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의 유럽연합:EU 톺아보기] 이야기와 서사가 만든 공동체

유럽통합을 향한 기나긴 여정(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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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2 17:11 | 최종 업데이트 2017-04-12 17:19

EU: 연합 혹은 연방인가?

세계 최대의 경제공동체인 EU는 어떤 형태의 정치체제일까? EU의 실체에 대해서는 수많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먼저 리스본조약은 이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아래 조문은 EU의 실체를 규정하고 있는 유럽연합조약(Treaty on the European Union: TEU) 제1조 1항의 내용이다.

“본 조약에 의해 체약국*은 상호 간 유럽연합(이하 ‘연합’)을 창설하고, 회원국**은 자신의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권한을 양도한다.”

이 조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상당히 혁신적인 선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U는 체약국 상호 간 정치적 합의에 따라 채택된 조약에 의하여 창설되었으므로 회원국들은 그들이 창설한 EU에게 자발적으로 권한을 양도해야 한다.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하면 간단한 듯 보이지만, 국제현실에서 이 조문이 지닌 함의는 적지 않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아래 질문을 던져보자.

“근대주권국가가 성립한 이후 과연 어느 국가가 자발적으로 타국에 주권을 양도한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역사적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의 주권은 자발적으로 타국에게 양도되기보다는 제3국의 무력행사 때문에 제한되거나 침탈되곤 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그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 병탄으로 우리는 36년이란 세월 동안 식민지배라는 쓰라린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사정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주의를 앞세운 유럽열강들은 앞다투어 아프리카와 아시아 약소국들의 주권을 빼앗아 식민국가로 삼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유럽국가 서로 간에도 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20세기 초중반 짧은 시기에 연이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전쟁으로 인한 뼈아픈 참화를 겪어야 했다.

결국 오늘날 EU의 탄생은 유럽인 자신들은 물론 인류에게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 전쟁을 겪고 난 후 두 번 다시는 이러한 쓰라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반성의 산물이다. 그 다짐이 명문의 형태로 규정된 것이 바로 TEU 제1조 1항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TEU 제1조 1항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은 왜, 어떤 이유로 국가주권을 양도하면서까지 통합체인 EU를 창설하고자 했을까? 또 그들이 설립한 EU는 어떤 성질을 가진 실체일까? EU는 국제조직인가, 새로운 형태의 국가일까? ‘유럽연방’을 통한 ‘위대한 유럽의 건설’은 유럽인들의 오랜 꿈이자 이상이기도 했다. 지역통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이 어떤 꿈과 이상을 추구했으며, 또 도전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당면한 현실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왔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일반적으로 체약국이라 함은, 당해 조약이 효력을 발생하는가 여부를 떠나 그 조약의 구속을 받겠다는 동의를 표시한 국가를 말한다. 국제조약에서는 흔히 일반 당사국과 구별하는 차원에서 영문 대문자(the CONTRACTING PARTIES)로 표기한다. EEC설립조약부터 리스본조약에 이르기까지 EU는 영문대문자 the HIGH CONTRACTING PARTIES을 사용하여 체약국으로 표기한다. 파리조약과 로마조약을 채택하고, ECSC, EEC 및 Euratom 세 공동체를 설립한 6개국(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이 최초의 체약국이다.

**회원국(the Member States)은 파리조약과 로마조약에 가입함으로써 EC(EU)의 회원자격을 얻은 국가를 말한다. 또한 EU는 신규 가입하려는 국가들을 ‘가입후보국’(Candidate countries), ‘잠재후보국’(Potential candidates)으로, 그 외 국가들은 ‘기타 유럽국’(Other European countries)으로 부르고 있다.


