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엄니열전] (3) “사드와 싸우다가 멍든 가슴” ‘사’ 자만 들어도 눈물이 나요 /초희

“멀미로 버스도 안 타던 내가 서울을 두 번이나 댕겨왔다” 박규란(6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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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은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사투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선에서 선 소성리 엄니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이 시대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다정> 회원들이 쓴 글을 부정기적으로 <뉴스민>에 연재합니다.]

“멀미로 버스도 안 타던 내가 서울을 두 번이나 댕겨왔다” 박규란(67세)

초희(다정 글쓰기 모임, <다정> 회원)

달마산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무릎이 덜덜 떨리고, 이빨도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느껴진다. 춘삼월 벚꽃이 만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건만, 소성리는 아직도 겨울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수요일 밤을 맞는다. 매일 밝혀왔던 성주촛불이 수요일이면 소성리에도 켜진다. 평화나비광장과 소성리에서 동시에 촛불문화제를 열게 됐다. 사람들이 소성리 마을회관 앞마당에 무대를 만든다고 며칠 동안 바닥을 짜고 용접을 했다. 비닐로 지붕을 덮었다. 멋진 공연장이 탄생했다. 마당 왼편 정자는 음향실로 꾸몄다. 수요 촛불문화제 사회는 이장님 차지다.

소성리 엄니들은 밤마다 열창 중이다. ‘소양강처녀’를 ‘소성리어매’로 가사를 바꿔 부른다. 엄니들 합창 소리는 시골마을 적막을 깨뜨린다. 규란 엄니는 아랫니가 모두 빠져서 음식을 씹지 못한다. 참외는 숟가락을 긁어서 먹어야 한다. 임플란트하려고 기다리는 중이다. 이웃 엄니들이 “용각댁, 노래 잘한다!”며 앞장세우려고 하지만, 규란 엄니는 이 때문에 발음이 샌다며 뒤로 빼신다. 그래도 노래 가사는 유심히 쳐다보신다. 노래를 부르다가도 “사드와 싸우다가 멍든 가슴에” 이 구절만 나오면,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거린다. 사드가 소성리로 온다는 그날부터 사드의 ‘사’자만 나오면 눈물부터 나온단다.

▲4월 8일 불법 사드 원천 무효 범국민평화행동 집회에서.

간절한 기도 “롯데야 버텨라!”

2017년 정유년 새해, 롯데가 금방이라도 부지를 내줄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1월 2일 예정됐던 이사회에서 부지 교환을 미뤘다는 소식을 듣고 엄니는 희망이 생겼다. ‘성주투쟁위’가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앞에 피케팅을 하러 올라갈 때, 소성리 엄니들도 따라 올라갔다. 규란 엄니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멀미 때문에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지난번 서울 광화문 촛불에 단짝 임순분 부녀회장이 연설한다기에 응원해주려고 큰 용기를 내서 서울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멀미약을 먹고 잠에 취해서 겨우 다녀왔다. 다음날 종일 몸져누워있었다.

‘롯데야, 제발 버텨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롯데만 사드 부지를 내주지 않으면, 사드는 못 올 테니까, 욕하는 것보다는 응원해줘야, 롯데가 우리 마을 사람들 마음 알아줄 것 같았다. 그러나 롯데는 끝내 사드 부지를 교환하겠다고 했다. 롯데는 소성리 마을 사람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언론에서 사드 부지 교환이 결정 났다며 떠들어대기 무섭게, 마을로 경찰버스가 끝도 없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쟁이 나는 줄 알았다. 경찰만 들어온 건 아니었다. 소성리로 연대자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드를 막으려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성주읍 사람들은 촛불을 마치면 늦은 시각이라도 소성리로 올라왔다. 초전 사람들은 사드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 마을 길목을 지키고 섰다. 마을회관 부엌은 임순분 회장과 규란 엄니, 금연 엄니 차지가 됐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만큼 매일 밥을 해대야 했다. 할매들뿐만 아니라 연대자들까지 60명, 많을 때는 100여 명 입에 들어갈 밥을 해대려니, 반찬과 국 끓이는 일도 만만치 않다. 밤늦은 시각, 부엌은 다시국물 끓이고, 나물 다듬어 무치고, 반찬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부녀회원들이 다 도와주지만 단짝인 규란 엄니에게 부녀회장은 더 특별한 친구이다. 임순분 부녀회장은 그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섰다. 그림자처럼 붙어서 일을 거든다.

밤잠을 설치며 연대자들 식사를 준비하는 규란 엄니께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손사래를 치신다. “안 힘들어, 해야지! 와 준 것만도 고마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거 이거밖에 없어.”

