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5) 더러운 자식 너는 백의와 간통하였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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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16:47 | 최종 업데이트 2018-01-23 16:47

[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15번 째 글은 내부 사정으로 3일 늦은 23일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경제활동이기도 한 짧은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더 근본적으로는 가족을 다시 이루고 난 후 김수영이 갖게 된 현실과의 딜레마에 대해서는 앞서 「바뀌어진 지평선」과 「구름의 지평선」에서 살펴본 바가 있다.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난 후 순간 찾아온 ‘설움’을 말한 「사무실」과 자신이 감당해야 할 현실에 대한 다짐인 「여름 뜰」을 거쳐 「백의(白蟻)」가 나왔다는 점을 그래서 특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작품의 순서가 조금 뒤바뀐대도 변하는 것은 없다. 어쨌든 1956년 즈음에 집중적으로 생산된 작품들에서 구체적 현실의 소용돌이 안에서 방황하는(?) 김수영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돌연 「백의(白蟻)」 1행~2행에서 “내가 비로소 여유를 갖게 된 것은/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에 있어서도 저 무시무시한 백의(白蟻)를 보기 시작한 때부터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백의(白蟻)”는 어떻게 시의 화자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작품 내용상 “백의(白蟻)”가 무엇인지 제시되지는 않는다. 3행~4행에서 “백의(白蟻)”의 특정 행동만 간략하게 제시된다. “백의(白蟻)”는 “그의 소유주에게는/ 일언의 약속도 없이 제가 갈 길을 자유자재로 찾아다니”는 존재인데, 왜냐하면 “백의(白蟻)”는 “자동식 문명의 천재이었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헬리콥터’와 ‘네이팜 탄’이라는 과학기술 문명의 성과를 전유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뚫고 나아가는 표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이다. 그런데 ‘네이팜 탄’에 대한 각주에서 김수영은 직접 “최근 미국에서 새로 발명한 유도탄이다”라고 밝혔고, 작품에서는 “지휘편(指揮鞭)이 없을 뿐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유도”와 “지휘편(指揮鞭)”이라는 말이 “자동식 문명”의 구체적인 면을 가리킨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자동식 문명”이란 말은 “유도”와 “지휘편”을 추상화한 언어이며, “유도”와 “지휘편”은 “자동식 문명”의 속성이 된다,

또 “백의(白蟻)”는 “자동식 문명의 천재이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헬리콥터’나 ‘네이팜 탄’으로 표상되는 근대기술 문명을 어떤 진보성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김수영 자신이 처한 1950년대의 현실을 뚫고 나갈 무기로 받아들였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질곡이 그것들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자각이 「백의(白蟻)」의 바탕에 어른대는 것도 사실이다. 근대기술 문명은 삶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의 자율성(?)을 득한 수준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소유주에게는/ 일언의 약속도 없이 제가 갈 길을 자유자재로 찾아다니었다”.

김수영이 어떻게 근대 기술문명의 본질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는지는 명확지 않다. 다만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서 얻은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이 어떤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제 “백의(白蟻)”는 “제 갈 길을 자유자재로 찾아다니”는데, 작품 전체에서 봤을 때 “백의(白蟻)”, 즉 ‘흰개미’ 떼의 움직임을 연상시키게 하는 딱 하나의 이미지라면 바로 이 대목이다. ‘흰개미’를 직접 관찰했는지는 드러나 있지 않다. 어쩌면 개미떼의 움직임에 ‘하양’의 색깔을 의도적으로 결합시켜 시적 대상을 훨씬 더 이질적이고 모호하게 하고 싶은 전략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백의(白蟻)”가 “자유자재로” 활보하는 세상이지만, 자신은 그것을 보고 “비로소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백의(白蟻)”는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백의(白蟻)”는 이 작품에서 한 번도 자신의 구체적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자유자재로” 활보하면서 여러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는 듯하고, 또 여러 작용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의(白蟻)”는 “뇌신(雷神)보다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고/ 뮤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상처를 쓰다듬어준다”. 또 “질책의 권리를 주면서 질책의 행동은 주지 않”는다. “백의(白蟻)”는 모순적인 존재인가? 아니다. “백의(白蟻)”는 흐름이고 리좀(Rhizom)일 것이다. 연결의 성격이나 연결의 시·공간에 따라 다른 결과물들을 생산해낸다. 한편으로는 “뇌신(雷神)보다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지만, 한편으로는 “뮤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상처를 쓰다듬어준다”. “권리”는 주지만 “행동은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라의 지폐보다도 신용은 있”다. 왜냐면 이제 “백의(白蟻)”는 하나의 보편이기 때문이다. 다만 “신체가 너무 왜소한 까닭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를 않는다”. “신체가 너무 왜소”하다는 것은, “백의(白蟻)”가 가시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환기한다.

