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반대’ 성주에 온 40년차 일본 평화운동가는 ‘김구’를 떠올렸다

[르포] 7월 11~13일 성주에 온 일본 평화운동가
히사시 씨, "사드가고 평화오라"를 함께 외치다

15:57

태풍이 몰아치면 생명을 앗아갈 만큼 거세지만, 정작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 고속열차가 등장하고부터 차창 밖 풍경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 손 안에 꽉 쥐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눈을 돌려 주변을 돌아볼 때이다. 감정이입하지 않고, 낯설고 새롭게 느끼도록 할 때 감각은 예민해진다.

사드 배치 철회 운동을 1년 넘게 벌이고 있는 성주. 365차 사드 배치 철회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한 일본인은 이 광경을 보고 김구를 떠올렸다. 그는 “김구 선생님의 ‘나의 소원’ 속에 있었던 문화의 나라를 구현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구나”라고 했다. 40년 동안 일본 평화위원회에서 활동한 평화운동가 우에하라 히사시(上原久志, 59) 씨는 지난 11일부터 13일까지 2박 3일 동안 성주를 방문했다.

▲7월 11일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성주 사드 반대 투쟁 현장에 함께하고자 1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다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순간 보이스 피싱을 의심했다. 받았다가, 전화비 폭탄을 맞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다가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설픈 한국어를 하면 끊어야지 생각했던 차에 일본어가 들려왔다.

일본 평화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히사시 씨는 7월 10일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사드 배치 철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성주, 김천을 가보고 싶은 게 목적이었다. 지난 3월에 소성리를 다녀간 일본 평화위원회 회원들로부터 기자의 연락처를 받았다고 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고, 성주를 가려고 하는데 차편과 숙소를 문의했다. 동대구역까지만 오면 안내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11일 오후 2시 동대구역에서 히사시 씨를 만났다. 13년 만에 한국에 온 그는 “사드 관련 소식을 계속 다르고 글도 쓰고 있는데 현장에 꼭 가보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동대구역에서 팔공산IC-왜관IC를 거쳐 성주읍으로 갈 참이었다. 그는 대구에 있는 미군기지에 관심이 많았다. 대구의 캠프워커, 캠프헨리, 캠프조지를 언급하며 미군기지 위치를 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아양교를 건널 무렵, 대구공항에서 비행기 한 대가 이륙했다.

“저곳이 공군기지입니까? 대구공항-공군기지 이전은 어떻게 됐습니까?”

성주는 통합공항 이전 후보지에서 제외됐지만, 아직 진행 중이며 군위군 주민들이 일방적인 공항 이전에 반대해 군수 주민소환을 추진 중이라고 전했다. 왜관IC로 향하면서 또 하나의 미군기지인 캠프캐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기자보다 많은 내용을 알고 있었다.

캠프캐롤에 배치된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물론, 주한미군 기지에 어떤 무기가 배치돼 있는지, 어떤 목적인지 줄줄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지가 뒤바뀌면서 기자가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그는 스무 살 때부터 평화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35년 동안 일본 평화위원회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하다가 몇 해 전 몸이 안 좋아 그만뒀다. 치료 후에는 연금을 받으면서, 평화위원회 조사연구위원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전 세계 곳곳에 흩어진 미군의 활동을 감시하고 조사하는 일이 그의 주된 일이었다. 매일 각국 미군기지 홈페이지를 살피고, 언론을 살핀다. 특히, 한국 언론 기사를 세심히 살핀다고 했다.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다고 했다.

사드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히사시 씨가 “이번에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드를 반대한 심상정 후보가 6.2%밖에 못 얻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쉬움과 함께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싶다는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그래도 진보정당 후보 가운데 최고 득표를 기록했고, 사드 적극 찬성론자가 당선된 것은 아니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기자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도민퍼스트회’가 승리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에 히사시 씨는 “자민당과 차이가 없어 크게 충격은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궁금증이 발동했다. 지지하는 정당을 물었다. 그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저는 공산당원입니다. 공산당은 일제강점기에 유일하게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 정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70년대 민주노동당으로 시작한 한국의 진보정당 변천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자꾸 정당 이름이 바뀌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공산당도 탄압을 당하고, 젊은 당원이 줄어들며 당 이름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바꾸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당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아집’이 아닌 ‘역사’를 중히 여기는 태도가 엿보였다.

