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촛불열전] (8) 소심한 최종희의 결심

"소심했던 내가 많이 컸다. 반백에 뵈는 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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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매주 월, 목요일 연재한다.]

해가 지면 성주군청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성주로를 따라 군청으로 향하는 길, 현수막이 집집마다 펄럭인다. 군청 입구부터 천막이 광장을 둘러쌌다. 화단에는 페트병으로 만든 평화 바라기 꽃이 피었다. 천막에는 촛불을 붙이는 사람, 물병을 통에 담아 차갑게 만드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새누리당 탈당계를 받는 사람, 주차된 차량을 치우고 은박매트를 줄줄이 까는 사람까지.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현관 왼쪽에는 흰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직장을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그들은 평화를사랑하는예술단이다. 이날 선보일 몸짓을 연습 중이다. 최종희(50) 씨도 이날 일을 마치고 군청으로 달려왔다. 성주 촛불 58일 차, 투쟁이 일상이 된 군민들의 하루.

군청으로 들어온 사람은 왼쪽 천막에서 촛불을 받고는 앞줄부터 채워 나간다. 오후 8시, 광장은 촛불로 넘실거린다. 스포트라이트가 현관을 비춘다. 촛불 든 군민들이 외친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구호 소리와 함께 평사단의 율동이 시작된다. 비가 내린다. 계속되는 율동,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어깨를 걸고 하나가 된다. 사드가 온다는 소식에 가슴 졸이던 최종희 씨. 집회장에서 율동 하는 이때만큼은 해방이다.

종희 씨가 처음부터 무대 앞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종희 씨는 남의 말에 토 달지 못하고 뒤돌아서 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종희 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가장 왼쪽이 최종희 씨

강원도에서 태어나 대구 섬유공장으로
월급 도둑으로 몰려도 말 한마디 못했다
신발가게 앞에서 만난 남편
어렵사리 결혼해 성주로

최종희 씨는 강원도 평창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 혼자 사남매를 키웠다.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품을 팔면서도 사남매를 금지옥엽처럼 길렀다. 그 덕에 종희 씨는 중학교까지 갈 수 있었다. 그 시절 없는 집 맏딸로서는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학교를 다녀오면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도맡았다. 동생들을 보살피며, 도랑에서 옷을 빨고, 도시락을 쌌다. 장갑도 없이 겨울 도랑에서 빨래하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시리다. 그 시절 중학교라도 보내는 집안은 사정이 좋은 탓이었는지, 친구들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아궁이 불 땔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와 종희 씨는 새벽마다 밖을 돌며 땔감을 구했다. 어린 종희 씨는 소나무 갈비를 주워 포대에 담았다. 포대를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이면 놀다가 내려오는 친구들이 보였다. 자신의 지저분한 모습이 부끄러웠고 싫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못 주는 사랑만큼을 더 줬다. 강릉 잘 사는 집 막내딸로 곱게 자란 어머니는 스물여섯에 대관령 너머로 시집왔다. 아버지 형편이 녹록지 않은데다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커다란 짐을 떠안았지만, 어머니는 그마저도 이겨냈다. 어머니는 종희 씨에게 자주 말했다. 나는 돈은 많지만 건조한 집에서 살았어. 너는 없이 살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구 성서 동국단지(달서구 신당동, 70년도 중반 섬유업체가 자생적으로 모여 생긴 단지)의 작은 섬유공장으로 취직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연경(날실의 끝과 시작을 서로 잇는 작업) 일을 여러 공장에 돌아가며 했기 때문이다. 연경 작업 특성상 피치 못하게 작은 체구를 써먹게 됐다. 공장 언니들이 실 끄트머리를 비벼서 주면 기계 사이로 들어가 실을 연결했다. 버는 돈은 회색 투피스 작업복을 사는 데 썼다. 이 공장, 저 공장 돌아다니는 모습이 꼭 어머니가 품팔이하는 듯했다. 끈덕지게 7년을 일했다.

종희 씨의 소심한 성격이 드러나는 사건이 있다. 어느 공장에서 종희 씨가 월급 도둑으로 몰린 것이다. 한 언니가 월급봉투를 도둑맞았다고 소란을 피웠는데, 여러 언니들이 이야기하더니 종희 씨를 도둑으로 지목했다. 자기는 가져가지 않았다고 항변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옥상에서 혼자 울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몇 명 있기는 했다. 그중 하나는 같은 기숙사를 쓰는 여자인데 성격이 괄괄했다. 그 친구가 어깨동무하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게 싫었지만, 종희 씨는 그럴 때마다 입술만 쭉 빼고 싫단 말은 못했다. 친구가 시집가고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싫단 말을 못했다.