고대 형이상학자들은 그를 보고 <양극의 합치>라든가 혹은 <거대한 희열>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19세기 시인들은 그를 보고 <도피의 왕자(王者)> 혹은 단순한 <여유>라고 불렀다
그는 남미의 어느 면공업자의 서자로 태어나서
나이아가라 강변에서 수도공사(璲道工事)에 정신(挺身)하고 있었다 하며
그의 모친은 희랍인이라고 한다
양안(兩眼)이 모두 담홍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오랜 세월을 암야(暗夜)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백의(白蟻)”에 대해 가까스로 쌓아온 이미지를 부수는 중간 구절이다. 이 구절에 의하면 대략 “백의(白蟻)”는 전 역사에 걸쳐 존재했으며 또 세계의 전 공간에 잠재되어 있다가 태어났다. 이 구절을 시인의 의도대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가지 가설은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김수영이 시에 연극적 요소를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시의 화자의 방백을 통해서 “백의(白蟻)”를 실체화시키려는 독자의 무의식적 시도를 흩으려 놓으려는 술책일 수 있다.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시도들이 이 작품 안에서 다시 등장하고 거기에는 ‘보물찾기’ 같은 암시를 심어놓은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 구절을 건너뛰어 읽어도 시를 간신히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별 지장이 없어 보인다.

“나의 맏누이동생이 그를 <허니>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꼬와서/ 내가 어느 날 그에게 <마신(魔神)>이라는 별명”을 불렀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 “백의(白蟻)”의 속성, 즉 무엇과 어디에서 언제 연결되느냐에 따라 그의 양태가 다르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변주하고 있으며, 이제 “백의(白蟻)”는 시의 화자의 가족 안에까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맏누이동생은 그를 <허니>라고 부르고” ‘나’는 “그에게 <마신(魔神)>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모두다 “백의(白蟻)”에 취해 있지만, 시의 화자는 “백의(白蟻)”가 “마신(魔神)”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자 “맏누이동생은” “<오빠는 어머니보다도 더 완고하다>고” 대꾸한다. “어머니”로 표상되는 세대 혹은 시간은 “백의(白蟻)”에 대해 냉담하다는 뜻이고 다른 말로 하면 “어머니”의 시간은 “백의(白蟻)”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다음에 반전이 이루어지는데, 돌연 그런 “백의(白蟻)”가 “비참”하다고 하는 것이다. “비참한 것은 백의이다”. 왜냐면 “그는 한국에 수입되어 가지고 완전한 고아가 되었고” 한낱 “거리에 흩어진 월간 대중잡지 위에 매월 그의 사진이 게재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어느 삼류 신문의 사회면에는 간혹 그의 구제금 응모기사 같은 것이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백의(白蟻)”는 기원과 고향을 잃고 함부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해인 1956년에 쓴 「기자의 정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것이 어제 오후에 써놓은 기사 대목으로
내일 조간분 사회면의 표독한 타이틀이 될 것이라고 해서
네가 이 두 시간의 중간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해서

“사회면”이라는 어휘가 「기자의 정열」과 「백의(白蟻)」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작품을 이루는 시인의 인식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기원과 고향을 잃고(혹은 그것마저 파괴하고) “자유자재로” 활보하는 것은 “백의(白蟻)”의 리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제 “백의(白蟻)”는 비참을 가장하는 능력도 갖췄다. 하지만 비참을 가장하는 “백의(白蟻)”의 역량을 간파한 시의 화자가 이것을 혹 한국의 “저널리스트의 역습의 묘리” 아닌가 생각하는 찰나, “백의(白蟻)는 이와 같은 나의 안심과 태만을 비웃”기까지 한다. 이렇게 “백의(白蟻)”는 천의 얼굴을 하고 “저널리스트”까지 즉 사회의 의식, 언어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쯤 오면 “백의(白蟻)”는 속된 자본주의 대중문화를 가리키기도 하고, 함돈균의 말대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의(白蟻)”는 앞부분에서 근대 기술문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그 기술문명을 동력 삼은 대중문화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맏누이동생”마저 “<허니>”라고 부르겠는가. 시의 화자가 그 대신 “<마신(魔神)>”이라고 부를 때도 최소한 “백의(白蟻)”의 마력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중간 정리를 해보자면, 이제 “백의(白蟻)”는 저널리즘과도 공모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비참을 가장할 정도로 여기저기 “게재”되고 “구제”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시의 화자의 약간의 연민과 동정을 입구 삼아 “어느 틈에 우리 가정의 내부에까지 침입하여 들어와서/ 신심양면의 허약증으로 신음하고 있는 나를 독촉하여” 일을 시킨다.

