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랏자라또의 『사건의 정치』를 읽고/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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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맑시즘은 낡은 것이 되었다.
맑스주의는 다양체의 정치를 사고할 수 없다고 랏자라또는 말한다.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라는 계급적 대립 속에 다양한 주체성들을 밀어 넣었고, 가능성의 창조는 생산노동에, 다양한 특이성들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제한했다. 결국 맑스주의는 자본주의를 위한 시중을 들었던 것이다(218쪽).’

▲사건의 정치:재생산을 넘어 발명으로,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이성혁 옮김, 2017년 10월 31일, 갈무리

나는 맑스주의를 잘 모른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를 이항대립의 낡고 고정된 주체성으로, 자본주의의 시녀로 보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역사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임금 노동자라는 뜻에 갇힌 이익 집단 혹은 사회적 복종을 내면화한 노동자가 아니었다. 농민, 도시빈민, 학생, 여성 등 다양한 소수자들과 연대했으며 그 방법으로 대자보, 찌라시, 잡지, 르뽀, 다큐멘터리 등의 새로운 표현기계를 생산해냈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새로운 감각을 함께 공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기계들과 주체들을 구성했다.

물론 ‘임금’이라는 기계에 예속되어 차이의 배치를 착취당하며 낡은 계급적 주체성에 스스로를 속박시켜 변신의 능력을 포기한 것도 사실이긴 하다.

『사건의 정치』의 옮긴이는 후기에서 랏자라또가 이후 『기호와 기계』에서는 맑스를 중요한 사상가로 호출하며 맑스주의 비판에 일정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어떤 변화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2. 감각의 변형이 우선이다.
맑스주의와 달리 “사건의 철학은 자본주의의 탄생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214)”며 러시아 농노가 자본가를 위한 노동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은 무척 재밌었다. 길지만 이 흥미롭고 재밌는 부분을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러시아 농노가 노동자가 되어가는 과정은 ‘경제적 영역(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다양한 ‘경제적 변이’들에 앞서 존재하면서 그 변이들을 가능하게 한 감각 양식의 변형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차이와 사건의 철학은 자본주의의 탄생이, 그 탄생 이전부터 외부로 확산되어 갔던 가능세계의 무한성에 대한 투쟁에서 유래했음을 보여 준다. 산업화 이전에는 각자가 폐쇄적으로 자족적이었다. 각자가 독자의 언어와 이데올로기, 생활양식을 가진 세계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농부는 기도할 때에는 교회의 언어를, 영주와 말할 때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의 언어를,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과 말할 때에는 또한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각각 닫혀 있었고, 상호교화도 없었으며, 주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비추어 주지도 않았다. 자본주의는 그와 같은 고립된 세계를 파열시켰다. 결국 자본주의는 그러한 세계의 폐쇄성과 자족성을 해체했다.”

토대와 상부구조 이론을 비판하는 듯한 이 설명의 배경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통제사회’는 미디어가 만들어 낸 공중에 관여하며 사건의 장소인 여론, 언어, 기호체제, 지식의 유통, 소비 등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새로운 권력기술은 기호론적 통제 기술이다. 표현기계가 세계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농노가 노동자가 된 것은 토대인 경제구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감각의 변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랏자라또는 언어와 미디어에 대한 이론에 많은 힘을 쏟는다.

3. 대화
“대화에서 말해지는 말은 타자의 목소리에 점유되어 있는 말이다. 자신에게 고유한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그 하나하나의 말 안에는 모두 타자의 표현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말의 의미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현과 억양, 목소리에 의해 시작된다. 말로서의 타자는 다양한 가능세계다.(182)” 그래서 대화와 여론은 잠재적인 것이 출현하는 표현의 집단적 배치이다. 대화란 차이화의 역능이다. 하지만 여론을 만드는 대화는 자본주의에서 미디어에 의해 관리된다. 이와 같은 랏자라또의 바흐친에 대한 인용과 전개도 참 재미있었다.

4. 미디어
그래서 “언어와 지각 인식의 유통을 탈중심화하는 것은 표현수단을 탈중심화하는 것과 동시에 행해져야 한다(204).”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표현기계의 힘은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세계를 창조하고 실현하는 과정은 인간적인 힘들만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힘들과 인공적 기억과 뗄 수 없게 되었다. 표현기계에 대한 투쟁은 감각의 창조와 실현에 관련한 투쟁이다.

5. 기억
왜냐하면 생명체의 본질은 기억이고, 기억은 잠재적인 것을 현재화하는 역능이며, 기억과 주의력은 뇌의 협동에 의해 움직이고, 기억과 그 주의력에 대한 인지정치는 기억을 변조하는데, 통제사회에서 시간·기억에 관한 테크놀로지는 인공적 지속을 만들어 내고 제어하기 때문이다. 그 장치는 감각과 지각, 지성, 활동 사람들의 주의력을 움직이게 만들고, 자연스러운 기억의 지속성에 영향을 주어 감각의 창조에 개입한다. 그 장치가 사람들의 기억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은, 그것이 생명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의 테크놀로지 장치는 통제사회에 특유한 동력이다.

6. 전쟁체제
시간 테크놀로지의 언어와 기호, 이미지에 의해 확장되는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표현기계가 선도하는 것은 이제 공장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랏자라또는 말한다. 즉 전쟁의 길이 미디어에 의한 사건의 실현에 의해 열린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새로운 전쟁 체제는 뇌의 협동의 결과이고 그에 대한 직접적인 반등이다. 차이화의 운동이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의 밑바닥을 침식했(292)”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제사회의 전쟁 패러다임은 규율사회의 전쟁 패러다임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사건이라는 탈주와 실험과 창조를 통제하기 위해, 사건이라는 위협이야말로 권력이 끝없는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그 적이란 테러리즘이 아니라 다양체이다. 국가가 전쟁에 의해 파멸시키고자 하는 적이다(298).”

국민국가에서 전쟁은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여 국민의 혼과 신체를 규율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의 전쟁은 안보, 생명, 기상, 위생, 미생물, 인권 등 모든 인구의 활동과 지구 생명권에 대한 통제이다. 그리나 규율사회에서든 통제사회에서든 전쟁이라는 통치술 전략은 교과서,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미디어에 의해 주도되며 ‘사건이라는 탈주와 실험과 창조를 통제하기 위한’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랏자라또는 규율사회와 통제사회에서의 전쟁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국가 자체이며 전쟁 수행은 권력이 끝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랏자라또는 전쟁에 대한 저항의 힘 또한 강하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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