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9)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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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도취의 피안」에 대해서 염무웅은 “앙상한 논리보다 풍부한 이미지와 비유로써 이루어”져 “가장 시다움을 느낀다”(「김수영론」)고 한 적이 있다. 과연 김수영의 적지 않은 작품들은 현대시에 훈련이 어지간히 된 독자들에게도 쉽게 다가오지 않을 만큼 복잡한 논리가 내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김수영이 논리로 시를 썼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하는 데 있어 치밀하게 산문적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김수영의 시에 논리가 살아 있다면 그러한 현실 인식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가장 시다움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도취의 피안」이 읽기 편한 작품은 아니다.

내가 사는 지붕 위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 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 수 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위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위에서 솔개미 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 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 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국 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가는 몸 위에 하잘것없이 앉아 있으면 고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고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 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오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彼岸)에서 날아온 날짐승들이여

_ 「도취의 피안」 전문

이 작품은, 그 뜻이 명료하지 않다 하더라도, 흐름과 호흡이 자연스럽고 유장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의 뜻이 명료하지 않은 것은 김수영 시의 일반적 특징인 바 이 은폐 전략에 무릎 꿇기 시작하면 우리는 김수영의 시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남진우는 「김수영의 시간의식」1에서 김수영의 50년대 시를 일컬어 “데뷔 무렵부터 50년대 후반까지의 초기시에선 자기 세계를 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눈길을 끌며 시적 제재로는 6·25 전쟁이나 전후의 피폐한 현실이 자주 채택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남진우는 특히 「달나라의 장난」을 분석하면서 “일상이 물이나 바람 같은 액체-기체의 유동성과 수평적 흐름으로 드러난다면 ‘서 있음’은 이러한 존재 조건을 거슬러 수직적 초월을 꿈꾸는 태도를 의미한다.

직립의 수직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상에서 벗어나 천상을 지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폭포」에 대해서는, “이 작품은 존재의 소멸과 그것을 통한 수직적 초월의 가능성을 직핍하게 드러내고 있다”면서 「폭포」의 “곧은 소리”가 “시각적 어둠 속에서 청각을 통한 초월의 부름이 현전한다”고 했다.

그러나 1950년대의 김수영 시에 대한 남진우의 이런 해석은 김수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혹 남진우 자신의 자기분석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자의적이다. 단언컨대 김수영의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진우의 해석과는 달리 ‘초월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반대로 김수영의 시정신은 언제나 현실 내재적이었고, 내재적이었기에 비판적이었다.

‘초월성’과 ‘내재성’의 대비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구분선을 만든다. 들뢰즈는 「플라톤과 그리스인들」2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플라톤을 비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모든 사람이 이처럼 아무것이나 주장한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비난했다. 물론 플라톤은 이때 경쟁자들에 대한 새로운 선별 기준을 복원하려는 의도 아래 비난을 가했으며, 따라서 그는 (비록 그가 다른 곳 [예로서 『파이드로스』와 『정치가』]에서 신화의 특수한 기능을 부여하며 그것을 이용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황제의 초월성이나 신화적인 초월성과는 완전히 다른 초월성을, 말하자면 내재성의 장 속에서 작동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선별을 위한] 초월성을 세워야만 했다. 이데아 이론이 갖는 의미란 정확하게 이것을 말한다. 이처럼 초월성을 철학에 물고 들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초월성에 그럴듯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플라톤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독이 든 선물인 것이다.(21~22)

다른 말로 하면 ‘초월성’은 어떤 구체적인 사실(일테면 아테네의 민주주의) 바깥에 또 하나의 기준을 구축하는 일이며, 실재하지 않는 환영인 이 기준이 하는 일은 현실의 사건과 의미들을 위계화하는(이데아-모사물-시뮬라크르) 데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화화된 권력의 다른 이름이다. 권력은 언제나 지금-여기의 사건들을 해석해 새로이 인식하기보다는 초월적인 기준을 통해서 심판하는 속성이 있다. 남진우의 1950년대 김수영 해석이 우익적인 것은 이렇게 ‘초월성’ 자체에 보수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이며, 김수영과 ‘초월성’은 아무 상관이 없기에 자의적인 것이다.

