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4) 차라리 숙련 없는 영혼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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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여름 뜰」은 자본주의 근대가 강요하는 분열증적 사태에 대한 조금 더 명료한 발언이며, 그것마저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라는 김수영의 특유의 돌파 의지가 번득이고 있는 작품이다. 먼저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 때문에 누구나 다 하는 생활을 꾸리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읽힌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여기서 “여름 뜰”에게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은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과 “굴곡”이 있다고 말한다. 그 “주름살”과 “굴곡”은 “모든 언어가” 이글거리는 곳이며 그것이 드디어 “시에로 통할 때” 현실에 대한 무모한 “대담성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와 같이 이즈러진 얼굴”을 가질 수 있다.

“합리와 비합리와의 사이에 묵연히 앉아 있는” 상태는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의 속성은 “우스웁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이 마저 섞여 있”는 것이다. 즉 명석·판명한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름 뜰”을 “달려가는 조고마한 동물이라도 있다면” 자신을 “희생할 것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여름 뜰”인가? “여름 뜰”에는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줄 알아라!” 같은 “억만의 소리가 비 오듯” 하는 곳이다. 뙤약볕을 그리 해석한 것일까? 그런 “여름 뜰”을 통하여 “조심”, “자중”, ‘두려움’ 같은 언어들을 떠올렸다기보다 어쩌면 자기 내면의 목소리들일 것이다. 뜨거운 햇볕의 복판에서 “조심”하고 “자중”해야 할 것은 많다. 시골집 마당의 여름 뜰은 햇볕이 이글이글 타고 있을 터, “여름 뜰”은 김수영의 실존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은유로서 어색하지 않다.

이런 신중의 자세와 “나는 너에게 희생할 것을 준비하고 있노라” 같은 독백의 낙차는 역설적으로 시의 화자의 결연함과 의지를 증폭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읽을 때만이 4연 3행의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다”가 도리어 긍정적으로 밝아진다. 여기서 “시체”는 “합리와 비합리와의 사이에 묵연히 앉아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움직이는” 무엇인데, “섧지가 않아”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사무실」에서 예시됐던 설움의 부동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름 뜰” 앞에서 잠시 설움을 멈추고, 시의 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태의 진실을 “속지 않고 보고 있”겠다고 말하고 있다. “여름 뜰을 흘겨보지 않”으며 또 “여름 뜰을 밟아서도” 않으며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으며, 원망하지도 않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여름 뜰”은 지금 시의 화자에게 주어진 냉엄한 현실을 상징한다. 다음 작품을 읽어보자.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統覺)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여름 아침」 전문

김수영이 부산에서 돌아온 아내 김현경과 서강(현재 서울시 마포구 구수동 지역)에 자리 잡은 시점은 1955년 6월 즈음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수영에게 서강 생활은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김수영에게서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읽어내는 초상은, 현실 인식으로든 시의 양식으로든 모더니스트일 뿐 그에게 민중 친화적인 정동(情動)이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4·19 혁명 이후 쓴 시에서도 그리고 일기와 시평에서도 김수영에게는 비록 최소한이지만 민중에 대한 윤리의식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작품을 통해서는 「여름 아침」이 아마 그 시초일 것이다. 물론 김수영의 민중의식을 저 80년대적인 것과 같은 저울 위에 올려놓는 것은, 김수영의 여성의식을 2010년대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 것과 함께 몰역사적인 태도일 것이다.

「여름 아침」은 “첨단의 노래만을”(「서시」) 부르던 김수영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게 시선을 던진 작품에 해당된다. 물론 「나의 가족」이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가족’에 가 닿아 있을 뿐, 가족을 넘어선 이웃을 그나마 의식하고 있는 첫 작품은 「여름 아침」이다. 물론 이 작품이 이른바 민중시의 계열에 있단 뜻은 아니다. 그러나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는 구절은, 익명화되어 있긴 하지만, 이웃에 대한 인식이 처음 나타나는 대목임이 분명하다. 이런 인식이 있었기에 혁명 이후에 쓴 「가다오 나가다오」에서 “잿님이 할아버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같은 구절이 가능했다.

「여름 아침」이 본격적으로 타자에 대한 인식을 펼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는 생활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려는 건강이 일시적으로 회복되는 찰나를 그리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과 투쟁해야 했던 “우울”과 ‘설움’을 잠시 내려놓고 ‘처음’을 가다듬어 보는 거울이 이웃의 생활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또 혁명 이후 보여주는 민중의식의 물리적인 바탕이 시작된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요하며, 무엇보다 “첨단의 노래” 바깥에서 “첨단의 노래”가 마냥 관념으로 빠지는 것을 가로막는 ‘인력(引力)’으로 이 ‘물리적 바탕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밑받침하기도 한다.

작품의 구조와 의미는 명확하다. 내용의 요지는, 현실이 강요하는 어떤 분열적 상황을 “여름 아침의 시골”의 삶을 통하여 조금은 수습하고 있는 것이다. “무씨를 뿌”리는 행위는 “간밤의 쓰디 쓴” 여러 감각과 잡념을 “잊어버리”게 하는 치유 행위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니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져”간다. 심지어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을 언급하는 것을 통해 인텔리적 자의식을 조금은 가라앉히는 김수영의 내면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김수영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은 다름 아닌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오는 순간이다. 이때 그는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걷는다. 이 대목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과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치열함이 느껴진다. 하나의 연으로 독립한 “고뇌여”라는 구절은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가는 순간을 가리키지만 1956년 당시 그가 앓고 있는 고뇌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

자신의 이 인텔리적 고뇌에 비해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간다.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이라면, 다시 말해, “천국”이든 “지옥”이든 현실과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면, “차라리 숙련 없는 영혼”이 먼저 되자는 깨달음을 불러온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분기점은 어쩌면 인텔리적 고뇌가 아니라, 지금 당장에 주어진 일에 대한 태도일지 모른다. “천국도 지옥도” 의식하지 않는 “숙련 없는 영혼”을 갖고 말이다. 「거리1」에서도 “그러나 필경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것이다”라고 했고, 4·19혁명이 5·16이라는 반혁명에 짓밟히고 나서 쓴 「시」에서도 “어서 일을 해요 변화는 끝났소/ 어서 일을 해요”라고 했듯이, 김수영은 평생에 걸쳐 어떤 딜레마에 빠지면 눈앞에 놓인 구체적인 일에 자신을 던지는 태도를 자주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물론 도피가 아니다. ‘일’을 통해서 자신을 다시 세우려는 일종의 수신(修身)에 해당된다.

그러할 때만이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어준다. 그것도 “단 한 장의 사진을”. 그런데 왜 “단 한 장”인가? “우리들의 사진”이 “단 한 장”이라는 진술은, 김수영의 몸부림이 단지 자신의 실존 상황을 타개하려는 몸짓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1950년대 보이는 김수영의 정치의식이란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분노라기보다는, 시대적 조건과 한계를 자신의 변화를 통해 돌파하려는 윤리와 거의 같은 말이다. 이 윤리의 극한이 혁명 이후 형식을 개의치 않는 정치시로 나타났던 것일 뿐이다. 암튼, 김수영에게서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은 “단 한 장의 사진”이라는 진술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여름 아침」에 와서이다. 우리는 「백의(百蟻)」를 살펴보면서, “무수한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도의 알레고리와 그것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통렬한 고백을 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