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불모지 경북에 이런 신문이 있지? 놀라웠어요”

[뉴스민 후원회원을 만나다] (11) 이종옥 씨

17:40

당신이 생각하는 뉴스민의 존재 가치는 무엇입니까? 뉴스민은 어떤 언론입니까? 뉴스민 후원회원들께 물었습니다. 내년도 최저임금 7530원, 월급으로 환산하면 157만3770원. 급등한 최저임금을 감당하지 못한 뉴스민이 이대로 문을 닫을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대대적인 후원회원 모집에 나섰습니다. 뉴스민 후원회원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통해 지속가능한 뉴스민을 만들고자 합니다. 뉴스민과 함께 따뜻한 연말 보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뉴스민 정기 후원하기

[뉴스민 후원회원을 만나다] (11) 이종옥 씨

‘뉴스민이 만난 후원회원’ 마지막이자 열한 번째 만난 후원회원은 대구, 경북지역이 아닌 광주시민 이종옥(70) 씨다. 뉴스민은 광주에 있는 이종옥 씨 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광주에서 만난 후원회원 이종옥 씨

안녕하세요, 뉴스민 후원회원에 가입하실 때, “내 친정동네 경북에 이런 양심적 언론이 있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변함없는 초심으로 발전해 가시기를 소망합니다.”라고 이야기를 남기셨습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어땠나요?

제 고향은 경북 영주였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먹고 살길이 없어서 만주에 가셨다가, 해방되고 나서 영주로 왔어요. 저희 집안 기독교 역사가 1백년 가까이 됐어요. 기독교윤리 차원에서 밥상머리 교육이 괜찮았다고 봐야할까요. ‘가난한 사람 눈물을 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께서 늘 하셨어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요. 그때부터 외롭고 어려운 청소년들한테 관심이 많았어요.

집은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그 당시 미군이 빈농한테 주는 옥수수가루, 밀가루를 안 타오려고 하셨어요. 이것 때문에 어머니랑 부부 싸움을 많이 하셨죠. 아버지는 예전(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와 김대중이 붙을 때 도시락 싸서 김대중 대통령 연설을 들으러 다녔어요. 그때 연설장에는 이상한 아저씨들이 서 있었죠.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하기 전에 유신헌법 교육을 했어요. 제가 그때 다니던 시골 교회 성가대 지휘를 했거든요. 그런데 교회에서도 유신헌법 교육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가난하니까 교회에서 발언권이 없었죠. 집에서 밥 먹으면서 노발대발하고,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에게 항의를 했죠. 그리고 한 달 정도 교회를 안 나갔어요.

고향이 경북 영주인데 광주에서 살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결혼하면서 광주에서 살게 됐어요. 고향에서 음악을 배웠어요. 과수원집 딸하고 친구였는데 그 집에 가서 피아노를 치면서 혼자 독학을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에 가서 피아노 레슨을 하러 다니면서 교회를 다녔어요. 이때 대광고등학교 음악교사를 하던 스승(김두완, 1924년생)을 만나서 작곡을 배웠죠. YMCA에서 농민교육도 하고, 크리스찬 아카데미(기독교의 사회참여와 교회와 사회의 대화, 현대사회의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인간화를 표방한 단체)에도 나갔어요.

지금은 뉴라이트 운동에 나섰지만, 당시 빈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김진홍 목사와 인연이 되면서 운동권들을 만났죠. 어떻게 하다보니까 남편과 만나 눈이 맞았죠. 집에서는 전라도 사람이라고 반대했지만, 그때 제가 큰 애를 임신해버렸죠. 집안에서도 할 수 없었죠. 남편과 결혼한 게 79년이었어요. (종옥 씨 남편은 나상기(69) 농민문제연구소장이다)

그럼 결혼하고 바로 광주에 내려왔나요? 79년이면 80년 광주 바로 코앞이었는데요.

저 양반도 민청학련(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4일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터뜨리면서 1024명을 연행해 203명을 구속시켰다. 당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회장이던 나상기 씨도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75년 2월 석방됐다.) 세대라 먹고 살길이 없잖아요. 쫓겨 다니느라 바빴죠. 제가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까 서울에서 피아노 레슨을 했어요. 79년 10월 17일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후 10.26이 터졌죠. 그리고 80년 5월 남편이 광주로 가겠다는 걸 말렸어요. 이미 광주는 봉쇄가 됐고, 애가 아직 홀로 서지도 못하던 때라 제가 말렸죠. 몇 년 후 저 양반이 광주로 내려가자고 해서 왔어요.

