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칼럼] 혐오 선동 ‘트럼프’에 절망, ‘침묵을 깬 사람들’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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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16:48 | 최종 업데이트 2017-12-13 00:58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불신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의 시작이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쓰인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시공을 뛰어넘어 올 한 해 동안 미국에서 바라본 세상을 표현하는 데 손색이 없어 보인다.

2017년 새해는 혐오를 선동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제45대 대통령 취임으로 시작됐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선거 기간 한 혐오 발언들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정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내각과 참모진 면면도 트럼프에 못지않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최악의 어리석음, 불신 그리고 어둠과 절망-이런 부정적인 단어들이 앞날을 예견하는 키워드로 보였다.

혐오라는 이름의 절망과 어둠

“흑인의 생명은 하나도 소중하지 않아. 마찬가지로 흑인들의 투표도 중요하지 않아.”
“이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으니, 너를 비롯해 내 눈에 띄는 흑인은 다 총으로 쏴 버릴 거야.”
“트럼프가 미국을 청소할거야. 히틀러가 유태인에게 했던 것처럼 트럼프는 무슬림부터 손을 볼 거야.”
“미국을 다시 백인들의 나라로 만들자.”

트럼프 당선 직후 보고된 혐오 표현들이다. 여기 적은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혐오와 증오의 폭력적인 말이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나왔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직장, 학교, 거리, 대중교통 등 장소를 불문하고 벌어진 일이다.

혐오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남부빈곤법센터(Southern Poverty Law Center)는 2016년 11월 선거 후 불과 열흘 동안 혐오사건 867건을 접수했다고 발표했다. 온라인에서 벌어진 무차별 차별과 혐오 표현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은 사건까지 합친다면 소수 인종과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크고 작은 공격은 실제 더 많이 벌어졌다.

노골적인 인종차별,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 혐오를 선동하는 ‘막말’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법적으로 용인되지 않지만, 여전히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내재되어 온 사회에서 이를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던 극우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혐오 발언과 함께 ‘테러리즘 저지’라는 미명 하에 나온 무슬림 입국금지령 같은 인종차별 정책 또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커밍아웃하는데 힘을 보태 주었다. 이는 지난 5월 오레곤 포틀랜드에서 벌어진 인종혐오 살인사건과(관련 기사: [남수경 칼럼] 인종주의 폭력과 혐오가 표현의 자유?) 8월에 벌어진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의 극우테러 같이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제레미 크리스천 [사진=https://jilldennison.com]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불안과 위협은 극단적인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미디어에 보도되지 않는 작은 일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더 생생하고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혐오에 노출되는 아이들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아이들에게 학교가 차별과 혐오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곳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흑인이니까 이제부터는 스쿨버스도 나랑 같이 못 타고 학교도 다른 곳으로 다니게 될 거래.” 초등학생 아이가 백인 동급생에게 들은 말이라고 한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연이다. “개와 흑인은 출입금지”라는 모욕적인 말로 상징되는 흑백 간 인종분리(racial segregation)가 합법이던 어둠의 시절로 돌아가는 걸 바라는 것일까. 백인 학생들이 소수 인종 학생들을 향해 한목소리로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build the wall)”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일은 많은 학교에서 반복됐다.

나의 한 지인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집에 돌아와서 “엄마, 우리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라고 물으며 울었다고 한다. 나 또한 “이민자들은 범죄를 많이 저질러서 싫다”고 말하는 친구를 설득하다가 너무 답답해서 결국 “우리 엄마도 이민자야!”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아이에게 직접 들었다. 어른들의 혐오와 편견 때문에 거꾸로 가고 있는 세상은 아이들의 마음에도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아이들이 혐오표현을 하는 것은 그들이 타고난 인종주의자라서가 아니다. 대부분 어른들에게서나 TV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 문제는 학교에서조차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는 교육이 항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한국인을 증오해”

최근에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북부 뉴저지의 한 엘리트 특목고에서 벌어진 일이다. 9월 새 학기 첫 수업에서 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인종과 민족 배경을 소개하라고 했다. 다른 인종과 민족 배경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논평을 하다가, 한 학생이 자신을 한국계라고 소개하자 그 교사는 “나는 한국인을 증오해(I hate Korean)”라고 대응한다. 순간 교실 분위기는 냉랭해졌지만, 선생은 학생들의 소개를 계속 이어가게 한다. 그리고 한국계라고 말하는 학생들에게 계속 같은 말을 했다. “나는 한국인을 증오해.”