다른 많은 작품들도 당연히 ‘초월성·외재성’과의 무관성을 입증하고 있지만 「도취의 피안」은 더욱더 직접적으로 그것을 항변하고(?) 있는 작품이다. 먼저 이 작품에서 “날짐승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해석되어야 한다. 산문적으로 풀어보면 “날짐승들”은 시적 화자를 취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나아가, 마치 오디세우스를 유혹했던 사이렌처럼 “조그마한 그림자”만으로도 시적 화자를 “벌벌 떨고” 있게 하는 존재이다. 그런 “날짐승”에 대해서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고 한다. 왜냐하면, 시적 화자는 “날짐승”의 매혹에 취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의 전체 내용에 의하면, 그리고 “취하지 않으련다”의 반복은, 역설적으로 “날짐승”이 가진 강력한 마력을 드러낸다. 사람살이가 “말할 수 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내가 부끄러운 것은” 그 사람살이보다도 “저 날짐승”들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날짐승”이 상징하는 것이 시적 화자를 심리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괴롭히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시적 화자의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다. 이 말은 “날짐승”을 통해 “수치와 고민”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뜻도 되는데,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날짐승”보다 더 “사나운 놈”이 시적 화자의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4연의 “나의 얇은 지붕 위에서 솔개미 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있다다. 이 작품에서 “사나운 놈”의 구체적 형상은, “날짐승들”처럼 명확하지 않다. 정리해 보자면, 시적 화자는 “날짐승들”에게 매혹되지 않으려 애쓰며, 그 “날짐승들”은 시적 화자가 처한 현실에 노출되면 곧바로 위험에 빠지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시적 화자는 위험하고 불온한 상상과 구체적인 현실 사이에서 긴장 상태에 있다.

시적 화자가 “날짐승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한데, 5연의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 있을 운명—”은 그것을 환기시킨다. 시적 화자는 5연 1행에서 조금 더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표출하지만 “그것이” 지금 시적 화자의 주위에서 애처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고도 한다. 왜냐면 6연에서 보듯 “너는 날아가면 고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날짐승들”은 지금-여기에서 시적 화자와 함께 살 수 있는 ‘운명’이 아닌 것이다. 도리어 “날짐승들”은 시적 화자를 취하게만 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날짐승들”에게 차라리 자신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자 말아라”고 하는 것이다.

(김수영의 부인인 김현경의 증언에 의하면 김수영은 이 작품을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썼다고 한다. 이 증언은 “날짐승들”에 대한 시적 화자의 양가감정을 고려할 때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강력한 반공국가 체제에서 김수영이 ‘사회주의’를 상상하는 방식은 상징적 방법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짐승들”을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굳이 좁혀 해석할 필요는 없다. 4·19혁명 이후 일기장에서 김수영의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시인의 산문적 인식을 확인하는 일은 시를 읽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지만 산문적 층위의 인식과 시적 층위의 인식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도 동시에 유념해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나의 눈이랑 한층 맑게 하여다오”라고 한다. 이 구절이 사실 중요한 것은,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현실에서 살 수 없는 “날짐승들”을 생각하며 지금 시적 화자는 자신을 단련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수영의 다른 50년대 시가 현실의 복판에서 자기를 극복하고 나아가려는 힘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어야 할 “운명과 사명”(「달나라의 장난」)이 자신에게 있으니까. 이렇게 김수영은 피안으로, 유토피아로 초월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 점 때문에 김수영을 소시민적이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김수영이 자신에게 아로새기는 다짐은 “도취의 피안”으로 기울어지는 일이 아니라 “나와 나의 겨울을” 차라리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세계에 대해 내재적인 태도이지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재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김수영의 1950년대 작품에 대한 해석은 (작품의 성과와는 관계없이) 4·19 혁명 이후보다 더 입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텍스트들이다. 왜냐하면 1950년대는 전쟁을 겪을 김수영이 자신의 길을 치열하게 탐색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진우가 김수영이 “6·25 전쟁이나 전후의 피폐한 현실”을 “시적 제재”로 “채택”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의 해석은 김수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게 되어버린다.

왜냐면 김수영에게 “6·25 전쟁이나 전후의 피폐한 현실”은 “시적 제재”가 아니라 그의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1. 『살아 있는 김수영』(김명인·임홍배 엮음, 창비)
  2.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질 들뢰즈, 박정태 엮고 옮김, 이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