▲규란 엄니. [사진=초희]
“성주에 사드가 온다고 했을 때, 처음엔 사드가 뭔지도 몰랐어. 이장이랑 임 회장이 성주읍으로 자꾸 나갔다 오더라고. 사드 온다카고 3주나 지나서 처음으로 이장을 따라서 성주읍에 촛불 하는데 가봤지. 가서, 누가 마이크 잡고 연설하는 거 보고는 아, 이게 문제가 있구나 싶더라고. 집에 와서 정아 아버지한테 사드 반대하러 나가보자고 했어. 다음날부터 저녁 먹고는 성주에 나가보기 시작했어. 그런데 캄캄한 밤에 눈도 어두운데, 트럭 타고 오는 길에 정아 아버지가 자꾸 중앙선을 넘어가는 거야. 앞이 잘 안 보이니까 위험해서 안 되겠다 싶었어. 정아 아버지는 있으라 카고 다른 사람 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다녔지. 요즘은 촛불 못 나가. 마을회관에서 할 일이 많아서 그래.”

나의 택호는 용각댁

소성리 깊은 밤, 마을회관 부엌을 차지한 여인들이 드러누워 구불구불 이리저리 뒹군다. 규란 엄니 택호는 ‘용각댁’이다. 월항면 용각에서 시집왔다고 용각댁이라고 불린다.

“나 태어나고 자란 곳이 성주야. 멀미가 나서 멀리 시집도 못 갔어. 우리 집 양반 시누이가 한동네에서 살았지. 시누이가 나를 좋아했어. 이웃집에서 비단홀치기를 했어. 성주에 비단 총판이 두 곳이나 있었거든. 일본 기모노 만드는 비단을 짜는 거야. 일본으로 수출했거든. 한 필 두 필 짜서 보내주면 돈을 받았지. 총판은 수수료 떼먹는 데고, 우리는 ‘돈내기(일정한 양의 일에 따라 품삯을 미리 정하고 하는 것)’로 일했지. 우리 동생들도 하고 동네 할매, 아지매들도 다 했어. 농사일도 하면서 비단홀치기를 했는데, 그거해서 애들 학비며 필요한 걸 살 수 있을 만큼 유일한 돈벌이였지. 아버지는 곡선(곡물)장사였어. 길다란 자전차를 타고 왜관까지 다니면서 장사를 하셨어. 농사는 전혀 못 짓는 양반이었지.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넘 부러울 거 없이 자랐대.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살림이 기울기 시작한 거야. 집을 지으려고 동네 ‘만대이(꼭대기)’에 구르마(수레)로 나무를 집 두 채 지을 만큼 해놓으셨어. 그런데 결국엔 나무를 팔고 평생 집을 못 짓고 돌아가셨어. 위에 언니가 둘이 있고, 오빠 있고 내가 네 번째 딸이야. 옛날에는 무식하게 아들 낳으려고 자꾸 낳았어. 우리 집이 딸이 많아. 오빠는 외동아들이라서 오냐 오냐, 하면서 컸더니 지밖에 몰라.”

규란 엄니는 1950년, 6.25전쟁 터지고 열흘도 안 된 7월 3일 태어났다.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낳자마자 디딜방아에 발을 다치고도 피난을 떠나야 했다. 사촌 오라비가 난리통에 애를 어찌 데리고 가냐며, 버리고 가라고 성화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눈이 새까만 아기를 차마 버릴 수 없어, 산후조리도 못한 채 아기를 업고 피난을 떠났다. 피난이라고 해봐야 바로 옆 동네인 장산으로 구르마에 먹을 거 싣고 갔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되었을 때, 사촌 오라비는 규란 엄니만 보면 “그때 저걸 버리고 갔어야 했는데 못 버렸다”고 놀려댔다. 그 말이 어린 마음에는 늘 상처였다.

“선, 우리 집에서 선을 봤어. 이웃집에 모여서 홀치기를 하는데 어머니가 야야, 오늘은 점심 먹으러 일찍 오너라, 그러셨지. 안 해, 나 시집 안 갈 거야, 하며 어머니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지. 그래도 속으로는 걱정이 되더라고. 12시가 되면, 초전서 월항으로 내려가는 버스가 있어. 12시 되어서 사과밭에 나가서 봤지. 오나 안 오나 싶어서. 신랑감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아니야. 나는 그때까지도 어리석어서 시집 같은 거 안 간다고 했어. 그런데 버스에서 젊은 남자가 안 내리는 거야. 안 오더라고. 좋다고 미나리꽝을 지나서 집으로 달려갔지. 오빠가 오늘은 점심 먹고 비단 하러 가지 마, 하더라고, 그러기나 말기나 후딱 밥 먹고 비단홀치기 하러 쫓아갔지. 그러다가 잠시 후에 어머니가 홀치기 작업하는 이웃집에 사과를 몇 개 얻어 오셨어. 어머니가 나더러 집으로 오라고 하시는 거야. 나는 또 안 간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지. 내 성질이 걸걸해서 어머니한테 그래. 어머니가 망할 년이 에맨깨이 맨크롬 고함은 와 지르노, 하시대. 아직도 그 목소리 기억나, ‘애맨깨이맨크롬’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버럭거리면 어머니는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 바람에 같이 비단홀치기 하는 친구들이 내가 선보는 걸 다 알아버렸어. 눈치도 없는 것들이 나보고 집에 가라고 성화를 부리는 거야”