▲수업 중 교사가 한국인 혐오 발언을 반복한 미국 뉴저지의 한 학교. [사진=학교 홈페이지]
다음은 당시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나중에 차례가 돌아온 한 한국 학생은 교사의 혐오발언을 피하려고 중국인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반 친구들이 자신의 임기응변(?)에 웃음을 터트리자 할 수 없이 자신이 한국계임을 밝혔다. 그러자 교사는 그 학생에게도 “한국인을 증오”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교사는 다른 반 수업에서도 한국 학생들은 모두 손을 들라고 한 다음,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한국인을 증오해.”

학생들은 바로 학교에 사건을 알리고 조사와 대책을 요구했지만, 학교는 문제 교사를 상급반에서 저학년 수업으로 재배치하고 피해 학생들에게 ‘구두 사과’를 하는 것으로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학교 측의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후속 조치를 요구하고 있지만, 학교는 사건을 축소하고 무마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이 글을 쓰는 현재 학교의 공식 입장은 비밀유지 의무 때문에 학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자세히 논할 수 없지만, ‘혐오범죄(hate crime)’는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1960년대가 아니라, 2017년 바로 지금, 뉴저지의 한 엘리트 고등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어둠과 절망 속에 떠오르는 저항

하지만 올 한 해 우리가 목격한 것은 어리석음과 불신과 어둠과 절망만이 아니다. 우리는 동시에 그에 맞서는 거센 저항의 물결도 보았다.

트럼프에게 제일 먼저 맞선 것은 여성들이다.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는 노골적인 여성 비하 발언을 계속했고, 동시에 그의 성폭력 전력도 폭로됐다. 많은 여성들이 트럼프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용기 있게 나섰다. 트럼프가 지난 2005년 한 방송 진행자에게 자신의 성폭력 행위를 떠벌이는 내용의 녹음테이프까지 폭로됐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성들이 절망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절망만 하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통령 취임식 날인 1월 21일에 맞춰 여성들은 ‘워싱턴 여성행진’을 조직했다.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운 ‘워싱턴 여성행진’을 지지해 미국과 전 세계 670여 개 도시에서 벌어진 연대시위에 역사상 최대의 인원이 참여했다. (관련 기사: 절망의 트럼프 취임, 희망의 ‘워싱턴 여성행진’) 사람들의 이목을 즐기는 트럼프에게 걸맞은 규모의 취임 축하선물을 그가 모욕한 여성들이 강력한 펀치로 갚아준 것이다.

▲미국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침묵을 깬 사람들’ [사진=Time]
그로부터 11개월이 지났다. 며칠 전 미국의 유력 주간지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깬 사람들(Silence Breakers)’을 선정했다. 할리우드의 거물 하비 와인스틴이 저지른 성폭력에 대한 폭로 이후 봇물 터지듯 터진 ‘미투(#Me Too)’ 캠페인에 참여해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폭로한 불특정 다수 여성들이 바로 이 ‘침묵을 깬 사람들’이다. “1960년대 이후 우리 문화의 가장 빠른 변화 중 하나를 촉발했다”고 평가되는 미투 캠페인의 해시태그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85개 나라에서 수백만 번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올해의 인물 최종 후보에 오른 트럼프를 제치고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침묵을 깬 여성들이 선정되었다는 것은 지난 일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 캠페인 이전에 트럼프에 맞서 용기 있게 나선 여성들의 폭로가 있었다. 그 작은 물결이 1월의 여성행진으로 이어지고 결국 미투 캠페인이라는 커다란 파장을 가진 큰 물결로 이어지고 있다.

계속되는 여성들의 폭로는 이제 미국 정가를 강타하고 있다. 하비 와인스틴처럼 자리에서 물러나는 가해자 명단에 현직 상원의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성폭력 가해자 트럼프는 여전히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다. 여성들이 시작한 저항의 물결이 멈추지 말고 계속 퍼져나가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무엇보다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증거는 미국의 젊은 세대가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반대를 넘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앞에서 얘기한 한국인 차별 발언의 경우에도 그동안 사회 문제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 온 한인 커뮤니티와 특히 고등학생들이 나서 서명운동을 벌이며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둠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2017년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절망과 비관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빛과 희망을 계속 품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이미 시작된 희망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행진은 새해에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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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경
뉴욕에서 도시빈민,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을 대변하는 공익인권변호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