이런 역전 현상은 시의 화자를 어떤 위기로 몰아붙인다. 그리고 김수영은 여기서 다시 한번 앞에서 말한 연극적 요소이자 시적 요설을 등장시켜 독자의 이해를 방해하려고 한다.

「희랍인을 모친으로 가진 미국인에게 대한 호소문」과 「정신상(精神上)으로 본
희랍의 독립선언서」를 써서
전자를 현재 일리노이 주에 있는 자기의 모친에게 보내고
후자는 희랍 국립박물관 관장에게 보내달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무리한 요청에 대하여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은 나의 역량 이상의 것이므로 신세계극단의 연출자 S씨를 찾아가보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가지고 즉석에 거절하여 버렸다

드디어 “백의(白蟻)”는 시의 화자를 조종하려고까지 한다. 시의 화자는 “백의(白蟻)”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가까스로 떨쳐버렸는데, “백의(白蟻)”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신세계극단의 연출자 S씨를 찾아가보라”는 응답은, 조금 과감하게 해석하자면, 김수영 자신이 이 작품에 연극적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는 의도된 진술로도 읽힌다. 물론 여기서 말한 ‘연극적 요소’라는 것은, 시의 흐름에 엉뚱한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끌어들여 시인의 정동만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와 에피소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김수영의 시적 전략을 가리키는 소극적인 표현이다.

「백의(白蟻)」는 이제 마지막 반전을 남겨두고 있다. “오히려 이와 같은 나의 경멸과 강의(剛毅)로 인하여/ 나는 그날부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백의(白蟻)”와 투쟁하다 “백의(白蟻)”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사랑”은 당연히 존재의 변신을 가져온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거리에 나가니/ 나의 친구들은 모조리 나를 회피하는 눈치이었다/ 그 중의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나에게 욕을 하였다”. 이 상태를 타락으로 말하지 않고 변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의 화자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변신의 용광로이지 타락의 함정이 될 수 없다. 더군다나 “나의 친구들은 모조리 나를 회피하는 눈치”인 것은 이제 “나의 친구들”의 눈에도 나의 ‘변신’이 보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자식 너는 백의와 간통하였다지? 너는 오늘부터 시인이 아니다……」” 친구들은 이렇게 화자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백의와 간통”은 ‘시인됨’의 문제를 직접 겨냥한다는 점이다. “백의”는 그러니까 시인으로서는 응당 멀리해야 할 존재이다. 작품 안에서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백의”가 순수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은 “백의”와의 관계를 “간통”이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는 것만으로 드러난다. 함돈균은 자신의 논문 「오염된 시인과 시」에서 “문명과 역사의 비평적 주체로서 마주한 이 자가당착적 상황이 지난 아이러니”를 지적하며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수상쩍은 비평적 대상과의 연루를 자인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 점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작품의 마지막 구절, “―백의의 비극은 그가 현대의 경제학을 등한히 하였을 때서부터 시작된 것이다”의 “백의”를 ‘白衣’로 해석하면서 결정적 오독을 했다. 그건 단순히 중의적인 차원을 넘은 변신의 문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마지막 구절의 “백의”는 곧 시의 화자이며, 시의 화자는 “백의와 간통”을 통해 자신이 “백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석되었을 때만이 함돈균 자신이 말하는 ‘아이러니’가 완성되는 것이다. 또는 이 작품의 시작부터 “백의”는 시의 화자의 다른 자아일 수도 있다. 들뢰즈의 존재 철학에서 다양체(multiplicity)는 매우 핵심적이며, 시종일관 밀고나간 개념이기도 하다. 이 다양체는 일종의 ‘가능성의 공간’이면서 현존재의 양태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 하나의 자아를 실체로서 갖고 있지 않다. 끊임없이 외부의 사건을 통해 겹 혹은 층이 쌓여 현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김수영이 말한 “백의와 간통”도 이 외부적 사건을 통해 하나의 겹이 추가되어 변신이 이루어진 것이며, 이미 “간통” 이전에도 하나의 다양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미학적인 의미로서의 ‘아이러니’를 말하기 전에, 존재론적으로 다양체를 먼저 사고하는 것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백의의 비극”이 “현대의 경제학을 등한히” 해서 시작되었다는 언표다. 이것이 백의민족(白衣民族)이 자본주의 근대를 따라잡지 못해서 후진적 현실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백의”로 상징되는 서구 문명과 외세의 정치세력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해석은 매우 깡마른 관점이다. 여기서 “현대의 경제학을 등한히” 한 “백의”는, 시의 초입에서 시의 화자가 발견한 그 “백의”가 아니다. 그 “백의”를 사랑하든 혐오하든 이제 모두가 “백의”가 되어버린 사태를 암시하며 사회적으로는 “현대의 경제학을 등한히” 할 수 없는 시간이 도래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의와 간통”을 부정하는 시인들이야말로, 철지난 낭만이나 댕댕 울리는 존재들이다. “백의”가 누구였건, 누가 “백의”를 “<허니>”라고 부르건, “백의”와 어떻게 해서 사랑에 빠졌건 간에 근대는 “경제”가 움직이고 있다는 1956년 당시의 김수영의 유물론적인 인식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문제적이다.