또 조금 있으니까 오빠가 규란 엄니를 데리러 왔다. 홀치기 작업을 같이하던 친구들이 등을 떠밀어댔다. 어쩔 수 없이 오빠를 따라 집으로 갔다.

“오빠가 나더러 부엌에 들어앉아 있으라고 해. 문틈으로 보니까 오빠가 오고, 시누이 남편이 들어오고, 그 뒤에 따라오는 데 얼굴이 빨가이해서 들어 오대. 어머니가 과일이랑 뭔가를 챙겨서 들어가더니 날 더러 들어오라고 해. 들어가니까 다 나가고 둘만 남았어”

그렇게 선이란 걸 봤다. 그날 만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선본 남자는 규란 엄니보다 더 수줍어하며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게 잠시 마주하고 그 남자는 일어서더니 나가버렸다. 그날 밤에.

“우리 집 양반이 선보고 가서는 누부한테 내가 맘에 안 찬다고 막차 타고 올라가 버렸어.”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시집갈 마음이 전혀 없었던 터라 별로 마음에 작은 감흥도 없었다.

“우리 시아버님이 반 목수라, 시아버님과 우리 아버지가 둘 다 술을 좋아하시다보니 두 분이 친구가 되었어. 시누이랑 우리 집이 이웃지간에 형님아우하면서 엄청 가깝게 지냈거든. 시누이 남편이 뻑 하면 나더러 처남댁하자고 농을 걸었지.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으러 가는 길었어. 그날따라 시아버님이 시누집에 왔다가 돌아가시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어. 시누남편이 나한테 농을 걸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그냥 내 갈 길을 갔어. 그때 아버님이 나를 잘 봐주셨나 봐. 집으로 가셔서 둘째 아들한테 결혼하라고 했대. 그렇게 선 한 번 보고 결혼했어. 나는 시집 안 간다고 했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시집가라고 성화를 부려서 그렇게 시집갔어. 그렇게 소성리로 온 거지. 선 한 번 보고 온 거야. 하하”

▲소성리 마을을 배경으로 선 규란 엄니.

소성리는 내 삶의 전부

“시집을 왔는데 집이 없어. 남의 집에서 넉 달을 세 들어 살았는데 집을 빼 달래. 옛날 돈 3만5천 원으로 다 찌그러져 가는 집을 샀지. 시아버님이 방앗간을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정아 아버지는 큰집이 잘 살아야 한다면서 큰형님께 다 드리고, 자신은 골짜기 밭 두마지기 받았어. 정아 아버지는 농사는 못 짓는데, 동네에서 노가다하면서 농사를 겨우 지었어. 도시 나가자고 하는 걸 내가 안 나갔어. 어리석어서 성주 땅을 못 벗어났지. 멀미 때문에 멀리 나가지도 못했어. 그렇게 소성리에 스물세 살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았어. 정아 아버지가 부아가 나면, 그때 못 떠나게 했다고 나를 한 번씩 원망해.”

규란 엄니의 멀미가 얼마나 심했냐면, 처녀 때 대구로 일하러 갔을 때 이야기다. 비단 짜는, 가내 수공업 하는 집이었단다. 엄니는 한 달만 있다가 돌아왔다. 가슴이 답답해서 못 있겠더란다. 그것보다 공장으로 갈 때도, 집으로 올 때도, 버스를 타면 멀미가 나서 못 다니겠더란다. 집에 돌아오면 다 토했다. 사드 때문에 서울을 두 번 정도 다녀왔는데 죽을 뻔했다. 지금도 서울 다녀오면 사나흘은 퍼져서 아무것도 못할 지경이다.

결혼할 때, 금 서 돈 짜리 반지가 패물이었다. 설에 친정 갈 때 한번 껴봤다. 정아 아버지가 염소새끼를 산다고 반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규란 엄니는 안 줄라고 기를 쓰고, 정아 아버지는 내놓으라고 하고, 그렇게 새끼염소 두 마리를 먹였다. 염소 키워서 새끼치고 팔아서 소를 샀다. 소는 세 마리까지 키웠다. 소 팔아 밭을 사면서 살림을 조금씩 늘렸다. 수박농사 한 20년 짓고, 참외농사도 5년 지었다. 참외가 돈이 된다고. 이젠 늙고 힘들어서 다 그만뒀다. 밭에는 감나무 심어놓고 감자 조금 심어 놨다.

