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엄니열전] (5) “사드가 안전하면, 군수 니 대갈빡 위에 얹어놓고 살아라” /초희

성주군수 김항곤이를 용서할 수 없다, 백광순(74세)

14:46

[편집자 주=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은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사투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선에서 선 소성리 엄니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이 시대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다정> 회원들이 쓴 글을 부정기적으로 <뉴스민>에 연재합니다.]

성주군수 김항곤이를 용서할 수 없다, 백광순(74세)

초희(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 회원)

해거름에 소성리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동네를 둘러보니 집과 집 사이, 좁은 골목길 따라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마을회관을 뻔질나게 다녔는데, 골목골목 집 구경을 제대로 해본 적 없었다. 발길 닿는 데로 걸어간 좁은 골목길, 정갈한 벽돌집에서 광순엄니가 나를 부른다. 차 한잔하고 가라는 엄니 손짓이 정겹다.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 한 모금 아끼지 않는 인심이 묻어났다.

▲왼쪽이 광순엄니

“설 아래인가, 성주서 가요제 했었어. 그때 동생이 구경 한 번 가자고 해서 따라갔지. 거기 가니까 성주군수가 인사한답시고 뭐라 하더라. 그때 귀가 번쩍 뜨였어. ‘사드는 안전한 곳에 갖다놨습니다’ 카는 거야. 그 말을 듣고는 화가 치밀어서 입에서 욕이 막 나왔지. 옆에 있던 동생이 나를 말려. 언니 혼자 여기서 아무리 열 내봐야 언니만 이상한 사람 되니까 참으라는 거야. 나도 혼자서 열 내면 무슨 소용 있나 싶어서 참았지. 그런데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는 열불이 막 나대. 열이 가슴 위로 올라와서 뜨끈뜨끈한 거지. 사드를 안전한 곳에 갖다놔? 그게 우리 집 위야. 그게 안전하다고 말하는 김항곤이 이놈, 용서가 안 되더라고.”

어느 날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드가 성주로 들어온다고 걱정했다. 그때는 사드가 뭔지도 몰라서 딸에게 “사드가 뭐꼬?” 물었다. “엄마, 그게 전자파도 많이 나와서 인체에 해롭고 사람한테 안 좋은 거야” 딸이 말했다. 사람한테 안 좋은 물건이 하필 친정마을 성원리 뒤편 성산포대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한테 전화를 걸었다. “사드가 들어온다는데 공무원 하는 00이한테 알아보라”며 친정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조카가 고모인 광순엄니 걱정을 하고 있다. “사드가 롯데골프장으로 들어간다는데 고모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까치산으로 간다, 염속산으로 간다는 말이 들릴 때만 해도 소성리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성리 롯데골프장으로 온다더니, 롯데골프장 부지를 미국에 내주었다. 사드는 결국 어둠을 틈타 들어오고 말았다.

경찰 8,000명을 앞세워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사드장비 반입 작전이 개시되기 전날 밤에도 소성리 마을 도로에는 난로에 장작을 가득 넣어 불을 땠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하나둘 소성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성리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흥겨운 노래를 부르면서 긴장을 풀기도 했다. 걱정된 주민들은 밤늦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사이렌을 울리겠다는 이장님과 부녀회장님 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등을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갔다.

