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미화원 (1)

사람들은 우리를 ‘야간 미화원’ 혹은 ‘육체노동자’라 부른다.

13:02

1.
지하철이든 버스든, 도심 한가운데에서 새벽 첫 차를 타본 사람은 안다. 승객들 대부분은 필경 클럽이나 술집에서 밤을 새웠을 아이들과, 작업 가방 등을 둘러맨 퇴근길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다. 미처 술이 깨지 않은 아이들의 몽롱한 얼굴 뒤로, 피곤에 찌든 표정의 저 남루한 사람들은 대다수 육체노동자들임이 분명하다. 나는 그(녀)들 중 몇몇을 안다. 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백화점의 말끔한 아침을 위해, 저녁 여섯 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나와 그(녀)들은 ‘죽도록’ 일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야간 미화원’ 혹은 ‘육체노동자’라 부른다.

2.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노동운동가였던 시몬 베유(1909~1943)는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 가장 인간적인 문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온갖 정보와 창의적인 지식이 융합되어 기술과 산업을 이끌어가는 지식정보화사회인 오늘날, 정신노동/육체노동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는 매우 애매하다. 누군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문학 창작을 목적으로 워드작업을 한다고 치자. 그가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는 정신노동이면서 동시에 육체노동에 가깝다. 월급을 받기 위해 출근하는 직장인은 자신의 신체를 종일 직장이라는 공간에 저당 잡힌다. 여기서 ‘신체’는 저 육체노동이 지시하는 ‘육체’와 다르지 않다. 그렇더라도 어떠한 기술이나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 순수하게 신체를 움직여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일단 육체노동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근육활동이 필요한 작업에 종사하거나, 자신의 몸이 유일한 도구이자 재산인 사람들 말이다.

3.
잠자고 있는 아들을 살해한 60대 청소부에 관한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들은 사법시험에 연거푸 낙방한 터였다. 차마 그럴 수 있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물과 땀에 뒤범벅이 되어 퇴근했는데 최소한의 열심조차 보이지 않는(것처럼 여겨지는) 자식이 눈앞에 있다면 누군들 이성을 잃을 만큼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순전히 내 오해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부인 아버지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절망한 거였다. 어쩌면 무능한 아비의 삶을 반복할지도 모를 아들의 삶을 그는 자기 손으로 끝장내주고 싶었던 거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
뫼르소의 총구는 사회적 통념을 겨냥하기보다 ‘나아질 가망(욕망)이 없는’ 자기 삶을 향한 건지도 모른다, 저 가난한 청소부가 아들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삶을 살해한 것처럼.

4.
한국은 OECD 국가 중 저임금 근로자의 비율이 25%로 가장 높다. 야간 미화원들인 우리는 백이십만 원 가량의 그 저임금을 위해 저녁부터 새벽까지 달리기하듯 일한다. 휴지가 아직 남아있는데 미화원들이 새 두루마리휴지로 바꿔 끼우는 바람에 낭비가 심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단언컨대 그들은 게으르거나 얕은 수를 쓰려던 게 아니다. 일거리는 차고 넘치고, 시간은 항상 부족하다. 예컨대 “휴지를 변기에 버리지 마세요.”라는 경고 문구를 아랑곳하지 않는 고객들로 변기는 막히고, 오물과 함께 물이 넘쳐 바닥을 더럽히기 일쑤다. “저기 넘치는데 확인하셨어요?” 성질이 까칠한 고객은 우리가 빈둥거리기라도 하는 양 그렇게 타박을 한다.

차례를 기다리느라 고객들은 줄을 섰는데, 변기가 하나도 아니고 한꺼번에 세 개나 막힌 적이 있다. 그 층을 담당했던 누군가는 그만 오물로 흥건한 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건너편 구역을 담당하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은 인근에 있는 다른 백화점에서 일하다 지금의 백화점으로 함께 이직한 처지였다. “아이고, 순애(가명)야, 나는 못해먹겠다!” 그러니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박노해, 「시다의 꿈」)던 저 80년대 ‘시다의 삶’으로부터 우리가 과연 멀어지기나 한 걸까?

5.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다.

“미국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1926-2009)는 보모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틈 날 때마다 사진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사진을 찍었지만, 생전에 전시회를 열기는커녕 자신의 사진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매일매일 찍은 사진들이 쌓이고 쌓이자 창고를 빌려 보관했다. 20여 년 동안 해온 보모 일자리를 잃은 뒤로는 가난과 병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다. 늙고 지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수십만 장에 달하는 사진뿐이었다. 전 재산이랄 수 있는 네거티브필름과 슬라이드필름, 그리고 프린트는 이를 보관하던 창고의 임대료를 내지 못해 압류 당하고 만다. 결국 시카고의 한 벼룩시장에 경매물로 넘겨지게 되는데 그때가 2007년, 그녀의 나이 81살이었다.”(CBS 칼럼)

그녀의 생이 신비로운 건 숨은 사진작가여서가 아니라 그녀의 예술이 ‘인정투쟁’과 전혀 무관해서이다. 예술에 흔히 따라붙는 ‘순수’란 저러한 형태를 가리킴이 마땅하다.

오늘날 우리 곁에 비비안 마이어가 만약 살아있다면, 그녀는 우리네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매일매일” 사진으로 기록하지 않았을는지. 바라건대 나의 글쓰기가 그녀의 작업과 조금이라도 닮아있기를!

6.
‘고고학’에 ‘계보학’을 합친 푸코의 계보학은 역사가 침묵시켜 왔던 사람들의 묻힌 텍스트를 복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전의 역사적 절차가 무시했던 방법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확인해본 바는 없으나 그의 계보학 목록에는 ‘변기’도 있다고 한다.