다시 김수영의 전기적 사실로 돌아가 보면,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김수영은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양계 변명」이란 산문을 보면, 양계를 “내가 취직도 하지 않고 수입도 비정기적이고 하니 하는 수 없이 여편네가 시작한 거지요.” “이걸 시작한 게 한 8년쯤 되나 봅니다. 성북동에서 이곳 마포 서강 강변으로 이사를 온 것이 그렇게 되니까요.” 이렇게 경제 행위에 대한 고백이 나온다. 또 1954년 아니면 1955년 12월 30일로 추정되는 일기를 보면, “어쩌다가 얻어걸리는 미국잡지의 번역물을 골라 파는 일”에 대한 괴로움이 토로된다. 이런 직접적인 생활에 대한 인식이, 김수영의 시적 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시에 반영되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것보다 강력한 증거는 당연히 「바뀌어진 수평선」이다. 재론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경제행위를 하면서 느꼈을 “경박”은 그의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줬던 것 같다.

김수영의 시가 난해한 이유 중 하나는 직접 겪은 현실의 물리적 층위에서 시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의 현실을 해석·인식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의 층위에서 시를 시작한다. 「백의(白蟻)」는 그러한 해석·인식의 과정을 몇 번 더 거친 다음에 쓴 작품으로 보인다. 대단히 난해하지만 낯선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에는 분명 긍정의 정신이 배어 있다. 그가 처한 아이러니한 상황,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 근대가 강요하는 분열증적 사태를 김수영은 회피하지 않는다. “백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백의와 간통”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이런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분열증적 사태는 자본주의 근대의 핵심적 속성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도리어 시의 화자를 “시인이 아니다”고 선언하지만, 시인이다/아니다는 규정은 시인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다. 현실을 대하는 시인 자신의 태도에 그것은 달려 있다.

이 작품은 반전에 반전, 그리고 어떤 접속사나 정황 암시 없는 아이러니를 묘사한 데다가 연극적 요소를 기입해 난해성을 최대한 부풀리고 있다. 분명히 이런 시작법은 독자들을 질리게 만든다. 복잡하게 뒤엉킨 현실과 그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의 소용돌이 같은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자칫하면 어떤 시적 질환을 배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다. 이 작품은 패배적이거나 허무적인 뉘앙스를 갖지 않는데 활달한 목소리와 거침없는 발화들은 “백의”에 대한 건강한 태도 때문이다. 산문과 시 사이를 솜씨 있게 유영하는 방식은 김수영 시의 주요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에게 필요 이상의 난해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지점에서 김수영이 독자들을 골려 먹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백의(白蟻)」는 그중 하나다.

쉽지는 않지만 「백의(白蟻)」 앞에 실린 「여름 아침」이나, 멀리 갈 것도 없이, 1년 뒤에 쓴 「봄밤」 같은 건강하고 빼어난 시를 그가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삶도 시도 그가 시시포스의 돌처럼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달나라의 장난」) 때문일 것이다. 삶과 시를 그는 매번 다시 쓰려 했고, 그것이 결국 그의 시를 매번 난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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