우익단체의 모습에 아픔을 공감한 히사시
“사드가고 평화오라”를 함께 외치다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드 기지와 3km 떨어진 초전면 소성리에 도착했다. 히사시 씨는 카메라를 꺼내 작은 마을 소성리와 사람들을 담았다. 그는 성주뿐만 아니라 ‘소성리’도 또박또박 발음했고, 원불교 정산정사 생가의 위치를 묻기도 했다. 언론 보도와 <뉴스민> 생중계를 챙겨보면서 사드 배치 철회 운동의 1년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성주 주민들에게 히사시 씨를 소개했다. 히끗한 머리 위에 모자를 눌러쓴 작은 체구의 일본인은 성주 주민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직접 출력한 명함을 전했다. 그의 명함에는 한글로 ‘우에하라 히사시’라고 적혀 있었다. 그와 성주 주민들은 이내 한마음이 될 수 있었다.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보수단체가 마을회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사시 씨는 일본도 극우단체가 극성을 부린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히사시(가운데) 씨가 일본평화위원회가 발간한 평화신문을 꺼내 김충환(왼쪽) 성주투쟁위 공동위원장과 노성화(오른쪽) 촛불지킴이단장에게 설명하고 있다.

11일 저녁 촛불집회가 열리는 성주읍 평화나비광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촛불집회에 먼저 나와 있던 김충환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공동위원장, 노성화 촛불지킴이단장 등과 인사를 나눴다. 생중계를 통해 봐왔던 터라, 히사시 씨는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평화위원회가 발간하는 신문을 꺼냈다.

그는 3월에 다녀간 평화위원회의 활동이 담긴 기사와 자신이 연재 중인 ‘이웃나라’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히사시 씨는 매달 평화신문에 한국의 소식을 전하는 ‘이웃나라’ 코너를 연재하고 있었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에는 계속 사드 관련 소식과 박근혜 탄핵 이야기를 다룰 수밖에 없었다며 웃어 보였다.

▲촛불집회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는 히사시 씨.

발언과 공연이 펼쳐지는 촛불집회와 달리 그날은 영화 <파란나비효과>를 상영하는 날이었다. 파란나비효과를 꼭 보고 싶었다며, 돌아가서 평화위원회 회원들에게도 이야기해줄 거라고 했다. 이재동 성주군농민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촛불집회 시작을 알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알리자 히사시 씨도 일어나 팔뚝을 들었다. 그는 집회에 참석한 여느 성주군민처럼 팔을 흔들며 노래를 함께 불렀다.

촛불집회 끝 무렵 히사시 씨는 평화나비광장 무대에 올라 “사드가고 평화오라”를 함께 외쳤다.

제국주의 침략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도,
한국어 배워 이웃나라 아픔에 공감하고 싶었다
일본에 돌아가 성주 사드 반대 투쟁을 전하다

성주군민 10명 정도가 참석한 가운데 히사시 씨와 작은 간담회 자리가 마련됐다.

▲이재동(왼쪽), 이국민(오른쪽)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우에하라 히사시(가운데) 씨.

히사시 씨는 “사드가 성산포대에서 소성리로 옮겨가면서 군수가 생각을 바꾸고도 성주에서 아직도 많은 인원이 함께 투쟁하고 있는 비결이 궁금하다”고 물었다.

이재동 회장은 “성주 주민들이 자발성을 가지고 참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투쟁을 시작하면서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소파협정과 주둔군협정 등 여러 문제를 배우게 됐다. 이길 때까지 싸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성주군민들이 물었다. 홀로 성주까지 찾아온,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이 궁금했다.

히사시 씨는 “평화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제국주의는 과거 조선을 침략하고 많은 아픔을 줬다. 제가 과거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도, 한국말을 배워서 이웃나라의 아픔에 공감하고 싶었다”고 말했고, 같이 박수를 치며 간담회를 마쳤다.

숙소를 안내해주고, 그와 헤어졌다. 그는 다음날(12일) 소성리 수요집회, 성주 평화음악회까지 참석한 다음 13일 성주를 떠났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17일 메일 한 통을 보내왔다.

▲7월 16일 주일미군 요코타기지 철거 100차 집회에 참석한 히사시 씨는 성주에 다녀온 이야기를 전했다. [사진=우에하라 히사시]
그는 16일 도쿄도 다마 지역에 있는 주일 미군 사령부인 요코타기지(横田基地) 철거를 촉구하는 100번째 집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500여 명이 참석한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히사시 씨는 “성주에 갔다 왔다, 성주 사람들은 한국 전국의 미군기지로 인해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하고 연대하고 사드 철회 운동을 펼쳐가자고 하고 있다, 우리도 열심히 하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소감을 부탁한 기자에게 그는 짧은 편지를 보내왔다. 평화에 국적은 없었다. (관련 기사=[기고] 사드 반대 운동을 벌이는 성주를 다녀와서 /우에하라 히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