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보급 사라진 군대와 신세계그룹

[기자칼럼] 임금 삭감 없는 근로시간 단축 발표가 은폐하는 것들

20:32

눈이 오는 날이면 강원도 인제에서 보낸 군 시절이 생각난다. 제설하고 나서 피우는 담배는 맛있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통장 잔고가 떨어지는 월말이면 꽁초를 주워 피우기도 했다. 군 장병 월급이 올랐다고 기뻐했던 2009년이었는데, 연초 보급제도는 폐지됐다. 월급은 올랐지만, 담뱃값은 더 나갔고, PX 가격도 더 올랐다. 월급올랐다는 소리를 하지 말던가.

얼마 전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군대 시절을 떠올렸다. 늦은 밤 입주자 단체 카톡방에 ‘2018년도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경비원 근무형태 변경 투표…입주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올해와 내년 임금을 동결하기로 했습니다’는 메시지와 함께 설문조사를 했다. 선택지는 4개였다. 1번은 근로시간을 줄이고 휴게시간을 늘려 입주자 부담 동결이었고, 나머지는 근로시간을 늘이는 보기였다. 다수는 1번을 선택했다. 현재 근무시간대로 하고 최저임금 인상분을 더 부담하는 문항은 없었다.

‘아니, 이따위 꼼수를 쓰다니!’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4살 큰딸 손을 잡고 경비원 아저씨를 만나러 갔다. 임금 동결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은 게 없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최저임금 인상분 지원 관련 이야기가 떠올라 4대보험 가입 여부도 물었다. 65세가 넘어 그런 거 없단다.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매일매일 저마다 얼마나 더 나쁜지 경쟁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이날은 박근혜 국정농단 시절과 같은 분노가 찾아왔다. 아니, 박근혜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노라고 이해해줄만한 수준이었다.

같이 놀자는 딸을 외면하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휴게 시간 중에도 아파트를 벗어날 수 없는 경비원들에게 휴게시간을 늘리고 임금을 동결하는 것은 후퇴한 근로조건으로 변경하는 행위이므로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근로시간을 그대로 두고 최저임금 인상분만큼 내년 임금에 반영하자는 A4 1장을 꽉 채운 글을 공유했다. 마지막에는 자라는 아이들에게 돈 몇천 원 아끼려고 아빠가 꼼수를 썼다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싶지 않다고 썼다.

10분, 20분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계속 휴대폰을 들여다봤지만, 입주자대표가 수고한다는 글만 올라왔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할 무렵, 보기가 잘못됐었다는 댓글이 몇 개 올라왔다.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최저임금 인상분을 반영하는 임금을 내년부터 지급하기로 결론이 났다. 분노는 며칠이 지나자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8일 신세계그룹이 1월부터 임금 삭감 없이 근로시간을 주당 35시간으로 단축한다고 발표했다. 다수 언론은 신세계가 앞장서서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날 길을 열었다며 환영했다. 어느 진보적인 교수도 환영하는 칼럼을 실었다. 신세계에서 일하는 마트노동자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마트 폐장 시간을 당긴다고 손님이 확 줄어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신세계가 마트 노동자들의 여가를 걱정해준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런 걱정 따위 하지 않는다. 시간당 손님의 밀도는 높아진다.

시간을 단축하고 시급체계를 폐지하고, 생활임금을 도입하겠다면 신세계의 진심을 믿어줄 수 있겠다. 대구교육청이 노동해방을 위해 주차관리원 2명을 자르고 내년부터 무인주차관리시스템을 도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초 보급을 폐지하고 월급이 오른 우리 부대 전화기 앞에는 월말이면 사람이 늘어섰다. “송금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