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0)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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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김수영이 보여준 치열한 시적 사유는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전쟁이 가져온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폐허 위에서는 더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에서의 패배가 예술적 승리를 낳는 장면을 역사를 통해 종종 확인하곤 한다. 아마 김수영도 그 예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 예술적, 정신적 지평을 구축하려는 모험은 부정적인 심리를 동시에 거느리게도 한다. 김수영에게 그것은 ‘설움’인데, 설움이란 일종의 슬픔으로서 모험이 강렬하면 갈수록 그 그림자로서의 ‘설움’도 깊어져 간다.

김수영은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1954)이란 시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비가 그친 후 어느 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설움을 역류하는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자신을 관조하면서,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은 이제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思想)마저” “초연히”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즉 김수영은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이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내는 의식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고 있다.

‘설움’이 풍기는 우울한 정조와는 달리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에서는 ‘설움’을 관조하며, 부정적인 정서로서의 설움을 통해 다른 시간의 끄트머리를 붙잡은 것이다. 혹은 붙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흐르는 시간”을 발견하였기에 이 작품은 돌연 설움을 돌파한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게 된 것은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히 나의 생활”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제 다른 “책을 열어보려” 하려는 것이다.

김수영에게 ‘책’은 언제나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는 입구 혹은 문턱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책”도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된다. 더군다나 그는 부정적인 정서로서의 “설움”도 그 자신의 시간이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부정적인 것을 버리고 긍정적인 것을 취하기는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변신시키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변신시키는 일’이라고 썼는데, 그 예가 되어주는 작품은 확실히 「거미」(1954)이다. 이 아름다운 서정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설움의 정서로 많이 읽힌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설움의 정서를 뱉어내는 시가 아니다. 먼저 김수영은 자신의 설움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바대로, 김수영은 참담한 현실에 대한 반작용을 통해 자기혁신을 감행해 왔는데, 다만 현실적 토대의 미비로 설움의 정서를 갖게 된 것이다. 이게 「거미」 1연이 깊게 품고 있는 속뜻이다.

그런데 돌연 2연에서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고 말한다. 아무런 인과적 설명은 없다. 왜일까? 시는 본래 그런 인과관계를 다 설명하지 않는 장르인데, 다만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김수영에게 설움은 예전의 부정적인 정서가 아니다. 이제 설움을 통해 “빈 방안에” “홀로이 머물러 앉아” 있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따라서 「거미」의 3연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는 설움의 극한을 표현한 것을 넘어 일종의 존재의 변신을 위한 죽음을 의미한다. 3연 1행에서 나타났듯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즉 설움을 회피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다고 김수영은 고백하고 있다. 「거미」를 읽으면 슬프다는 느낌보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김현경이 부산에서 돌아오자 “생활의 원주”(「너를 잃고」) 위에 서게 된 김수영은 빠르게 심리적 안정감을 찾아간다. 「나의 가족」(1954)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남진우는 앞에 인용한 글에서 “대상의 이면을 꿰뚫어보고자 하는 화자의 시선도 집이라는 이 피호성(被護性)의 공간에선 그 비판적 에너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들 속에 무력하게 동화되어버린다. 화자 또한 개별성을 상실한 채 바람과 물결 속에 휩쓸려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가족이 수행하는 동질화의 작용은 자아의 예민한 의식을 누그러뜨리고, 그의 개별성을 가족이라는 더 큰 그릇 속에 용해시켜버린다”고 비판한다.

물론 남진우의 비판은 작품의 표면만 읽은 오독에 지나지 않는다. 김수영의 시는 각 작품과 작품이 서로 겹을 이루며 이루어져 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김수영은 평생에 걸쳐 ‘거대한 한 편의 시’를 쓰고 죽었다. 왜냐면 그의 시는 현실로부터 받은 모욕과 수치와 설움을 철저하게 밀어붙이는 ‘온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한 편의 시’에서 그 한 겹만 떼 내어 읽으면 남진우 같은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수영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소시민’ 운운은 바로 이 한 겹을 그야말로 개별적으로 해석한 데서 오는 오해에 불과하다.

아무튼 「나의 가족」에서는 예의 그 예민한 인식이 무뎌진 건 사실이다. 도리어 2연과 3연에서는 김수영이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 듯처럼도 보인다. 3연 1행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장구한”은 뜻 그대로 ‘매우 긴’이 아니다. “장구한”은 양적 시간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질적 시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장구한”은 양적으로 많고 질적으로 심원한 사건이 구성한 시간을 말한다.

다시 전기적 사실에 기대 보면, 그야말로 김수영의 가족사는 슬픈 우리 근대사와 한 치 오차도 없이 겹친다. 그 사건들을 지나서 “많은 식구들이” 모인 것이다. 김수영은 이제야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고 안도한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여기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뼈아픈 역사를 김수영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고대 조각 사진”에서 받은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 우리 가족의 한 명 한 명, 아직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수강이와 수경이의 역사가 고대 조각 사진에서 느낀 위대함에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김수영은 한동안 잃었다고 생각했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느끼고 확인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고차원적이고 위대한 것이라기보다 이렇게 사소한 것이라는 어떤 감각을 그는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체적인 사랑의 현현을 담담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묻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안토니오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갈무리)에서 “가난과 사랑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당연하다. 에로스가 비참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다”고 쓴 적이 있다. 또 “가난 없이는 사랑도 없다. 가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160)고 말을 이었다.

「나의 가족」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래서 “개별성을 상실한 채 바람과 물결 속에 휩쓸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가족 각자의 개별성을 긍정하는 바탕에서 삶에서 펼쳐지는 구체적 사랑에 대한 감각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랑은 “비참의 아들”이 아니다. 가족 각자의 개별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비참마저 긍정할 수 있는 존재론적 가난 때문이다. 김수영처럼 첨단을 달리고자 하는 시인에게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는 의외의 인식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인식 이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며, 사랑의 구체성과 그것에 도달하기까지 달려온 “모든 가족의 입김”을 호명하는 찰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