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애인 생존의 대안이 수용시설일 수는 없다 / 전근배

방침에 어긋나는 신규 장애인 시설 신축을 허가한 대구시와 북구청

15:22

다시 장애인 시설이 논란이다. 대구시는 2009년부터, 가까이는 2014년부터 기존 시설 거주인의 탈시설 지원과 신규 시설 설립 금지를 방침으로 정해왔다. 하지만 해인복지재단이 지난해 북구 구암동 일대에 신규 장애인 시설 설립을 신청한 데에 북구청과 대구시가 이를 허가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착공을 앞두고 해당 복지재단을 이용 중인 부모와 지역 장애인당사자 단체 간의 입장이 갈리고 있다. UN장애인권리협약을 비롯한 각종 인권법과 지방정부의 정책기조에 어긋나는 행정에 지역 단체들이 설립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열자, 재단 부모회에서는 조속한 설립을 촉구하는 찬성 집회를 개최했다. “더 이상 수용시설에 우리를 가두지 말라”는 구호와 “거주시설만이 살길이다”는 외침이 시간차를 두고 시청에 울려 퍼졌다.

▲지난 8월 4일, 420장애인연대는 기자회견을 열고 신규 시설을 허가한 대구시와 북구청을 비판했다.

지역 언론 다수는 이를 신규 시설 설립을 둘러싼 찬/반 대결 구도로 보도하고 있다. 천주교대구대교구가 저지른 희망원 인권유린 및 비리 문제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매일신문>이 ‘합리적 해법을 찾자’며 사설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수용시설이 가장 합리적인 대안으로 만들어져 온 이유를 짚지 않은 채, 시설만이 장애인 생존의 유일한 길이 되어온 원인을 짚지 않은 채 양비/양시론적 시각으로만 사안을 다루는 것은 무책임함의 가장 편안한 표현일 뿐이다.

두 장면이 있다. 최근 광주의 한 30인 이하 소규모 시설에서 인권침해 및 비리 정황이 또 드러났다. 법인 후원금과 시설 보조금을 유용하고, 장애인의 개인 금전을 사용하는가 하면, 직원들의 개인적인 세차, 세탁 등 부당노동을 강요했다. 곰팡이 핀 빵을 주거나, 어떤 처방도 없이 정신과 약물을 투여하는 등의 인권침해 사건이 광주시를 통해 확인됐다.

이 시설에 거주하고 있던 장애인들은 다름 아닌 ‘도가니’사건 피해자들이었다. 임시보호조치로 옮겨간 시설에서 또다시 인권침해를 당한 것이다. 이들은 시설장이 교체된 시설에서 계속 살거나 다른 시설로 이주될 것이다. 대다수 시설 내 인권침해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현실이다. 피해도 시설에서, 대안도 시설에서 찾는다.

또 한 장면. 2013년 한 아파트에서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던 50대 중증장애인이 모친이 외출한 사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2015년 시설에서 생활하던 장애인 언니를 데리고 나와 같이 살고자 했던 20대 여동생이 부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식당 주차장에서 목숨을 끊었다. 2016년 기초생활수급비로 살아가던 30대 여성이 생계난으로 자신의 지적장애 자녀를 목 졸라 살해했다. 모두 대구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많은 이들은 애석하다고 동정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진즉 시설로 보냈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를 어디에서 받든, 그 대안은 시설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복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시설물을 떠올린다.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봉사하는 직원들과 시민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한국전쟁 이후 국가가 장애인복지를 비롯한 대다수 복지시스템을 시설 중심으로 구성해 온 탓이다. 집중적인 지원을 필요로 하는 대상자들을 분리시키고, 집단으로 수용하고, 그 안에서 관리하는 방식이 강화되어 온 결과이다. 어느 순간 장애인들은 살기 힘들면 시설로 가는 것이 당연한 존재, 시설에 있는 것이 당연한 존재가 됐다.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살길을 찾고자 하는 것과 지역이 아닌 시설에서라도 가족 이후 살아갈 방법을 구하고자 하는 것. 겉으로는 찬/반의 문제로 나타날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시설만이 해답’이라 종용해 온 국가와 시민사회, 법인운영자와 그 가족의 카르텔이 존재한다.

국가에게 수용시설은 행정‧예산상 비용을 절감하는 방편이었다. 비장애인 시민들에게 시설은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문제시되는 사람들을 분리시킴으로써 평안할 수 있는 해결책이었다. 시설운영자들에게 시설은 국가적 지원이 탄탄한 대표적인 복지사업이었기에 손쉽게 설립하고 사유물로 취급할 수 있었다. 국가도, 시민사회도 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는 가운데, 시설이 아무리 온갖 인권침해와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 해결책은 역시 시설뿐이었다.

가족들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집단생활에서 오는 자잘한 인권침해는 감내하며 살거나, 지역에서 알아서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시설의 동조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한국은 단 한 번도 시설수용 정책을 축소한 적이 없다. 보건복지통계연보에 의하면 2001년 203개소(17,720명 수용)이었던 시설이 2011년 490개소(25,265명 수용)로 대폭 늘어났으며, 2014년부터는 600여 곳에 육박하고 있다. 정부나 시설운영자가 주장해 온 시설의 소규모화는 이루어진 적 없다. 오히려 ‘소규모’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로 수용시설만이 더 설치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중증장애인들이 더 보호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보건복지부 예산 중 장애수당 부분으로 살펴보면 2016년 전체 시설거주인 중 3~6급에 해당하는 경증장애인의 비율이 50.4%였던 반면, 2017년에는 57.7%로 증가했다. 중증장애인의 비중은 49.6%에서 42.3%로 하락했다. 기존 시설 대부분은 중증장애인 입소를 환영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규모화를 추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설의 집단 관리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손이 없는데, 손이 가는 사람이 더 들어오면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이 갈 곳은 시설밖에 없다고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시설은 중증장애인에게 가장 적합하지 않은 구조이다.

미국의 발달장애 전문가인 제임스 콘로이 박사는 ‘시설 대 지역사회’라는 논쟁은 “이미 결론 난 문제”로 일축한 바 있다. 인권침해 사건으로 1970년대 폐쇄된 장애인거주시설 펜허스트에 수용되었던 발달장애인 1,154명 전원의 지역사회 복귀과정을 14년간 추적한 종단연구로 유명해진 그는 당연한 결론을 얻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가 얻은 결론은 단순했다. 시설에서 나온 모든 장애인의 삶의 질이 결과적으로 높아졌다는 것, 비장애인 시민들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장애인 당사자의 일상은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것, 중증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돌봄이 더 많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 따위이다.

지금의 문제는 찬/반이 아닌 생존과 부양의 책임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시설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국가적 부양이 필요하다는 요구와 같다. 탈시설은 국가적 부양 방식이 수용시설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번 신규 시설 신축에만 8억 원이 소요된다. 매년 그만큼의 비용이 운영비로 투여될 것이다. 대구시와 북구청은 국가적 부양을 요구하는 해인부모회 가족들의 자녀 당사자들에게 안정적인 주거지와 24시간 돌봄지원을 비롯한 지원시스템 마련을 약속해야 한다. 장애인이 태어난 곳이 시설이 아니듯, 그 대안이 수용시설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