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의 욕구는 곧 창조의 욕구다!”: 미하일 바쿠닌 ①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 (12)

11:24

1. 바쿠닌의 생애

“나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 이 목표에 대한 나의 전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분쇄할 것이다. 인간을 희생시켜서 그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건에, 그리고 그와 관련된 … 모든 관념에 저주가 있으라.”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Mikhail Alexandrovich Bakunin;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1814.5.30~1876.7.1)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자유를 광적으로 사랑한 혁명가’다. 그는 스스로 “나는 자유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I am a fanatic lover of liberty)이라고 불렀다. 그의 이 말은 “모두의 자유는 내 자유의 본질이다”(The freedom of all is essential to my freedom)라는 표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Mikhail Bakunin, <Man, Society, and Freedom>(1871)).

▲미하일 바쿠닌[출처=http://bakuninlibrary.blogspot.kr]
▲미하일 바쿠닌[출처=http://bakuninlibrary.blogspot.kr]

바쿠닌은, “프루동은 우리 모두의 주인이다”라며 평생 그를 흠모하였다. ‘아나키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의 정신적 스승 ‘프루동’의 사상은 바쿠닌이 아니었다면 현실에서 빛을 발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아나키즘은 “바쿠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바쿠닌 이전의 아나키즘 사상가인 골드윈, 프루동, 슈티르너 등이 주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이라면, 바쿠닌은 아나키즘을 정치와 사회혁명의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우리가 바쿠닌을 ‘아나키즘운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는 그에 대한 저작물이나 연구가 그리 많지 않다. 이 점은 이를테면, 같은 러시아 출신 아나키스트 혁명가인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Кропо?ткин)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파괴의 욕구는 곧 창조의 욕구다!”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과격한 혁명론자인 그를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양진영 모두 받아들이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바쿠닌만큼 동시대에 살았던 맑스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비판한 사람은 없다(박홍규, 124쪽).

대부분 혁명가의 삶이 그러하듯 바쿠닌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러시아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여러 나라를 떠돌다 독일 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여정은 유명한 역사학자인 카(E.H. Carr)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로 하여금 <미하일 바쿠닌>이란 자서전을 쓰게 만들었다(E.H. 카(이태규 옮김), <미하일 바쿠닌>, 이매진, 2012).

바쿠닌은 1814년 모스크바 북서쪽에 위치한 프레무히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렉산드로스 미하일로비치 바쿠닌(Aleksandre Mikhailovich Bakunin)은 1,200여명의 농노를 거느린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8세기의 자유정신과 교양을 지닌 귀족으로 러시아 농민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소유한 농노를 위해 ‘약관’을 작성하였다. 부친의 이와 같은 정신은 유년기와 청년기의 바쿠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바쿠닌의 유년기는 대체로 행복하였고, 가정교사에게서 다양한 외국어를 배웠다.

14세 때 바쿠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포병학교에 들어가서 졸업하고, 장교로 활동한다. 그러나 곧 군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1835년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제대한다. 헤프너(Hepner)는 바쿠닌의 지적 경로를 네 시기로 구분한다(장 프레포지에, 219~220쪽).

<1기>(1832년경~1842년): 모스크바 서클 참여기. 러시아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스탄케비치(Stankevich)가 이끈 지식인 서클에 참여함으로써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시기

<2기>(1842년~1849년): 현실참여기. 독일 급진주의자들과의 교제, 혁명적 선동, 각종 혁명(1848년 2월 파리, 1848년 6월 프라하, 1849년 5월 드레스덴)에 활동적으로 참여한 시기. 이 시기는 그가 체포됨으로써 막을 내림

<3기>(1850년~1861년): 투옥?유배기. 투옥되어 있는 동안, 그는 차르 니콜라이 1세(Nikokay I)의 요구로 <참회록> 작성. 시베리아로 유배당한 그는 1860년 일본과 미국을 경유하여 영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

