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노상횟집 ‘코오롱’, 종필은 또 문을 닫았다 (1)

대구 수성구 목련시장 노점 정비로 바라본 노점 갈등
1년 6개월 이어진 수성구 목련시장 노점상 정비
20년 지켜온 시장서 하루 아침에 쫓겨난 노점상인들
믿어달라는 수성구와 믿을 수 없다는 상인들
고무줄 같던 수성구 노점 정책 20년····지켜봐온 상인들

17:03

[편집자 주=2017년 10월 13일, 수성구는 목련시장 노점상 철거를 위한 행정대집행을 진행했습니다. 길게는 30년. 짧게는 5년. 일생을 보낸 곳에서 노점상인들을 내쫓겼습니다. 2016년 4월 수성구가 거리가게 조례를 제정한 후 지난 11월 목련시장 노점상인들이 시장을 떠나 새로 자리를 잡는 과정은 40여년 이어져 온 대한민국 노점 정책의 허점과 노점 갈등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뉴스민>은 목련시장 시장 노점상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행정기관이 주도하는 노점 정책의 허점을 짚어보고자 두 편의 기사로 나누어 전합니다.]

“새댁아, 택시비 빼줄게, 이거 가지고 가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그날따라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알겠어요. 이럴 때 팔아줘야지” 최미숙(가명, 69)은 ‘새댁이’에게 무를 좀 더 팔았다. 지산동 무학터널 넘어 만촌동과 범어동, 황금동, 범물동, 지산동을 아우르는 야트막한 산, 두리봉 골짜기에서 직접 농사지은 무다. 택시비를 빼줬으니 거저 준거나 진배없다.

이렇게라도 해야 비 오는 날 장사 나온 이유가 설명됐다. 빗물 막아줄 지붕 하나 없는 노상에서 무를 파는 미숙은 비 오는 날 장살 나오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 무는 열무가 되기도 하고, 상추도 되었다가 부추가 되고, 배추도 된다. 남은 무는 남편을 불러 실어날랐다.

김영숙(가명, 61)은 비 오는 그날 장사를 나가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아침 일찍 늘 배추를 내놓고 팔던 자리로 나갔다. 새벽부터 같은 시장 노상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단체 메시지 방이 시끄러웠다. ‘이래 있어가 안 되겠다’ 영숙은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섰다.

전날 내린 비로 종이상자 밑바닥이 젖어 찢어졌다. 영숙은 찢어진 종이상자를 주워들었다. 종이상자를 치우고, 쌓아둔 배추도 치웠다. 다른 날 같으면 다른 종이상자로 바꾸고 전을 폈을 테다. 오전 9시 무렵, 붉은 모자를 쓴 사람들이 영숙과 미숙이 장사하던 곳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길 위에 남은 물건을 치웠다. 언제 비가 왔나 싶을 만큼 날은 쨍하게 맑았다.

장종필(54)도 비 오는 그날 장사를 나가지 않았다. 오후 3시 무렵 바쁘게 형순조(63)를 만나러 시장으로 나갔다. 전날 모여 결정한 걸 다시 논의해야 했다. 결정은 자주 바뀌었다. 그저께 했던 결정을 어제 바꿨는데, 오늘 다시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째야 되겠능교?” 한숨과 함께 종필은 물었다.

▲목련시장

*

시장으로 향하며 종필은 옛일을 떠올렸다. 어렴풋했다. 2009년인지, 2010년인지 정확하지 않다. “김형렬 구청장 임기가 얼마 안남았을 때라” 그 언저리에 종필은 쫓겨났다. 그보다 10년 더 앞서 종필은 한 번 더 쫓겼다. 1998년, IMF 경제위기가 덮쳐왔고, 친구 둘과 함께 차린 공장이 휘청였다. 공장을 청산하고 쫓기듯 대구로 왔다. “대구가 고향은 아닌데···(현대) 자동차 다니다가 그만둔 건만 해도 욕 얻어먹을 일 아인교? 예?”

