직원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곳과 무시하는 곳은 환경의 문제가 아주 다르게 나타납니다.

제가 2000년에 들어간 공장의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자동차 엔진 부품을 생산하던 그 공장은 원래 인천 삼산동에 있었지만, 지금은 충남으로 이사했습니다. 이곳 노동자들이 처음에 저를 부른 이유는 쇠를 깎는 과정에서 날리는 기름먼지를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속 가공 과정에서 절삭유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공기 중으로 미세한 입자가 되어 날리면서 노동자들의 코와 입으로 들어갑니다. 비염과 축농증 그리고 천식을 일으킬 수도 있고, 방광암이나 위암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0년도엔 이런 정보를 노동자들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사를 통해 천식 환자들을 찾아냈고 그것이 환경 때문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노사가 환경 개선에 합의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공구 연마 [사진=삶이 보이는 창 100호]
그런데 일이 잘 마무리되고 나자 저를 보는 현장 노동자들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외부에서 온 연구원 나부랭이에서 믿고 얘기해도 괜찮은 녀석으로 승격된 거죠. 하루는 고참 노동자가 유난히 많은 한 부서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이 얘기는 다신 안 꺼내려 했는데, 너한테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보려는 거야. 잘 들어봐.” 이렇게 시작된 얘기를 정리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예전부터 이 부서 노동자들은 집에 가면 괜찮은데 회사만 오면 피곤했다. 노동조합에 얘기하니 처음에는 그러냐며 들어주는 척하더니만, 나중엔 작업환경 측정에서 나오는 것도 없고 깨끗한데 나이 들어가지고 일하기 싫으니까 괜히 거짓말한다고 구박했다. 후배들 보기 민망하니 다시는 이런 얘기 꺼내지 말고 일 열심히 해달라며 노조 간부가 정색하고 얘기하는데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참 속상했다.’

다 듣고 나서 참 난감했습니다. 부서가 벽으로 꽉 막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온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일이 고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얘기가 거짓일 리 없다는 확신은 들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다가 결국 공장 도면을 꺼내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일을 하지 않는 새벽에 가스측정기를 들고 공장엘 들어갔습니다.

딱딱한 금속을 깎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른 금속을 깎은 다음에 열처리를 해서 딱딱하게 굳힙니다. 이 공장엔 열처리로가 석 대 있었고, 경유를 연료로 사용했습니다. 저는 열처리로에서 불완전연소가 일어나면서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아니 그것밖에는 의심할 것이 남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게 정확하겠군요. 문제는 그 부서가 열처리로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이라 다른 부서는 멀쩡한데 왜 그 부서만 문제냐 하는 거였지요. 기류,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새벽에도 불을 꺼뜨리지 않는 열처리로 주변에서 시작해 전체 공장의 가스 농도를 측정하고자 한 것입니다. 공장 내 기류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있고 가스 농도가 어떻게 공간별로 다르게 분포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측정 결과, 가스 이동 경로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열처리로 주변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작업장 방향으로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일산화탄소를 몰고 간 겁니다. 약 20~50ppm의 일산화탄소 농도가 그 작업장에 형성되었는데, 30ppm에서 4시간 일하면 정밀 작업이 어렵고 의욕이 감퇴합니다. 40ppm에서 8시간 일하면 몸을 많이 쓸 때 숨이 찹니다. 노동자들의 얘기가 다 사실이었던 겁니다.