과연 청소부의 계보학만으로도 너끈히 세계의 미천한 노동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가령 유럽에서 굴뚝청소부는 중세부터 이어져 온 직업이다. 산업혁명기, 영국에서는 고아 등 빈민층 아이들이 굴뚝청소부로 내몰려 뜨거운 굴뚝 속에서 생명을 잃기도 했다. “When my mother died I was very young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전 아주 어렸습니다/And my father sold me while yet my tongue아버지가 저를 팔아버렸습니다. 아직 제 혀가/Could scarcely cry ” ‘weep! ‘weep! ‘weep! ‘weep!―뚝! ―뚝!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였습니다/So your chimneys I sweep, and in soot I sleep.그래서 전 굴뚝청소를 하고 검댕 속에서 잡니다”라며 시작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굴뚝 청소부The Chimney Sweeper>는 저러한 아이들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침묵의 성자’로 세계에 알려진 인도의 영적 스승 바바하리다스가 작은 칠판에 글로 써서 전한 일곱 편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 중에서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소설이 있고, “거리의 청소부가 운명이라면 라파엘이 그림을 그리듯,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을 조각하듯, 베토벤이 작곡을 하듯, 셰익스피어가 시를 쓰듯 그렇게 거리를 쓸어라.”라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청소부를 예로 들며 설교한 적도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건 청소부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밑바닥 인생을 표상하는 계층이란 말과 같다. 그리고 이 직업이 사회 내에서 열등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인식을 앞장서 내면화한 건 불행하게도 미화원 자신들이다. 평균 연령이 60인 미화원 ‘언니들’은 직장에 자식이나 지인이 찾아오는 걸 죽기보다 꺼린다. 왜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7.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연기를 겸한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에는 모건 프리먼이 전직 복싱선수 출신이자 복싱도장의 청소부로 출연한다. 영화 속 모건 프리먼(에디 역)은 속이 깊고 따뜻하며, 겉모습은 우리가 가진 청소부의 이미지와 달리 중후한 멋을 풍기기까지 한다. 대걸레를 비스듬히 잡은 그가 복싱도장을 느릿느릿 닦고 있는 모습은 한가롭고 점잖아서, 변기를 닦기 위해 쪼그려 앉은 모습이나 온몸에서 풍기는 불쾌한 땀 냄새 따위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8.
‘일상’에 사용하는 작업도구 중 ‘헤나’라는 게 있다. 바닥에 달라붙은 껌이나 오물을 긁어내는 데 필요하다. 줄여서 ‘리스킹’이라 불리는 리스킹걸레는 마른걸레질에 사용하는 기름걸레다. 대리석에 발자국이 남았거나 음료수라도 엎질러져 있으면 ‘마포’ 혹은 ‘밀대’라고 하는 대걸레를 빨아서 잽싸게 물걸레질을 해야 한다. 대리석은 말 그대로 돌이어서, 제때 닦아내지 않으면 고스란히 물기를 흡수한다. 흡수된 물기는 돌에 흉터와 같은 흔적을 남긴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도 용납하지 않는 백화점의 청결함은, 그러한 도구들을 이용한 미화원들의 쉴 새 없는 작업에서 비롯한다.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를 손에 들고 다니는 어린아이들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걸 누가 딛기라도 하면 매장 여기저기에 시커먼 발자국이 남는 건 금방이다. 고객이 테이크아웃컵에 든 음료수를 실수로 쏟는다! 이거야말로 돌발 상황이다. 언젠가 내 앞에서 아이가 캔을 거꾸로 드는 바람에 끈적끈적한 과즙을 엎지른 적이 있다. 세일 첫날로 고객들이 붐빈 날이라 마치 폭탄이 터지듯 발자국이 사방으로 번져갔다. 물론 그런 치다꺼리를 하라고 미화원이 존재한다. 아이 부모 중 아무도 닦으려 들기는 고사하고 사과 한 마디 없이 자리를 뜬 이유일 것이다. 염치와 권리를 구분 못하는 고객들의 뒤통수에 대고 상냥하게 웃어주어야 하는 게 또한 우리들의 임무다. 그런 면에서 서비스업체에 종사하는 미화원들은 감정노동자에 해당하기도 한다.

욕설을 퍼붓거나 상대를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계속해서 억누르면 어떻게 될까? 익명의 타자들에게 무차별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아니 주위의 모든 고객들이 갑자기 흉기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9.
적어도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여자 미화원들에 대한 호칭은 ‘여사님’이다. 알다시피 여사란 호칭은, 통상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를 높여 이를 때 성명 아래 붙여 쓴다.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를 때 사용한다는 또 다른 의미가 사전에 등재되어있으므로 긍정적으로 해석한다고 쳐도, 언어의 사용 가치는 언제나 당대적일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부르는 자나 불리는 자나 낯이 붉어질 이러한 호칭에는 불러주는 이들의 반어적 심리, 즉 낮잡아보는 걸 들키지 않으려 도리어 과장되게 존중해주는 제스처가 숨어 있다. ‘고객은 왕’이라지만 실상은 자본을 목적으로 인격 그 자체로서의 고객은 사물화하듯이, ‘여사님’이라는 호칭은 미화원 각자의 고유한 개별성을 소외시킨다. 과분한 호칭은 청소일의 미천함을 오히려 부각시키고, 여자 미화원 모두를 집단적으로 희화화한다. 무엇보다, 격에 맞지 않는 호칭은 우리네 미화원들의 열악한 처우를 은폐하는 ‘데에만’ 기여한다. 그리고 이게 그 호칭이 가진 가장 나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