처(妻)가 대구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수성못이 가까운 파동에 처가가 있다. 수중에는 800만 원이 조금 웃도는 돈이 남았다. 처가 옆에 사글세방을 얻었다. 월 10만 원. 100만 원을 냈다. 700만 원이 남았다. 200만 원을 선지급하고 1톤 트럭을 샀다. 부족한 돈은 36개월 동안 나눠 내기로 했다. 500만 원이 남았다. 칼, 도마, 수조를 샀다. 트럭은 노상 횟집이 됐다.

“솔직히 안 있능교, 예? 어느 놈이고 돈 있으면 노점 생각 안 합니다. 내 돈 있으면, 예? 노점부터 생각 안 해요. 여유 있으면 상가부터 얻으려고 하지, 예? 어느 사람이고 노점 안 해요”

낯선 도시 지리부터 익혔다. 1톤 트럭을 몰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목 좋은 장소도 물색했다. 집을 나서 큰길을 따라 상동네거리를 지나고, 중동네거리도 지나고 계속 직진하면 대구은행본점네거리가 나왔다. 대구은행 본점 너머로 갓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었다. “거가 원래 코오롱 공장 부지 아인교? 그래서 내 간판도 코오롱이라. 그때는 부자 아파트라고 안했능교. 내 처음 갔을 때 보성, 화성 두 개밖에 없었어”

3만5천여 평, 코오롱이 1957년부터 자리 잡은 대규모 공장부지는 1993년 김천으로 이전하면서 주택단지가 됐다. 쌍용건설, 화성산업, 보성주택 같은 대형 건설사들이 1994년부터 아파트를 올렸다. 1996년 5월 수성보성타운이 가장 먼저 들어섰다. 이어 우방사랑마을, 수성화성쌍용타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 잡았다. 종필의 1톤 트럭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노상 횟집 ‘코오롱’이다.

매일 새벽 ‘코오롱’과 함께 포항 구룡포로 달렸다. 80마리 내지 100마리, 오징어를 떼다 회를 쳤다. 3마리를 만 원에 팔았다. 구룡포 오징어값은 그날그날 달랐다. 태풍이 와서 배가 안 뜨면 종필도 장사를 쉬었다. 2년간 오징어만 취급하다가 품목을 늘렸다. 가을엔 전어도 취급하고, 우럭도 회쳤다. “한 1년은 뭐 아나? 소문이 나야 될 거 아닌교? 예? 1년은 안 됐어. 와이프랑 둘이 했거든요. 둘이 밥벌이도 안 됐어”

“이래가 안 되겠다. 니는 다른 데서 좀 해봐라” 종필은 처에게 따로 도마와 물 받을 대야를 마련해줬다. 파동 집에서 ‘부자’ 아파트 단지로 가는 길 중간에 작은 시장이 하나 있었다. 현대시장이라고 했다. 적당하게 해봄 직했다. 현대시장 한 곳에 물 받을 대야 두, 세 개 내리고, 도마 내려주고, 물을 받아 그날 회감을 준비해줬다.

▲장종필 씨가 수성구청 앞에 게시된 현수막을 살펴보고 있다.

그렇게 1~2년. ‘부자’ 아파트에 ‘코오롱’ 횟집 소문이 났다. 오징어 3마리 만 원, 전어, 우럭은 kg 당 만 원, 광어는 1만8천 원. 집에서 소주 한 병 먹을 수 있는 만 원짜리 안주를 사람들은 줄 서서 기다렸다.

“전어 만 원치 주소”
“아이고, 예? 한, 한 시간 반은 기다려야 되겠는데요”
“그리 해주소, 기다리면 되지”
“예? 안 지엽습니까?”
“회 치는 거 보니까 재밌네요. 시간 잘 가네요”

전어철에는 화장실 갈 시간 없이 바빴다. 손님들도 한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렸다. 주문하고 다른 곳에 다녀오는 사람도 많고, 한참을 트럭 앞에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현대시장에 따로 물을 대줬던 처도 합세해야 할 정도로 바빴다. “그때는, 예? 돌땡이 놓고 팔아도 다 팔린다 안 캤능교. 시절 좋았지”