EU: 꿈과 상상력, 그리고 이야기와 서사가 만든 공동체

유럽(Europe)의 어원(語源)은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페니키아 공주 ‘에우로페(Ευρωπη(그리스어), Europa(영어))에서 유래한다. 이 말을 음차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는 구라파(歐羅巴)와 구주(歐洲·欧州) 또는 요로빠(ヨーロッパ)로 쓴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구라파와 구주로 부르다가 지금은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유럽으로 쓰고 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유럽은 어느 지역을 말하는가? 과거에는 주로 자연지리를 기준으로 북극해, 대서양, 지중해 및 흑해의 물길이 맞닿는 지역을 유럽으로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역 경계를 정할 때 자연지리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를 포함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을 적용한다. 어떤 방법을 따르든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및 아시아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유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입장은 EU 가입에 필요한 지리적 요건을 정하고 있는 리스본조약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즉, 리스본조약은 ‘어느 유럽국가라도’(any European State) EU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TEU 제49조)고 규정하고 있을 뿐 회원국의 지리적 경계나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이 유럽의 지리적·문화적 경계 범위를 정하기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어떤 면에서 보든 유럽은 어떤 공통점이 있다.

먼저, 지리적인 면에서 유럽은 영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유럽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있는 서부유럽을 거쳐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등 중동부유럽까지 대륙으로 이어져 있다. 수십 개의 국가가 인접하여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니 사람과 물자 교류가 활발하여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면서도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다. 후술하겠지만, 이미 중세 때부터 여러 사상가는 유럽국가 간 전쟁을 종식하고, 연대와 협력을 통합 유럽통합과 연방 설립을 제안했다. 그 제안들이 현실적으로 수용되었다면 제1·2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적인 전쟁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참화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유럽통합에 관한 정치적 논의와 합의가 구체화됐다. 그 결과 ECSC·EEC·Euratom의 세 공동체로 이뤄진 EC가 탄생하였다.

다음은, 문화적인 측면으로 유럽 혹은 유럽인의 동질성을 형성하는 두 가지 요소인 기독교와 그리스-로마 신화를 들고 싶다.

▲프랑스 아비뇽 대성당. [사진=expedia.fi]
유럽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단일 혹은 공통의 관념과 정서적 공감대를 유지하고 있다. 종교혁명과 자아를 중시하는 근대철학의 성립으로 오늘날 명시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국가는 거의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럽사회는 물론 유럽인의 사고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겉으로는 좀체 기독교를 내세우지 않는다. 또한 프랑스의 ‘라이시테’처럼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분리돼 있다. 문제는 현실이다. 터키의 EU가입이나 유럽 내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 차별의 사례에서 보듯이 어떤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기독교라는 종교적 동일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판단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기독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유럽사회와 유럽인을 잇는 굳건한 정신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 Greek Mythology Morpheus Fresco Mural Charon. [사진=maxpixel.freegreatpicture.com]
또한 유럽은 그리스신화라는 같은 이야기를 통해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허구의 세계다. 하지만 제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가공의 신을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유럽의 철학과 문화예술을 발전시킨 원천이었다. 비단 그리스신화뿐 아니라 지역마다 나름의 독특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 신화들이 서로 섞이고 융합돼 도시와 국가가 확대됨에 따라 또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최근 J.K. 롤링이 쓴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소설뿐 아니라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등의 소설도 모두 신화에서 받은 영감이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또 할아버지·할머니부터 손자·손녀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신화라는 ‘거대한 이야기 주머니’를 갖고 있다. 어쩌면 유럽이 EU라는 지역공동체를 결성할 수 있었던 동력도 신화라는 이야기를 통해 미래 세계를 꿈꾸고,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신화를 소재로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유럽인은 서로의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또 각자가 가지고 있는 평화에 대한 비전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유럽통합은 신화의 힘이자 이야기의 힘이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만나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유럽인은 대부분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점을 느꼈다. 어떤 주제와 대화에서도 그들은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나는 단적으로 그 힘은 바로 신화, 즉 이야기(스토리텔링)와 서사(네러티브)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다. 국가가 앞장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개인의 생각을 통제하려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게 바로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누구의 구속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상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

EU는 ‘다양성 속의 통합’을 모토로 삼고 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제아무리 이 모토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적용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단일국가체제도 수많은 갈등으로 좌충우돌하며 내홍을 겪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EU는 어떻게 개별 회원국의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28개 회원국을 단일한 체제 아래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을까? 그 비결은 무엇일까? 또한 유럽인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유럽통합을 꿈꾸고, 이를 실현할 수 있었을까? 그 역사적 연혁을 중심으로 유럽통합 과정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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