▲광주에서 만난 후원회원 이종옥 씨와 그의 남편 나상기 씨.

광주에 내려와서는 어떻게 지냈나요?

남편이 광주에 농민문제연구소를 개설했고, 저는 그때 현장으로 다녔어요. 전남 해남, 강진, 무안 쪽을 많이 다녔죠. 그러던 즈음 우루과이 라운드(1986년 9월 다자간 무역기구로 발전시키려는 국가 간 협상으로 1994년 4월 합의문이 채택됐다)가 터지면서 저는 전국 농촌지역으로 다니면서 강의를 다녔어요. 농촌 여성들이 얼른 알아들을 수 있게 강의를 한다고 소문이 났어요. 수세 거부가 왜 필요한지, 수입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 이야기를 했죠. 그러다가 아이들이 커가면서 생계가 막막해지면서 피아노를 팔아먹고 통닭집을 열었어요. 그즈음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면서 다시 교육을 다녔어요. 부녀회 단위로 교육을 다녔죠.

전국을 다니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었나요?

교육하던 중에 한 분이 ‘시아버지가 모시고 오란다’고 해서 갔어요. 이 할아버지가 고백을 하는 거예요. 여성의 몸으로 골프장 반대도 하고, 정치 운동을 하고 다니니 고생이 많다고 하시면서 당신 며느리 교육시켜서 좋은 활동가로 만들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당신 고백을 하더라고요. 보도연맹 사건을 겪으면서 자기가 변절한 다음 지금까지 부끄럽게 살았다고.

당시 어떤 마을에 교육하러 들어가면 형사들이 쫓아다니니까 동네 사람들이 보호 해주고 했어요. 택시도 불러놓고, 택시 타는 곳까지 양쪽 길로 서서 못 잡아가게 보호받았던 적도 있어요. 그러면서 ‘전라도 민중이 뛰어나구나’ 생각을 했었죠.

▲광주에서 만난 후원회원 이종옥 씨

살아있는 역사네요. 이번 인터뷰 말고 꼭 한 번 다시 광주에 와야겠습니다. 그러면 <뉴스민>은 어떻게 알게 됐나요?

페이스북에 뉴스민이 뜨길래 여기는 뭐하는 곳인지 봤어요. 진보적인 신문이구나 생각했는데 경상도에 있더라고요. 경상도 불모지에 이런 인터넷 신문이 있지? 놀라웠어요. 내 고향인데 적은 돈이라도 후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언론이 어떻게 글을 쓰냐에 따라서 국민들이 개돼지가 되기도 하고, 스승이 되기도 해요. 언론이 중요해요.

어떤 기사들이 기억에 남으셨어요?

사드 관련 보도가 기억에 남아요. 사드는 괴물이라고 생각해요. 괴물인데 또 나라가 조건상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지역 주민으로 보면 사활을 걸 수밖에 없기도 하지요. 제가 여성농민운동 하면서 그 동네 분들도 만났어요. 임순분 씨 잘 알죠. 1세대 여성농민운동 하던 분들하고 성주도 다녀왔어요. 마음이 아프죠.

경북지역 언론이 어떻게 문제들을 다루면 좋을까요? 뉴스민에 바라고 싶은 점이 있다면요?

대중의 정서를 잘 읽고, 그 정서에 근접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부각하는 일도 뉴스민 역할이지만, 한편으로는 대중과 호흡하면 좋겠어요. 차은택이 나쁜 사람이지만,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해줘야 해요. 차은택이 덕분에 누구나 문화예술을 값싸게 배울 수 있게 됐거든요. 저도 싼 값에 바이올린도 배우고, 민화도 배우고 있어요. (칠십이 넘었지만, 종옥 씨는 바삐 살고 있다. 민화, 악기를 배우면서 ‘셀프케어아트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예술치유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 음악과 미술을 같이 나누는 마을공동체도 꾸려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