“그날 밤에 열한시 반인가 집으로 돌아갔어. 겨우 잠들었지 싶은데 전화가 온 거야. 전화번호가 누군지도 모르겠더라. 목소리가 규란이라. ‘형님 빨리 나오이소’ 하는 거야. 잠결에 뛰어나온다고 마후라 하나 안 걸치고 나왔어. 그때 경찰들은 많이 없었어. 도로를 들여다보니까 교무님들이 기도한다고 앉아 계시데. 잠시 3분이나 걸렸나 볼일 보러 갔다 오니까 경찰이 이중삼중 겹겹이 둘러쌓더라. 도로에 기도하는 교무님들한테 갈라고 경찰을 밀어 봐도 밀어지지도 않고. 주민들이 모여도 경찰 백 분의 일도 안 돼. 누가 우산을 씌워 주길래 우산을 쓰고 앉아있었지. 경찰이 미워서 우산을 말아들고는 막 둘러쳤어. 하이바를 쓰고 있어서 소리만 요란해. 경찰 한 놈이 우산을 확 낚아채더니 부러뜨려 버리데. 마을 사람들은 몇 명 없고, 다른 사람들은 누가 눈지도 모르겠고. 밀고 당기고 하니까 누가 밟고 밀치고 했는지도 몰라. 복숭아뼈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더라고. 바로 옆에 난로가 있어서 잘못하다간 난로에 다 굽히겠다 싶었지. 하도 화가 나서 옆에 장작 있는 거 주워서 던질만한 사람한테 집어줬어. 나는 늙어서 팔에 힘도 없고, 던지지도 못하니까 주워주기라도 해야 하잖아. 내 옆에 사람이 장작을 던지데. 뭐 큰 거는 다칠까봐 못 주고 잔 거는 몇 개만 주워줬지. 그런데 난로 옆이라서 화상 입을까봐 더 겁이 나더라. 그래서 옆으로 좀 피해 있었지.”

순식간에 사드가 반입됐다. 사드를 막기 위해 종일 소성리 마을회관 앞 도로를 지켰다. 군은 치누크 헬기를 띄워서 물자를 옮겼고, 마을 상공을 떠도는 헬기 소음에 주민들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광순엄니 입에는 욕이 붙었다. 마을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치누크 헬기의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면 마당으로 뛰어나가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한다. “이노무 시끼들 그래 나르고 싶나?” 욕이 튀어나온다. 욕을 해도 화가 가시지 않고 가슴은 울렁거린다. 밤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다.

“김항곤이 그놈 때문이라는 원망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성주군수가 사드를 성주에 들이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안전한 곳에 갖다놨다고 하는 게, 여기야. 여기는 성주 아니가? 우리 집 바로 위에 떡하니 갖다놓고 안전하다고 떠들어대니까, 내가 막 그랬어. 그렇게 안전하면 군수 니 대갈빡 위에 올려놓고 살아라하고 말이야.”

광순엄니 택호는 연산댁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연산이다. 성주읍 금산리인데 원래 마을 이름은 인산이다. 수원 백씨 씨족마을이다. 광순엄니가 자랄 때만 해도 100호 정도 되는 당시에 꽤 큰 마을이었다. 친척이 아닌 다른 성을 가진 이들은 ‘산지기’이거나 ‘고지기’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광순엄니 위로는 오빠가 넷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비롯해 남자만 여섯인 가운데 홀로 여성이었던 어머니한테는 살림 밑천 큰 딸이었다. 할아버지에게는 금쪽같은 손녀였다. 여동생이 하나 더 있었지만, 첫 딸이라 그런지 할아버지는 유독 정을 많이 주셨다.

“스물넷이 되도록 집에서 올케언니가 해준 밥 먹으면서 궂은일도 모르고 편하게 지냈어. 할아버지한테 사랑받고 집안 식구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컸지, 그래도 나이가 차니까 시집은 가야 하고 외갓집 사촌이 중신을 섰어. 칠남매 맏이라고 하데. 고생길이 훤하잖아. 시집 안 가려고 했어. 그런데 집안 어른들이 종손도 아니고 지차의 맏이라서 괜찮을 거라고 했어. 우리 영감이 고등학교까지 나왔거든. 그 당시는 많이 배운 택이지. 고등학교까지 했으면 공무원도 할 수 있었어. 지차 맏이라고 하니까 나가서 살 거라고들 하대. 내 솔직한 심정에 공무원하면 뭐하러 이 촌에서 살겠나 싶었어. 나가서 살 거니까 괜찮지 않겠나 싶더라고.”