그 친구가 떠나고 나서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좀 더 어울려 놀았다. 전기 공급이 시원찮았던 시절, 일에 몰두하다가도 전기가 나가면 그 날은 공장이 멈추는 날이었다. 그러면 친구들과 모여 가창 농원으로, 달성공원으로 놀러 다녔다. 가장 자주 갔던 곳은 신발가게를 하는 친구 집이다. 별다른 놀 거리는 없지만, 평상이 있었고, 그 평상에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다. 공단에는 남자들도 많았다. 종희 씨는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친구들은 남자들과도 제법 잘 어울려 놀았다. 혹독한 주야 맞교대 근무 틈틈이 만나기 때문인지 더욱 달착지근했다. 동갑내기 이재승 씨도 그때 알았다. 어머니로부터 남자 조심하라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안도록 들은 터라, 종희 씨는 이재승 씨를 봐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었다.

재승 씨는 종희 씨더러 자주 보자고 했다. 소심한 종희 씨는 ‘그래야 하는가 보다’ 하며 오라는 곳으로 나갔다. 한 날은 자주 가는 평상에서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두어 번 따로 만나고 마음이 열릴 무렵이다. 그런데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봤다. 남자를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보니 더럭 겁이 난 종희 씨는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그날 밤, 공장 친구는 재승 씨가 아직 비를 맞으며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종희 씨는 갈등했다. 마음은 좋은 것 같은데, 어머니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우선 그 날은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도 계속 만나게 됐다.

어머니의 반대는 완강했다. 어머니 반대를 이기지 못해 결국 재승 씨와 이별했다. 슬픔이 가시지 않은 어느 날, 공장 친구가 비보를 전했다. 재승 씨가 다쳐서 다 죽어간다는 얘기였다. 종희 씨는 마지막 얼굴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병원에 갔다.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던 재승 씨는 종희 씨를 바라봤다. 죽을병은 아니었지만, 손가락 몇 개가 없어졌다. 그 길로 다시 만났다. 친구가 왜 다 죽어간다고 이야기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다시 만났고, 결국 결혼 이야기까지 나왔다. 어머니는 계속 반대했다. 손을 다친 것도 더욱 흠이 됐다. 23살,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강원도까지 올라갔지만, 어머니는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릴 적 어려운 집안 사정이 종희 씨에 대한 부채감으로 남은 어머니는 시집만큼은 욕심껏 보내고 싶었다. 재승 씨는 강원도에 여러 차례 올라가 사정했다. 어머니도 결국 울면서 결혼을 허락했다.

시댁 살림은 괜찮았다. 어머니가 결혼을 허락한 데에는 그 점도 영향을 끼쳤다. 바깥에 살며 자주 몸이 아팠던 종희 씨를 두고 볼 수 없던 재승 씨는 결혼 전 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재승 씨는 어릴 적부터 집안에 썩 정을 주지 않았지만, 시부모님은 종희 씨를 딸만큼 예뻐했다. 종희 씨가 낳은 아이는 집안 첫째 손주가 됐다. 몸만 달랑 온 종희 씨는 시댁 사랑을 듬뿍 받았다. 결혼은 반고개 황제 예식장에서 했다. 어머니는 친척들을 데리고 45인승 버스를 타고 왔다. 식장에는 사촌 큰오빠 손을 잡고 들어갔다. 경삿날, 비디오에 찍힌 어머니는 예식 내내 울었다.

시댁 생활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시아버지가 종희 씨를 애지중지 아끼긴 했지만, 시어머니와 크고 작은 갈등이 생겼다. 시어머니는 이재승 씨가 늦게 들어온다거나 사업이 잘 안 되거나 하는 이야기를 종희 씨 어머니에게 시시콜콜 전했다. 갈등이 깊어졌다. 하루는 종교 문제로 갈등이 터졌다. 교회를 다녔던 시어머니는 절로 향한 길로 다니는 것조차 싫어했다. 시어머니는 종희 씨에게 절에 갔다 왔느냐며 추궁했고, 종희 씨는 항변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속앓이를 참기 어려울 지경이 돼, 분가를 마음먹었다.