* *

미숙과 영숙도 ‘호시절’을 떠올리면 격앙된다. 미숙은 1991년부터, 영숙은 1992년부터 지산동 목련시장에서 노점을 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남은 노점상 중에선 고참이다. 그 무렵 시장 주변으론 목련아파트(1986년)를 따라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산시영 1단지(1989년)가 들어서고, 지산현대맨션, 지산에덴타운(1990년)이, 지산시영 2단지, 지산영남맨션, 지산화성맨션(1991년)도 들어섰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용지초등학교가 문을 연 게 1991년 9월, 목련시장으로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땐 장사 잘 됐지” 영숙은 말했고, “백화점이 있나, 농협이 있나. 시장은 쪼그마치. 장사꾼도 그리 안 많고, 장사 잘 된다 소문나서 다른 데서도 오고 그랬지” 미숙이 받았다. 전성기 시절을 회고하는 운동선수 마냥, 조금은 들뜬 목소리다.

▲목련시장 앞 노점(왼쪽)이 늘어서 있는 모습.

김연수(가명, 56)는 “딸래미가 여섯 살 때부터” 목련시장 큰길 사거리 지산시영아파트 방면 모서리에 자리 잡았다. 딸은 이제 스물여섯, 어엿한 숙녀가 됐다. 남편과 함께 매천시장에서 과일을 떼다 팔았다. 자리 잡은 김에 집도 이곳으로 옮겨버렸다. 여섯 살 난 작은 딸을 범어동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다.

“엄마 배달 있는데, 니가 여 앉아 있을래, 니가 배달 갈래?
“엄마, 됐다 그럼. 내가 배달해주고 집에 들어갈게”

딸은 이제 엄마를 대신해 손님을 응대하기도 하고, 단골 손님에겐 직접 물건을 전달해줄 정도로 자랐다. 딸이 자라는 동안 남편은 경주로 농사일을 배우러 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도매시장에서 떼온 과일을 내다 팔아선 마진이 남지 않았다. 네 식구 생계가 걸린 일인 만큼 설렁설렁할 순 없었다. “학비는 몇백씩 내야 되재. 힘들지, 아덜 아빠 주변에 그리 나가서 하는 사람이 좀 있거든요. 그래 나간 게 시초였어”

남편은 10년 전부터 남의 땅을 빌려 직접 사과 농사를 짓는다. 상품성이 있는 사과는 도매시장으로 나가고, 도매로 넘기지 못하는 사과는 연수가 들고 나왔다. “농사짓다 보면 시장 못 가는 게 더 많아요. 여서 이래 5천 원씩 팔면 팔리는데···사는 사람은 저렴하고 나는 팔아서 좋고” 20년 세월, 연수는 명절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간혹 여든을 넘긴 노모가 상주에서 둘째 딸을 도우러 목련시장을 찾았다. “저그 아부지도 큰딸은 자꾸 바래도, 자(연수)는 안 바래요. 먹고 사느라 바빠가지고 하도 안 옹께” 목련시장에서 산 세월이 20년, 독하게 버텼다.

목련시장에서 자리를 지켰던 노점상은 대부분 이곳에서 20년가량 장사를 했다. 미숙, 영숙, 연수처럼 목련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해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기에서 얼마나 장사 하셨어요?” 라는 물음에 머리가 허옇고, 손마디가 굵은 할머니들은 저마다 “한 20년”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노점상 27명에게 나이와 영업 기간을 물었을 때, 평균 나이는 65.9세, 영업 기간은 18.8년(‘한 20년’은 20년으로 추산)이었다. 70대 이상 고령자만 10명이고, 이 중 한 명은 80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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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 장사하면 안 돼요”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농협이 마트를 열었고, 중대형 마트도 들어섰다. 마트 앞 인도에서 장사하던 노점이 사라지면, 마트가 그 자리를 차고 들어왔다. 초등학생 축구 경기에 고등학생들이 선수로 나온 형국이었다. ‘불법’이라는 딱지도 시간이 갈수록 진해졌다.

