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4차 산업혁명? 문제는 기술전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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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격주 수요일마다 ‘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를 연재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테크놀로지의 폭주는 우리의 삶을 뿌리째 바꾸고 있습니다. 미래가 현재에 들어와 있고, SF가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 기술산업문명이 만들어낸 기괴한 풍경 속에서 대안과 전환을 모색해 봅니다. ]

최근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논란이 뜨겁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낯선 용어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어느새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산업과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 문화, 교육 등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부터 4차 산업혁명을 국가 차원의 미래 비전으로 삼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일어난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임명과 낙마 사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새 정부가 향후 과학기술정책을 추진해 나갈 인사로 임명한 박기영 교수는, 과학기술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임명 며칠 만에 결국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 역사상 전대미문의 파문을 일으켰던 ‘황우석 사태’에 연루된 인사라는 것이 사퇴의 결정적 사유가 되었지만, 이번 사태에는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숨겨져 있다.

박기영 교수는 노무현 정부에서 과학기술정책을 추진했던 경력이 있고, 이번 정부에서도 대선 과정부터 과학기술정책 입안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박기영 교수가 새로 펴낸 책이 바로 <제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경쟁력>이다. 이 책은 대통령 선거 다음 날 출간되었으며, 이 책 추천사를 후보 시절 문재인 대통령이 썼다는 사실은 현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방향과 박기영 교수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문제는 박기영 교수의 이 같은 ‘4차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경쟁력 위주의 과학기술정책 방향이, 생명공학기술 육성을 국가 과학기술정책의 핵심과제로 삼았던 시기의 황우석 사태와 미묘하게 겹치면서, 관련 학계나 언론, 시민사회의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아직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나 합의가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념과 전망조차 불투명한 4차 산업혁명을, 국가경쟁력 위주의 과학기술정책으로 삼겠다는 것은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이었다.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부터라고 하니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 일이지만, 이를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삼은 것은 2011년 독일의 ‘인더스트리 4.0(Industry 4.0)’으로 보아야 한다. 독일의 경우 자국의 제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혁신과 변화가 필요했고, 기존 산업과 ICT(정보통신) 기술의 융합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산업 모델을 정책적으로 추진한 결과가 바로 ‘인더스트리 4.0’이었다. 이 같은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은 제조업 혁신에 가까운 개념으로 출발했으며 지금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고 있다.