그 와중에 재승 씨가 친형과 함께 시작한 자동차 부품공장도 썩 잘 되진 않았다. 종희 씨도 일을 놓지는 못했다. 커튼 공장, 미싱 공장, 자동차 부품공장을 돌며 무슨 일이든 했다. IMF사태가 터지며 이재승 씨는 사업을 접었다. 식당, 슈퍼, 운동기구 판매점까지 했는데 신통한 게 없었다. 마지막으로 굴착기 운전을 배웠다. 분가할 곳을 알아봤지만, 대구는 어려웠다. 성주가 생각났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이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서 물을 떠다 먹으며 눈여겨봐 둔 터였다. 종희 씨 눈에는 다른 동네보다도 유독 성주가 마음에 끌렸다. 성주는 강원도 고향 같은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2005년 추석을 쇠고 연고 없는 성주로 들어왔다. ‘말지’라는 이름의 동네, 사람들이 좋았다. 도시 사람을 경계할 법도 했는데, 종희 씨 가족에게 살갑게 대했다. 어머니는 성주로도 사정을 살피러 내려왔다. 동네 어른들은 어머니와 또래였다. 어머니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더욱 애착을 주는 듯했다. 타향 생활로 고생할 그들 자식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은 종희 씨 집에 자주 음식을 가져다줬다. 종희 씨는 차로 동네 어른들 교통 편의를 봐 드리며, 수월하게 정착했다. 종희 씨는 간병사로, 요양보호사로 일했다. 그러다 어깨에 탈이 나는 바람에 일을 그만뒀다. 쉬는 와중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연락이 닿아 승차 도우미로 취직했다. 재승 씨도 굴착기 운전에 소질을 보이며 다시 집안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성주로 오면서도 종희 씨는 바닷가에 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웃과 성주 생활에 적응하면서 성주 정착을 마음먹었다.

성주 적응 다 했는데 사드 배치 발표되다
투쟁 나서며 시작한 평사단 활동
남편 이재승 씨도 투쟁에 나서다

성주에서는 여러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해금 동호회나 성주도서관에서 운영하는 기타반에도 나갔다. 종희 씨 삶에서 무엇인가에 적극적으로 나선 일은 많지 않았다. 7월 12일 화요일 저녁, 기타를 들고 도서관 마당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급작스러운 소식이 들렸다. 방송에서 사드라는 말이 들렸다. 사드가 어디로 배치될 수 있다는 자못 심각한 어조의 방송이 나오자 종희 씨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렸다. 기타반엔 가지 않고 그 길로 집으로 왔다.

사드가 무엇인지 정확히 가늠은 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정치나 시사에 관심이 없었던 종희 씨는 재승 씨에게 설명을 듣는 정도였다. 재승 씨는 어릴 적 형이 데모하러 다니던 학생인지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뉴스를 보며 욕하는 재승 씨가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사드는 달랐다. 미군이 떠올랐고,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순이, 미선이 생각이 났다. 곧이어 딸 생각이 났다. 사드 사태로 종희 씨는 정치와 시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훗날 뉴스를 보며 욕하는 재승 씨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사드 반대 집회에 초장부터 열심히 나갔다. 평사단을 알고부터는 더욱 빠질 수 없었다. 봉사 활동을 하다 만난 사람을 통해 평사단을 알았다. 여러 자원봉사 활동을 나섰을 때였다. 자원봉사 500시간을 채워 군수로부터 직접 상장을 받기도 했다. 투쟁이 길어지며, 8월 22일 군수가 사드 제3부지 검토를 요청했다. 그 이후 한 마음이던 성주군민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잘 알고 지낼만한 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 나가면 안 될까’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종희 씨는 간다 안 간다 말도 없이 ‘그래요?’라고 되물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집회에 계속 나왔다.

7월, 친구 손에 이끌려 벽진면에 있는 별고을광대 연습실로 갔다. 거기에는 별고을광대 단원들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율동을 어느 정도 맞춰 본 상황이다. 그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종희 씨는 괜히 따라가지 못할까 봐 부담됐다. 하지만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는 설명에 그만 발을 들였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집회 시간은 오후 8시, 별고을광대 연습실로 평사단 단원들이 일을 마치자마자 몰려들었다. 정신없이 연습하다 보면 시간이 훅훅 지나갔다. 집회 시간이 30분 당겨지면서 바로 군청으로 향했다. 그때부터 군청 한쪽에서 율동을 연습했다.