다음 날 전체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저는 결과를 들은 선배 노동자들이 화를 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회사와 노동조합에게 모두 화를 내며 자기들의 얘기를 무시해 온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노동자들은 씨익 웃더니만, 서로 어깨를 치면서 이러는 겁니다. “그치? 그럴 줄 알았어. 우리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끝이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나중에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다른 공장에서 계속 반복해야 했거든요. 어떤 노동자에게 당신이 지금 발암물질을 쓰고 있다고 얘기해주면, 관리자는 노동자가 일 안 하겠다고 할까봐 옆에서 벌벌 떨고 있지만 대부분 노동자들은 심드렁하게 반응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 전부터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계속 거짓말이라고만 하더라. 이제라도 밝혀지니 다행이다. 고맙다. 나 이제 일해야겠다. 계속 수고하시라. 끝.
나중엔 대책이 논의되고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위험을 주장하다가 무시만 받아온 노동자들에게는 지금 당장 진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그 무엇보다 기분 좋고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코리아정공 매연 수치 [사진=삶이 보이는 창 100호]
회사는 시설 개선을 꺼리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생각을 억누르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저는 이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노동조합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지 않고 말 많은 몇 사람에게 의존하는 경우 이런 문제는 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결국 조합원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진짜 위험들이 드러나지 않고 숨게 됩니다. 위험이 원래보다 더 커진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경험을 더 얘기하겠습니다. 이 공장과 저와의 인연이 끝나기 전에 사건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번엔 성난 노동자들이 제 손을 이끌고 자기 부서로 데려갔습니다. 조립 라인이었는데, 디젤 지게차가 매연을 내뿜으며 주차해 있었습니다. 운전자는 화장실에 간 듯했습니다. 노동자들 얘기로는 지게차 운전자들에게 주차할 때엔 공장 밖에 나가서 주차하고 시동을 꺼 달라고 계속 요구했는데, 말로만 알겠다고 하고 공장 안에서 시동을 켜놓은 채 주차하는 일이 계속된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지게차 파트를 아웃소싱하면서 지게차 운전자들에 대한 관리 지침이 바뀐 겁니다.

▲지게차 아우어미터 [사진=삶이 보이는 창 100호]
회사 총무팀에서 지게차 운전자들의 업무량을 파악하기 위해 제출하라고 한 것이 아우어미터(hour meter) 타임이었습니다. 핸들 옆에 아우어미터가 있는데, 이건 하루 동안 얼마나 시동이 걸려 있었는지 표시하는 겁니다. 결국 시동을 끄지 않아야 일을 잘하는 것으로 평가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달이 난 겁니다. 총무팀에 이 문제를 알려주니 즉각 관리 지침을 바꾸겠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현장이 돌아가는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편의적 노무관리는 노동자들을 아주 피곤하게 만들고 환경을 엉망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일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회사의 생산 계획과 노무관리 방식의 변경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노동 공간의 환경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인해 최악으로 치닫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제 ‘촉’의 비결이 왜 ‘공간의 관계를 읽는 것’인지 아시겠지요? 노동자를 무시하는 회사에 들어가면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민주적이지 않고 공론장의 형성에 관심이 없는 노동조합을 만날 때도 긴장합니다. 조합원들이 불필요한 위험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장일수록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기본적인 안전장치도 없는 노동이 비정규직에게 강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동체적 관계가 파괴된 노동 공간에서는 생존이 개인의 몫이 되고, 마침내 슬픔도 개인의 몫이 됩니다.

저는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처음에 저는 공장과 공장 주변의 마을밖에 모르는 제가 감히 마을에 대한 얘기에 섞일 수 있겠냐고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얘기를 나눠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만난 노동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마을 공간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노동조합이 민주적 자치와 공론장의 활성화를 이뤄내면, 조합원의 발언권이 보장되면서 작업장의 위험을 드러내고 해결하는 힘이 생깁니다. 회사의 편의적 관리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노동자들이 갖게 되면 불필요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노동 공간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공공성, 자치, 공론의 장과 같은 마을을 설명하는 키워드들이 노동의 공간을 설명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앞으로 제가 만나온 노동 공간, 공장 주변의 마을 공간, 어린이들이 생활하는 학교와 어린이집 같은 공간에 대한 얘기를 해볼 생각입니다. 각각의 공간 환경이 왜 위험해졌는지를 공간 속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위험이 왜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위험이 왜 커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질문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