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패터슨’, 어느 버스운전사의 시적 여정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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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7 17:19 | 최종 업데이트 2018-01-17 17:23

[=격주 수요일마다 ‘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를 연재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테크놀로지의 폭주는 우리의 삶을 뿌리째 바꾸고 있습니다. 미래가 현재에 들어와 있고, SF가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 기술산업문명이 만들어낸 기괴한 풍경 속에서 대안과 전환을 모색해 봅니다. ]

6시 10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잠든 아내를 들여다본다. 스탠리 런치 박스를 들고 매일 같은 길을 걸어 직장으로 향한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집 앞 기울어진 스탠드 우체통을 바로 세운다. 강아지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닥이 운영하는 바(Bar)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미국 뉴저지주(州) 패터슨시(市)에 사는 패터슨의 하루다. 그의 하루는 시계처럼 반복된다. 짐 자무시 감독, 영화 <패터슨, Paterson>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다시 월요일까지 일주일간 그의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그려낸다. 언뜻 똑같아 보이는 껍질을 벗겨내면, 그의 일상은 각기 다른 속살을 드러낸다. 영화는 예리하고 미세한 감각으로 반복 속에서 차이를 포착한다. 한 사람으로 보이는 같은 얼굴의 쌍둥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얼굴의 두 사람이듯이. 혹은 패터슨이 매일 지나는 길에 들어와 있는 풍경이 매일 조금씩 다 다르듯이. 그가 써 내려간 같은 시구의 반복이 새로운 리듬을 생성하듯이. 결국, 반복은 미세한 변주로 이어진다. 반복이 변주로 전화하는 순간, 일상은 작은 물결로 출렁댄다.

시 쓰는 버스운전사, 패터슨

패터슨은 버스운전사다. 패터슨은 시를 쓴다. 버스운전사나 시를 쓰는 사람이나 딱히 특별할 건 없다. 하지만 시를 쓰는 버스운전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의 일상은 버스 운전과 시를 쓰는 일로 채워진다. 출근길을 걸으며 시상을 떠올렸다가 운전석에 앉아 잠깐 끼적거린다. 점심시간이면 작은 폭포가 바라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한 줄 한 줄 시를 쓴다. 그의 집 지하실에는 그가 앉아 시를 쓰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다.

버스운전사는 정해진 라인을 반복해서 운행한다. 자칫, 지루해 보이는 기계적 노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중점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과 그 속에서 느끼는 소외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일상의 반복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며 반복이 자아내는 변주는 새로운 활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패터슨에게 이러한 변주가 가능한 것은 그의 삶이 ‘시’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패터슨의 반복되는 일상은 그가 쓰는 시의 온갖 소재가 된다. 그가 매일 모는 낡은 버스에서, 매번 다른 사람들이, 매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꼬맹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나누는, 복서 허리케인 카터 이야기나 젊은 남녀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급진적 아나키스트, 게타노 브레스키는 모두 페터슨시에 실존했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허세로 가득 찬 연애담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두 남자는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인간 군상들이다. 말없이 무심히 앉아 있는 여러 사람들도, 창밖을 스쳐 가는 거리의 풍경들도 모두 패터슨에게는 시의 재료와 영감이 된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일상의 반복이 시적 영감이 되는 공간은 밤에도 존재한다. 그가 매일 찾아가는 바에는 오랜 세월 패터슨이라는 도시와 함께해온 흔적이 남아 있다. 구석구석에 걸린 장식과 사진에는 세월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주인장 닥은 패터슨시의 사람들의 미시적인 일상사를 꿰뚫고 있는 인물이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패터슨에게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효용 이상을 선사한다. 선술집이 다 그렇지만 이곳은 또 다른 인간 드라마가 연출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실연(失戀)당한 연극배우 에버렛이 벌이는 사랑의 행각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실연(實演)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이 영화 <패터슨>을 있게 한 미국의 저명한 시인이다. 짐 자무시는 이곳 패터슨시 출신의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윌리엄스에게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 윌리엄스 시집 「패터슨」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시들이 윌리엄스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사물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면을 중시하고 일상의 파편을 예리한 관찰과 간결한 시어로 표현했던 윌리엄스 시풍과 많이 닮았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나 패터슨시의 패터슨은 묘한 라임을 형성한다.

짐 자무시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무시는 특히 도시적이면서 위트와 섬세함이 뛰어났던, 존 애쉬버리, 케네스 코치, 프랭크 오하라와 같은 ‘뉴욕시파’를 좋아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실제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 한 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 작품 전에도 자무시는 미국사회의 문명과 폭력의 역사를, 죽음을 향한 몽환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데드맨>에서 영국의 문명비판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영혼을 불러내어 환생하게 한 바 있다.