그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인공지능(AI), 로봇, 사물인터넷(IoT), 3D프린팅, 나노기술, 바이오테크놀로지 등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은 4차 산업혁명 논의 확산의 밑바탕이 된다. 4차 산업혁명의 전도사, 클라우스 슈밥이 의장으로 있는 세계경제포럼(WEF, 다보스포럼)에서 2016년 본격적으로 논의된 이후, 우리사회에도 거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세돌-알파고 대국의 충격 이후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증폭되면서 4차 산업혁명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함의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4차 산업혁명이야말로 앞으로 우리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관점이다. 기술의 혁신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이미 널리 퍼져 있는 낙관적 전망과 더불어 저성장 시대에 새로운 성장 모델은 결국 산업과 기술의 융합으로 만들어내는 4차 산업혁명뿐이라는 당위성을 내세운다. 이러한 관점에는 국가와 사회, 혹은 개인이 이러한 흐름을 결코 거부할 수 없으며, 이를 등한시할 경우 경쟁의 대열에서 영원히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도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맹신에 가까운 논리에는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기술의 속성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인공지능, 로봇을 위시한 새로운 기술은 그 속성상 인간의 ‘배제’와 ‘불평등’을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까지도 인간의 노동은 지속적으로 기계나 기술로 보완되고 대체되어 왔지만,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될 테크놀로지의 신세계는 이미 이전과는 결코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잠재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나 레이 커즈와일과 같은 이름난 사람들의 거창한 주장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전혀 다른 세상을 펼칠 것이라는 ‘특이점’의 도래가 결코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주도적 그룹에서조차, 급격한 기술 발전이 가져올 위험과 그늘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현실을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기계와 기술로 대체되는 ‘노동의 종말’에 대해서는 로봇세나 기본소득으로 이를 보완해야 한다는 논의가 세계적 IT 기업의 허브,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올해 열린 ‘2017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한 의제로 다뤄졌다. 불평등 지수의 상징으로 1990년대 중반에 명명되었던, ’20:80’ 사회는, 불과 20여 년 만에 ‘1:99’를 넘어 ‘0.1:99.9’의 전망조차 불투명한 상태로 이미 진입해 있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4차 산업혁명이란, 어쩌면 ‘노동의 종말’과 ‘불평등’의 다른 이름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은 ‘4차 산업혁명’을 실체가 없는 허구로 보는 관점이다. 좀 더 나아가면 자본이나 정치권력의 거짓 선동이나 유행어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까지 존재한다. 얼마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주최한 토론에서 홍성욱 교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정치적 유행어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기초과학과 핵심기술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태웅 교수도 ICT기술 중심의 4차 산업혁명 논의가 과학기술 정책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외에도 최근 들어 4차 산업혁명이 지닌 개념의 모호성, 실체의 불확실성을 중심으로 그 허상을 비판하는 논의가 관련 학계를 중심으로 차츰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4차 산업혁명을 마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힐 필연적인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역량을 총동원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적절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한다. 개발독재시대의 논리와 하등 다를 것 없는 ‘4차 산업혁명 동원 체제’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경제성장제일주의를 앞세운 산업사회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황폐하게 만든 근본적인 요인이었다는 점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러한 비판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주장하는 일부의 논리 중에는, 기술 발전의 급진성과 위험에 대해 지나치게 평가절하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 전개될 기술의 변화가 지금까지의 기술 발전의 흐름과 별반 차이가 없다거나 그 연장선에 있으며 기술 발전이 가져올 위험과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실제로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들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의 기술이 가져올 위험은 기술비관론자들이 전망하는 것처럼 그리 심각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개입 없이는 기술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결과적으로는 기술낙관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는 점에서 4차 산업혁명을 옹호하는 논리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4차 산업혁명의 모호한 개념과 불분명함을 비판하거나 자본과 국가의 일방적 독주를 견제하면서도 기술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낙관하거나 긍정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결국 동일하다. 지나친 낙관론과 비관론 양자를 모두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급격한 기술 변화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대안을 모색하는 일에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간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가 인간의 지혜로운 통제나 관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기술전체주의와 시민의 민주주의적 통제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논란은, 기술이 사회 변화를 견인하고 압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른 관점과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기술이 더 이상 사회변화의 종속변수에 머물러 있는 세상이 아니다. 지난 세기 가장 탁월한 정치철학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근대를 만들어낸 ‘근본악’으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전체주의에 주목했다. 아렌트가 말한 ‘근본악’이란,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모든 것을 자기 통제 아래에 두고, 오히려 인간을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을 뜻한다. 아렌트의 이 같은 분석은 당시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급진적 테크놀로지 사회에 더욱 명징하게 부합하는 언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은 불행히도 앞으로 더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보의 무한 유통과 공유 확대, 네트워크의 확장과 공론장 형성, 참여와 소통의 직접성 등 디지털 시대의 민주적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기술의 혁명적 발전은 이러한 네트워크 민주주의의 가능성도 함께 열었다. 하지만 디지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바람은 아직까지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SNS혁명으로 일컬어지던 ‘아랍의 봄’은, 반혁명의 거센 물결을 견디지 못하고 혁명 이전보다 더 악화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디지털 기술이 민주주의 혁명을 촉발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결국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은 사람의 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사례다. 우리도 이 같은 사실을 지난겨울 촛불을 들고 마주했던 사람들과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

기술전체주의가 더욱 더 강고해 가는 시대에 어쩌면 우리가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기술발전과 사용에 관한 시민의 민주주의적 통제를 확보하는 일이다. 최근 탈핵과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 시민의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기술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야 한다. 탈핵문제에 관해 덴마크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에서 부분적으로 보여준 시민의 직접 참여와 숙의민주주의 결정 과정은 과학기술의 통제에 관한 민주주의적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 개발과 사용에 관해 우리가 따라야 하는 유일한 준거는 바로 시민의 공공성이다. 그리고 시민의 공공성은 민주주의로만 확보된다. 인간의 존재성을 위협해온 극단적 기술의 무한 발전은 자본과 국가주의 논리에 충실한 결과였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핵심 기술 중에는 우리가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분명 존재한다. 시민사회의 성숙과 민주주의만이 이를 통제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싼 논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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