스스로 배운 것도 없고, 생각 없이 산다고 여기며 몸을 빼던 종희 씨는, 날이 거듭하며 적응을 잘했다. 처음 무대에 서는 떨림이 오래 남아 있는데도, 어느새 되돌아보면 무대에서 동작을 틀리고도 뻔뻔하게 율동을 마치게 됐다. 거울을 봐도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염색을 자주 하게 된 이유도 있다. 평사단 카톡방에 종희 씨는 가끔 이런 글을 올린다.

“내 나이 50에 그대들을 만나 이런 것도 해보고. 나를 데리고 다녀 줘서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종희 씨 만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 심심해하던 재승 씨에게도 변화가 왔다. 자원봉사 모임으로, 해금 모임으로 자주 나가는 종희 씨가 못마땅했다. 그러다 군청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한두 번 나가다 보니 재승 씨는 술 마시며 친구를 사귀었다. 심지어는 낮에도 나가 술을 마셨다. 굴착기 일이 없을 때는 종일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시고 힘든 날에도 누구라도 부르면 술 마시러 나갔다. 오히려 종희 씨가 말릴 지경이 됐다. 그러다가도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날개 단 듯 기뻐 보이는 재승 씨를 보며 종희 씨는 웃음 지었다. ‘내가 옛날에 못한 게 있으니 놔둔다’

급기야 재승 씨는 집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10월 6일 이재승 씨는 말했다.

“제 아내는 평사단 멤버입니다. 저는 지난 7월 갑자기 군청 촛불, 뜻하지 않게 연예인 생활을 시작한 아내 매니저입니다. 제 아내는 평사단 멤버입니다. 갱년기 갈등이 심해서 쉽게 반대도 못 하고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촛불이 켜질 때마다 갈수록 아이돌 그룹이 돼 가고 있습니다. 갈수록 아내 몸짓이나 의상, 스케쥴에 신경이 쓰이게 된 건 왜일까요. 보석 같은 평사단 멤버, 제 아내만이라도 전폭 지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말고도 남편 매니저들 몇몇 더 있습니다. 박수 드립니다. 지금 비록 우리 힘이 부족해도 언젠가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독재자가 무슨 탄압을 하는지 모르는 시절이 아니라, sns 등 소통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앞서 투쟁하고 피를 흘려 만든 밭에 민주주의 씨앗이 이미 자라 있기 때문입니다. 같이 투쟁하겠습니다. 아내와 가족과 이웃과 화합하고 단결해서 가겠습니다”

▲처음으로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재승 씨

이날은 최종희 씨와 이재승 씨의 결혼기념일이다.

굴곡 딛고 함께 투쟁
사드 물리칠 날 꿈꾸며 끝까지 싸운다

투쟁에 나선 종희 씨 마음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9월 11일, 성주군수의 군청 마당 사용 불허로 거리 집회가 시작됐다. 12일, 군의원 위주로 꾸려졌던 1기 투쟁위가 해산됐다. 11일부터 15일 동안 성주군청 입구에서, 혹은 성주문화원 앞 인도에서 집회가 열렸다. 26일, 성주군민들은 군청 마당으로 복귀해 집회를 열었다. 당시 투쟁위는 국방부가 제3부지를 발표하면 집회 장소를 이전한다는 조건으로 군청과 합의했다. 이 합의를 두고 9월 26일 집회에서는 투쟁위 합의가 옳은 것인지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투쟁위는 부족하지만, 양보를 통해 사드 투쟁을 오래 끌어가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일부 군민들은 군수의 사과 없는 합의에 반발했다. 종희 씨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복귀하는 건 아니라며 소리쳤다. 군청 마당에는 이미 플라스틱 의자마저 깔려있었고, 그걸 보니 더욱 ‘계획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이 진행될수록 빗줄기도 굵어졌다. 당시 오랜 토론 끝에 투쟁위를 믿기로 의견이 모였다. 군수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마음에 꼭 들지 않아도 우선 따라가자는 이들도 있었다.

종희 씨도 투쟁위를 믿기로 했다. 일이 마음 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고, 앞장서지 않는 입장에서 따라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날짜가 지나며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춤추고, 노래 부르고, 풍물도 하고. 투쟁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어색했는데, 어느새 투쟁을 즐기게 된 모습을 발견했다. 좀 더 앞을 내다보고 담담히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최종희 씨는 힘에 부쳐 쓰러지지 않을 만큼 조율하는 법도 배웠다. 알 수 있는 만큼만 생각하고, 그만큼만 걱정하자고. 화내지 말고 꾸준히 하자고. 그렇게 사드가 물러날 때까지 투쟁하자고. 무리 속에 있으며 벗어나지 말자고. 그러면서 다른 율동을 연습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생각했다.