패터슨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패터슨은 한 사람의 평범한 노동자다. 그런 그가 이 영화에서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시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반응은 영화 속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느낌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은 패터슨이 쓴 작품의 수준은 이러한 정서를 환기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가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패터슨 자신과 그의 아내뿐이다. 패터슨이 시를 쓰는 것은 이름이나 돈을 위함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함이다. 패터슨이 쓴 작품은 아직 다른 사람에게 읽힌 적도 없다. 그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도 그가 시상을 떠올리며 길을 걷고 있거나, 사물을 관찰하며 시어를 갈고 닦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는 패터슨이 전문적인 시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나 가능성을 그에게 투사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이 부분은 <패터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패터슨이 시를 쓰는 것은 전문적인 시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일상의 여백을 시로 채우고자 했을 뿐이다. 패터슨이 쓴 시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아내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복사해 놓을 것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결국 그의 시는 반려견 마빈에 의해 훼손되어 영원히 사라졌다. 매일 일상의 틈새를 벌려 차곡차곡 쌓아 왔던 그의 시어들은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만 것이다. 그가 나지막하게 읊조린 것처럼, “물 위에 쓴 말”과 같은 운명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이런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패터슨은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이전 세계보다 더 깊어진 시선으로 삶과 시를 응시하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오직 자유시간(여가)에 쓸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한나 아렌트의 시선으로 보자면, 패터슨이 시를 쓰는 것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노예적인 삶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활동이나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앙리 르페브르가 말한 현대산업사회의 일상성을 뛰어넘는 예술적 행위가 된다. 일상을 작품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의 조건들을 재생산하며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되는 행위가 된 것이다. 패터슨은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도 세상은 잘 돌아갔어”

패터슨은 그 흔한 스마트폰조차 갖고 있지 않다. 스마트폰은 사람을 구속하는 도구라는 생각이 확고히 박여 있다. 그 때문에 도로를 운행하던 버스가 고장이 났을 때 잠시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스마트폰 구입을 원하는 아내의 요청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도 세상은 잘 돌아갔어.”

패터슨이 사는 패터슨시는, 디지털 불빛으로 번쩍거리는 뉴욕과 같은 대도시와는 한참 거리가 먼 풍경으로 그려진다. 특히 패터슨이 반복해서 다니는 길과 거리는, 요란한 4차산업혁명 시대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평범한 모습 그대로이다. 닥이 운영하는 바에도 TV조차 없다. 대신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는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과거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미래가 현재에 편입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맞춰져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도 차원이 다른 세계는 존재한다.

요란한 자명종 없이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기상할 수 있는 패터슨의 감각은, 빈 노트에 펜으로 한 줄 한 줄 힘주어 써 내려가는 그의 시 쓰기 방식과 닮았다. 패터슨이 육화한 일상적 감각은 시의 형상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는 쌍둥이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일상과 시(예술)의 쌍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닮은꼴인 셈이다. 시는 근본적으로 테크놀로지와 대척의 지점에서 발원한다. 시를 밀고 나가는 정신은 기계적 속성을 거부하게 돼 있다.

패터슨이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는 모두 대면으로 접촉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적어도 그에게 디지털 네트워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전화 통화하는 모습조차 찾기 힘들다. 그는 이러한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기는커녕 관계의 확장 자체를 원치 않는다. 아내 로라, 출차점검 직원 도니, 바 주인장 닥 정도가 그가 매일같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일단이다. 네트워크상에서 이국만리 생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뭇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는 요즘 세태에 비춰 보자면 패터슨의 선택은 몹시 이례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러한 패터슨의 방식은 고립이나 단절로 연결되지 않는다. 답답함이나 고루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감각과 리듬에는 더없이 잘 들어맞는다는 느낌을 준다. 걷기 속도에 최적화된 도시의 산책자 패터슨에게 디지털 세상은 너무 빠르고 너무 광범위하며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세계다. 아마도 패터슨이 현실에 굴복하여 그 세계에 접속하는 순간, 그는 시를 잃게 되거나 전혀 다른 종류의 시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바로 그 한 줄,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영화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패터슨이 일본인 시인과 나눈 일련의 대화는 시와 일상, 시와 삶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여실히 드러낸다. “정말 시를 좋아하시는군요?”라는 물음에 “저는 시로 숨을 쉽니다.”고 답한 일본인 시인은 어쩌면 패터슨의 또 다른 자아인지도 모르겠다. 시로 숨을 쉰다는 것은 시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와 일상이 쌍둥이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평소 그의 시가 주로 완성되던 곳, 작은 폭포가 바라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패터슨은 오래전 할아버지가 불렀던 노래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빈 노트에 새로이 한 줄의 시를 써 내려간다(시의 제목도 ‘The Line, 한 줄’이다).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할아버지가 남긴 노래 구절 중에 이 한 소절의 시구를 기억하는 것으로, 패터슨의 일상과 시가 만나는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무쪼록 시 쓰는 버스운전사 패터슨의 시적 여정이 순항해 나가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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