스물넷에 소성리 마을로 시집왔을 때 막내 시동생은 일곱 살이었다. 시어른이 들일을 나갈 때면 시동생들은 큰며느리인 광순엄니 몫이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시동생들 말벗도 되어주었다. 일은 광순엄니 뜻대로 되지 못했다.

“그때 공무원 시험을 쳐도 20원에서 30원 정도 군에 상납해야 됐어. 시험은 형식이고, 경찰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어느 공무원이 돈을 얼마 줘야 한다고 힌트를 준거야. 시어른이 엄청 곧은 분이거든. 경우가 바른 분이니, 시어른이 돈 주고는 취직 안 시킨다고 딱 잘랐어. 그때 시어른 몸이 많이 편찮으셨거든. 속이 많이 안 좋으셨던 거지. 우리가 나갈 수가 없었어. 솔직한 말로 시어른 안 모시고 나가서 산다고 생각하고 시집왔는데, 편찮은 어른을 두고 나갈 수가 없잖아. 내 운명이구나 싶더라.”

나락농사, 보리농사를 짓고 살았다. 나이 들면서 양파도 지어보고, 수박농사, 참외농사도 하면서 품목을 바꿔보기도 했다. 시집오기 전에 농사일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아기만 키우며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들로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들로 따라나서도 일할 줄 몰라서 구경이나 했다.

“시어른들은 대체로 지차를 이뻐하는데 우리 어른은 맏며느리를 이뻐했어. 돌아가실 때까지 맏며느리를 아껴주셨어. 일 못해도 구박받거나 그런 적은 없는데, 내가 힘들더라. 일을 할 줄 모르니까 미안한 거지. 지금은 뱃살이 붙어서 퉁퉁하지만 그때는 호리호리했거든, 힘도 없고. 보리쌀을 씻을라치면 막 치대야 하잖아, 손목이 아파서 잘하지도 못 했어.”

그러나 칠남매의 맏이였다. 일곱 살 난 막내 시동생은 광순엄니가 다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막내 시동생은 “엄마 같은 형수”라며 때 되면 안부전화를 하고, 꼬박꼬박 찾아온다. 여섯 동생을 시어른 대신해서 키우며 집안 대소사를 다 치러냈다.

시어른은 집안 막내였다. 큰집 종손이 총각 시절에 도회지로 나가서는 재산을 크게 탕진해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됐다. 큰집이 제사를 지낼 형편이 아니었다. 제사는 안 지낸다는 것이 칠남매 맏이에게 시집온 조건이었는데, 그것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종손이 지내야 할 제사를 광순엄니가 다 모셔왔다. 삼십년도 넘는 세월을 증조부모와 조부모에 큰집 어른 제사까지 다 지냈다. 제사를 모셔올 때도 원망은 없었다. 이게 운명이려니 받아들였다. 시아버지는 일흔여섯에 생을 마감했다.

“옛날에는 행사만 있으면 입이 엄청 커. 같이 먹으려고 입들이 버글버글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 날에 사촌 시동생이 내게 와서는 ‘형수, 방에 들어와 보이소’ 하더라. ‘형수 앉아보이소, 여태 고생 많았습니다.’ 그러데. ‘내가 무슨 고생을 해?’ 하니까 사촌 시동생이 ‘아 어마이가 어차피 우리가 모실 제사인데 삼우날에 제사를 모시가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합니다. 손 없는 날이라고 좋다고 합니다. 오늘 저희가 제사를 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는 거야.”

삼십 년 모신 제사를 하루아침에 종손인 사촌 시동생이 아무런 언질 없이 가져가겠다고 통보를 한 거다.

“나는 제사 모시면서 불평한 적은 없었어. 우리 영감한테 그랬지. 내까지는 제사 모셔도 우리 아들한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었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었지만, 제사 때문에 불평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그런데 갑작스럽게 통보받은 거지. 얼떨결에 아무 생각이 안 나고 마음이 하얘지는 기라. 좋은지도 모르겠고. 뭐가 얻어 널찌는 것처럼 이걸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줄라니 또 섭섭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모르겠더라고. 그런데 옆에 집안 어른들이 그동안 자네 고생했다. 모시고 가게 이제 주라고 하는 거야.”