종희 씨는 또 하나 결심했다. 학교에서 집회 참여를 제지하면 일을 그만두기로. ‘정말로 그래야겠습니까’ 하고 물어보긴 하겠지만, 미련 없이 ‘알겠습니다’ 하겠다고. 어떤 일에 앞장서지는 않지만, 스스로 일을 결정할 강단은 생겼다. 싸우기 싫어서 손해 봐도 도망갔던 종희 씨였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말 듣고 재승 씨와 헤어졌던 모습, 신랑 말 대로만 따르던 모습, 처음 팔뚝질을 하며, 농민가를 부르며 어색했던 모습이 많이도 바뀐 듯했다.

“나도 성주 사람도 많이 바뀌었다. 많이 용감해졌다. 한 번씩 욱할 때면 길가에 드러누울 생각 까지 해봤다. 소심한 내가 많이 컸네. 나이 반백에 뵈는 게 없는 것 같네”

종희 씨는 사드를 물리치고 다 같이 잔치를 한바탕 하는 날을 꿈꾸며, 그리고 앞으로 종희 씨가 겪는 일과 같은 힘든 상황에 빠지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평화나비광장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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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일 촛불 군민 앞에서 종희 씨에게 낭송해 숫한 여성들의 부러움을 샀던 이재승 씨의 시를 싣는다.

중학생 딸아이의 노트에 적어본 시(時)
-성주 대가면에 사는 시인 이재승

중학교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시를 써서…
3학년 즈음 또 시를 썼다.
학생 주임 선생에게 불려 교무실로 갔다.
“너 이 새끼 사상계 읽었지”
그 날로 나는 시를 쓰지 않았다. “그 선생이 미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 즈음 대학 다니던 형님이 붙들려갔다.
주먹 쥐고 하늘 찌르다가
아버지는 교도소 면회를 가셨다.
그 때 일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한다.
“전두환이 미웠다.”
나는 책을 덮고 담배를 배웠다.

혹시나 해서 대학을 갔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와 노동현장을 방황하는
형님을 대신해 집안일을 선택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한학기만에 벗어던졌다.

영장이 나왔다. 50사단 방위병
누구를 위한 군대인지 18개월 내내
충정훈련만 하다 끝났다.
노태우가 미웠다.

공장을 갔다.
2년도 채 안되어 손가락을 잃었다.
자동차 만드는데 사람 손가락이 많이 필요하단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세상이 미웠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용기를 냈다.
딱 한번 내 50인생의 가장 빛나는 도둑질을 했다.

장사를 시작했다.
세상이야 제멋대로 가던 말던
내 길을 가야했다.
독불장군! 거침이 없는 길을 갔다.
십여년 후 듣도 보도 못한 것이 왔다! IMF!!
끝내 멈추어야 했다.
김영삼이가 죽도록 미웠다.

서른중반!
내가 찍은 대통령이 두 번이나 되었다.
나라는 그렇게 잘 돌아갈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3년여의 방황과 수양생활 끝에
다시 일어냐야 했고 중장비 학원을 나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성주로 왔다.
하루하루 어려웠지만 가정과 행복을 얻었다.

사드가 온단다. 군공항이 온단다.
그나마 10여년 만들어온 내 작은 행복을 앗아가려한다.
잘 돌아갈 줄 알았던 바뀐세상이
분열과 나태 끝에 이명박을 만들더니
끝내는 박근혜를 낳았다.
밉다. 마이 밉다. 아프다. 마이 아프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물러서지 않는다.
도망가지 않는다. 아니, 갈 곳도 없다.
싸울란다, 끝가지.

지난해 마지막 날 광화문 촛불
서울 형님네와 우리 가족이 만났다.
다 같이 주먹 쥐고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목놓아 구호를 외쳤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30년 넘은 감회와 감격이 목 넘어와
눈시울을 붉힌다.
이제 이불 쓰고 고함지르지 않는다.
당당하게 손잡고 목놓아 외치리라.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은 물러가라”고.

또한 광장의 여러분에게도 외쳐 본다.
박근혜, 개누리 찍은 손 자르지 마시라.
손가락 자르면 인생이 아프다.
그 손가락으로 자판 잘 누르고, 표 잘 찍으면
혁명을 이루고 나라가 행복해진다.
그 손가락으로 동지의 손 맞잡으면
죽 쒀서 개 안 주는 행복한 내일이 올 거라고.

나는 이제 다시 시를 써 본다.
중학생이 절필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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