<4기>(1862년~1876년): 정치?혁명활동기. 그는 1870년에 일어난 프랑스 리옹봉기에 참가하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혁명활동에 헌신하는 한편,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면서 혁명적 아나키즘에 대한 정교한 이론 수립

바쿠닌은 부유한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물질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혁명적 아나키스트의 길을 선택하였다. 10년 이상 장기간의 투옥과 유형도 사회혁명에 대한 불타는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바쿠닌은 후일 사회민주국제동맹으로 알려진 ‘국제동포단’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그 단원들을 위해 <혁명가의 교리문답>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그 교재에서 그는 모든 인간성을 박탈하더라도 혁명기계가 될 것을 호소하고, 사회혁명은 평화적으로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

평생 혁명가이자 투사로 살다간 바쿠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현대의 저명한 아나키즘 이론가들은 물론 체 게바라와 같은 투사?혁명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는 이론적?실천적으로 탁월한 아나키스트이지만 독자적으로 저술한 책 한 권 남기지 않았다. 그가 작성한 대표적인 팜플렛 <신과 국가(God and the State)>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한이나 연설문 등의 형태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E.H. 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하일 바쿠닌만큼 한 개인의 사상이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람도 드물지만, 그런 사람 중에서 미하일 바쿠닌만큼 자신의 견해에 관해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기록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바쿠닌은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이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타고난 기질 탓에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그리고 문어보다는 구어에 의지해서 글을 썼다.”(E.H. 카, 242쪽)

바쿠닌은 한 동료에게 이렇게 썼다.

“이론이나 기존의 제도, 이미 나온 책들은 세계를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체제도 고수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정한 탐구자입니다.”(E.H. 카, 242쪽)

바쿠닌은 혁명마저도 ‘탐구의 과정’으로 보았을까. 아니면 “사고하기보다 직관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았을까. 차분하게 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그의 내면에 들끓는 혁명의지가 너무 강력했을지도 모른다. 온 몸으로 부딪치며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고는 도저히 마그마처럼 들끓어 오르는 그 의지를 불태울 수 없었으리라.

2. 자유사상

“바쿠닌의 사상은 자유로 시작하여 자유로 끝난다.”

코울(G.D.H. Cole)의 말이다. 그는 바쿠닌 사상의 핵심은 ‘자유에 있다’고 파악한다. 바쿠닌의 자서전을 쓴 카(E.H. Carr)도 바쿠닌을 가리켜 “역사상 자유정신의 가장 완벽한 구현의 일례”라고 하였다. 바쿠닌 스스로도 “나는 자유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하였다. 바쿠닌은 자유에 대한 절대적 확신과 믿음을 가진 아나키즘 이론가이자 혁명가였다. <독일에서의 반동(The Reaction in Germany)>(1842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누구도 감히 공개적으로, 또 겁도 없이 그가 자유의 적(an enemy of freedom)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

바쿠닌에 따르면, ‘암묵적 자유의 적들’(the tacit enemies of freedoms)은 다음 세 가지다(Paul McLaughlin, pp. 21~23).

첫째, 고위직에 있는 나이 많은 개인들이다.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이미 청(소)년기에 자유의 원리를 수용하고 있다. 그들이 자유의 원리를 수용한 것은 적어도 “사업상 이익을 최소한 두 배 이상 만들어주는 짜릿한 기쁨”을 가져다주고, 또한 그 이후의 인생에서 그들의 무기력한 명성을 유지하고 생색내는 데 이 원리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유의 원리에 대해 어떤 열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귀족이나 부르주아 청소년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보잘 것 없고, 헛되고, 경제적 이익”에 제한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인생과 그들의 주변에 대한 경박한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셋째, 가장 중요한 적들로서 반동적인 정당(the Reactionary Party)이다. 보수주의자, 역사학파 및 정치와 법, 그리고 철학에서 셀링(F.W.J. Schelling, 1775~1854)을 추종하는 실증주의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로 구성된 반동적인 정당은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원리를 지지하는 자(민주주의정당 the Democratic Party)는 그들의 적이 강하다는 것과 자신들이 전범위에 걸쳐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 민주주의정당도 안팎의 적이 있는데, 특히 그 내부의 적들을 다스려야 한다. 다시 말하여, 민주주의는 단순히 통치하는 과정에서 나타는 내부의 적을 다스리는 것뿐 아니라 모든 통치의 형태와 헌법적 혹은 정치경제적 변화, 나아가 세계의 전적인 변화(a total transformation of the world)를 이끌어내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변화(즉, 세계의 전적인 변화)는 기존의 역사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다.