시어른이 돌아가시면서 광순엄니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종손을 대신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치러왔던 조상님들 제사를 이제 임자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은 허전했다. 고생한 덕에 시어른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사는 건 고만고만했다. 빚은 안 지고 살았다. 딸만 내리 셋을 낳고 아들을 봤다. 시어른이 끔찍이 귀하게 키운 아들이었다. 광순엄니 집은 시누이들에게 친정이었다. 시동생들과도 우애가 좋았다. 명절이나 경조사가 있을 때면 대가족이 모인다.

“우리 영감은 남한테 퍼주는 걸 좋아해. 옛날에 95년인가, 그때 운전면허증을 땄어. 농사지으니까 승용차는 필요 없잖아. 사람 많이 태우고 다녀야 한다고 더블캡을 한 대 샀어. 그때 마을 할매들 모시고 어디 맛있는 집 있다고 하면 많이도 모시고 다녔지. 사람들하고 어울려 다니고 노는 걸 워낙 좋아해. 우리 영감이 저 세상 간지 벌써 삼 년 되었는데 작년까지 마을 할매들이 칸다. 연산댁 영감 없으니까 차 태워 줄 사람 없다고. 아쉬운 소리를 많이 해. 요즈음은 좀 덜하더라.(웃음) 할매들 모시고 다니면서 국수에 파전에 동동주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참 많이도 놀러 다녔지.”

광순엄니는 소성리 골짜기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자식들만큼은 이 골짜기를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삼남매는 일찍 대구로 보내고, 둘째딸은 김천으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생명문화축제 개막식 하는 날에 일했어. 영감 돌아가시고, 너무 외롭고 우울하더라고. 친구가 마을에 있는 된장공장에 일하러 가자고 하대. 영감 살아계시면 일 안 보냈겠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시간도 안 가고 안 되겠다 싶어서 친구 따라갔지. 그날 마을에서 일 안 하고 개막식 갈 수 있냐고 하는데, 그날따라 된장공장에도 사람이 많이 빠져서 나랑 한 사람밖에 없었거든. 일을 빠질 수가 없겠더라고. 한참 일하고 있는데 박규란한테서 전화가 온 거야. 이상한 차가 소성리로 간다고 마을회관에 한 번 올라가 보라고 하데. 회관 앞에 이장댁이 앉아 있더라고. 이장댁이 생명문화축제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지. 내가 갔을 때 러시아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어. 힘이 없으니까 앞으로 나가보지도 못하는데, 군수가 괘씸한 거야. 그런데 갑자기 아수라장이 됐어. 부녀회장이 나자빠지고 우리는 일어나서 항곤이한테 간다고 악을 쓰고 욕을 막 했어. 우리 집안 어른들이 선비라서 글이나 읽고 점잖은 분들이라 칠십 평생을 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놈의 사드 때문에 어느 날부터 나도 모르게 내 입에 욕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의자 밑에 물병이 널브러져 있대. 우리를 막아선 공무원이랑 경찰한테 물을 막 뿌렸지. 물이라도 뿌려야 열이 식을 거 같아서야. 사드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늘 안정이 안 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게 다 군수 때문이라는 원망을 감출 수가 없었어.”

사드가 들어온 4월 26일은 기가 막힌 게 아니라 끔찍했다. 성주군수가 제3부지를 요청했기 때문이라며, 광순엄니는 성주군수를 용서할 수가 없다고 했다. 군수에게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진심어린 사과를 할 리가 없다고 광순엄니는 생각한다. 엄니가 군수에게 듣고 싶은 말은 “사드 철거하겠다”는 말밖에 없다. 그래도 생명문화축제 개막식 때 성주군수 김항곤 씨를 만나면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우리도 듣고 보고 배워서 다 안다. 저 사드가 고철보다 못하다는 걸.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저 고물 사드를 갖다 놨노? 입이 있으면 군수야, 말 좀 해보거라. 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