구청 단속조는 관할 영역을 순회하면서 장사를 못 하도록 감시했다. 한 번 단속하는 날이면 물품을 다른 곳에 옮겨다 놓고, 그들이 퇴근하길 기다렸다. “퇴근할 시간 되면 우리가 다라이(대야)를 이래 쓱, 내놓으면 모른 척 하고 갔다고” 옛날엔 ‘유도리’가 있었다고 미숙은 말했다.

종필은 반대로 구청 단속조가 퇴근하는 시간에 숨었다. ‘부자’ 아파트는 단속조가 구청으로 복귀하는 길 중간에 있었다. “4시나 5시 되면 와서 걷으라 하는 기라. 빨리 걷는 사람 있고, 늦게 걷는 사람 있고 안 그런교? 예? 다 치우는 거 보고 간다니까. 가고 나면 숨어 있다가 다시 펴고. 예? 그런 걸 반복했다니까”

1980년대부터 노점 단속 문제는 전국적으로 사회문제화됐다. ASTA 총회, IOC국제회의, 86아시안게임 등 국제행사를 개최하는 일이 늘었고, 깨끗한 미관을 위해 정부는 노점을 폭력적으로 철거했다.1 종필이 부자 아파트에서 쫓겨날 때는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였다. 수성구는 2007년부터 노점 정비를 시작했다.

“대구시가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지 결정을 위한 국제육상연맹(IAAF)의 대구 현지 실사(22~24일)를 앞두고 동구와 북구, 수성구 등 IAAF 실사단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노점상과 노상 적치물을 모두 정비키로 했다. (중략) 각 구청은 지난 12일부터 노점상의 자진 철수를 홍보한데 이어 20일부터 노점상의 영업을 막고 있다. 노점상 자리에는 대형 환영 현수막과 배너, 깃발, 애드벌룬, 꽃탑 등이 설치된다”2

중구는 2008년부터 대대적인 동성로 노점 정비 사업을 시작했다. 크든 작든 각 지자체는 관내 노점 정비를 실시했고, 노점상인들은 싸우거나 싸우다 쫓겨났다. 종필은 부자 아파트에서 내쫓긴 시기를 2009년 9월 무렵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윤 대리였는지, 박 대리였는지 정확치 않은 수성구 건설과 직원이 계고장을 남기고 떠났다.

“장 사장은 우짤낀고?”
“행님은 어쩔껍니까?”
계고장을 받아든 노점상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여서 이럴게 아니라,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 하입시다”

부자 아파트 앞에서 노점을 하던 상인 10여 명이 식당에 둘러앉았다.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철 따라 과일도 팔고 옥수수도 팔던 형님과 종필이 이야길 주도했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먹고살게 해달라고 호소해보고, 구청에도 찾아가 사정해보자고 결론냈다. 종필이 실무를 도맡았다. 집회 신고를 내고, 인연이 있던 기자에게 관심도 부탁했다. “절박한 사람이 나서야 안 되겠능교? 내가 절박하니까, 답다우니까” 확성기를 들고 높은 아파트에 대고 먹고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수성구청을 찾아가선 면담을 요청했다. 하루는 담당 계장이 만나줬다가, 다음 날엔 과장이 만났고, 그다음엔 국장이 만나줬다. 구청장은 만나볼 생각도 못 했다. 사정과 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20여 일 만에 사람들은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종필도 큰 도로를 버리고, 작은 길로 찾아들었다. 손님은 작은 길까지 찾아들지 않았다. 노상 횟집 코오롱을 멈췄다.


▲이젠 목련시장에서 볼 수 없게 된 것들. 3천 원~만 원까지, 각양각색 목련시장 노점상인들이 취급하던 품목들.

(이어서 계속=20년 노상횟집 ‘코오롱’, 종필은 또 문을 닫았다 (2))

  1. <도시공간과 노점상의 권리에 관한 연구> 김준희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 2011
  2. 실사단 가는 길, 노점상은 비켜라? <매일신문> 2007.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