임순분 회장과는 둘도 없는 친구다. 남편들이 소성리에서 나고 자란 불알친구들이었다. 그 부인네들이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됐다. 부인네들이 모여서 ‘8부녀회’를 만들었다. 남의 집에 품 팔러 다녔다. 아침 6시부터 저녁 5시까지 논에 모 심으러 가면,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내일은 일 못한다 해놓고도, 돈 나눠서 헤아리다 보면 마음이 바뀐다. 그다음 날도 품 팔러 같이 나다닌다. 그렇게 돈 모으는 재미로 남의 집 일해가면서 땅도 조금씩 늘려갔다. 8부녀가 젊고 활기차고 힘도 좋다 보니까, 동네 대소사도 뚝딱 다 치렀다.

그때 보건소 소장님이랑 마음이 잘 맞아서 작당한 것도 많았다. 임 회장이 아주 똑 부러졌던 사람이다. 덕분에 여성농민회도 가입했다. 가입만 했지, 활동한 건 없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자꾸 젊은 8부녀회를 야당이라고 손가락질하고 편을 갈라놓으려 했다. 젊은 부녀들이 활발하게 일을 벌여나가니까 이상한 소문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임 회장은 마을에만 있지 않고 여성농민회 활동도 왕성하게 했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 모임이 잘 굴러가지는 않았다. 규란 엄니는 멀미 때문에 아무 데도 못 가는 형편이었다. 아들 대학 졸업식 때 사진에는 딸들과 정아 아버지는 있는데, 규란 엄니 얼굴은 없다.

처음 소성리로 시집왔을 때 앞뒤로 꽉 막힌 저 산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정아 아버지는 참 수더분한 사람이었다. 별 탈 없이 딸 둘 낳고, 아들 하나 낳아서 키웠다. 누굴 닮았는지 해준 것도 없는데,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그럭저럭했다. 남의 집 품 팔면서 땅 넓혀서 농사짓고, 지금까지 해 놓은 건 자식들 키우고 공부시킨 것이 전부다.

8부녀들과 어울리면서 어린 애들 놔두고 남의 집 품 팔러 다녀도 그때는 그게 재미있었다. 힘들다 하면서도 돈 헤아리는 맛에 다음날 허리가 부서져도 일하러 나갔다. 회관 부엌에서 고기 굽고 상추랑 미나리 씻어서 된장 발라 쌈 싸먹는 게 외식이었다. 얼마나 꿀맛인지 모른다. 할매, 할배들 한 상 차려드리고 나면, 우리 8부녀 차지였다. 실컷 먹고 떠들고 놀면서 그리고 농사일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엄니들이 부르는 ‘소성리어매’ 노랫소리 들으며 수요촛불 문화제 밤은 깊어간다.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참외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반드시 이기리라~ 맹세하고~ 떠~나셨죠.”

마을회관 앞 가스 불 위에는 아예 큰솥을 걸어두었다. 멸치다시물이 펄펄 끓고 있다. 임 회장과 규란 엄니는 솥을 떠나지 못하고 지키고 섰다. 촛불 마치는 때에 맞춰 가래떡을 풍덩, 떡국을 끓일 참이다. 부엌에는 이미 ‘기미’, ‘김가루’ 고명을 준비해두었다. 촛불 마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회관으로 몰려든다. 부녀회원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떡국 한 국자 퍼서 그 위에 기미를 얹는다. 규란 엄니가 마지막으로 김가루를 뿌리고, 쟁반에 모아서 성주촛불님들 상으로 나간다. 봄날 밤이라도 소성리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뜨거운 국물에 김치 풀어 한 그릇을 뚝딱한다.

규란 엄니는 “더 먹어. 많이 먹어”하시며 떡국을 먹고 있는데도 또 한 그릇을 내 앞으로 밀어주신다. 마다해도 자꾸 권한다. 먹는 걸 봐야 마음이 편한가 보다. 자꾸 거절하는 게 죄스러워서, 떡국 두 그릇을 해치우고는 배가 터질 것 같아 씩씩거린다. 규란 엄니는 사람들 입으로 들어가는 숟가락만 봐도 배가 부르다. 부엌 일을 당신 소명으로 여기신다.

“사드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집에도 못 가니 내가 미안해. 사드 막겠다고 찾아와주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이거밖에 없어. 내가 줄 수 있는 거 이것밖에 없어. 밥 먹어, 밥 많이 먹어야지. 그래야 힘내지. 힘내서 싸우지.”

착한 인심에 내 맘이 고장 난 브레이크처럼 울컥인다. 그래, 울면서라도 먹고, 엄니들 봐서라도 먹고 힘내서 잘 싸우자. 때마침 소성리 깃발들도 일제히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