바쿠닌은 ‘자유의 적들’을 유형화시켜 예를 들고 있다. 하지만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자와는 달리, 코울이 말한 것처럼 아나키스트들은 생래적으로 ‘자유’에 목숨을 건다. 물론 오늘날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과 소수자에 의한 다수자의 경제적 착취 등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18~9세기의 고전적 아나키스트들의 경우, 평등보다는 자유에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의 아나키스트인 바쿠닌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자유에 대한 제한 혹은 침해는 ‘압제’라고 보았다.

“자유를 떠나서는 그 어떤 善도 없고, 자유야말로 진실로 그 이름에 걸맞게 善의 원천이자 동시에 그 절대적 조건이다. 결국 善은 자유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Michel Bakounine, <Oeuvres>, tome I, 1900, p. 204.)

그는 자유는 불가분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자유의) 일부분에 대한 침해는 자유 전체를 살해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잘라버린 (자유의) 작은 부분은 나의 자유의 본질 그 자체이고, 나의 자유 전체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운동이다. 잘려나간 그 부분이 어찌 작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이 잘라버리려고 하는 그 부분에 나의 모든 자유가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Michel Bakounine, <Oeuvres>, tome I, 1900, p. 144.)

그렇다면 바쿠닌이 추구한 자유는 무엇인가? 그 자유는 공동체 의식에 투철한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외 없이, 평등하게 누리는 자유다. 따라서 자유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며 사회적인 것이다(박홍규, 126쪽). 왜냐하면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필연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자유란 바로 ‘연대에 의한 자유’(la libert? par la solidarit?)이자 ‘평등 속의 자유’(la libert? dans l’?galit?)다(이종훈, 118?114쪽).

바쿠닌은 개인의 절대자유를 추구하면서도 공동체 구성원 간 연대를 통한 각 개인들이 누리는 자유의 충돌을 방지하고, 그 조화를 도모한다. “루소학파나 여타의 모든 부르주아학파들의 ‘개인주의적?이기주의적 자유’는 내가 추구하는 자유가 아니다”라며 개인들의 자유가 상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사회계약론을 배격하였다(이종훈, 114쪽). 바쿠닌은 사회계약론자들이 전체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고, 더 나아가 부정하려는 데서 국가가 출현했다고 보았다(이종훈, 121쪽).

그리고 바쿠닌의 자유사상에서 특히 ‘연대에 의한 자유’는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민족의 자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대적 자유론에 근거하여 그는 평생 슬라브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였다(박홍규, 126쪽). 그에게는, “지상의 한 인간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반동적인 정당의 예 가운데 바쿠닌이 셀링을 지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셀링은 18~9세기 독일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그의 사상은 특히 러시아의 슬라브애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정체성과 운명에 대한 일종의 ‘메시아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러시아와 유럽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기초하여 러시아를 서유럽과는 다른 국가, 다른 민족, 다른 종교를 소유한 유럽의 다른 부분이라고 간주하였다. 근대정신의 중심축이었던 이성과 합리성, 진보에 대한 낙관적 희망에 대한 그들의 반감은 셀링을 중심으로 한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촉발시킨 계기로 작용하였다(남석주, 245쪽). 하지만 바쿠닌은 이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주관적이며 직관적인 경험에 의지하는 셀링의 낭만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프루동은 이렇게 절규한다. “La libert?, toujours la libert?, rien que la libert?, et pas de gouvernmentalisme.”라고. “자유, 언제나 자유, 오직 자유, 그리고 정부중심주의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