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2) 내 이 더러운 학교 우리아들 안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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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류동인 씨가 기억하는 1987년의 기억을 매주 수, 목요일 연재합니다.]

<1987>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려고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과 장소의 중심으로 보이는 것 같은 지점들 외에도 수많은 ‘1987’의 중심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치열한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런 것들과 별 상관없이 살아가는 듯한 삶들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치열하다’ ‘비겁하다’라고 해석된 가치적이고 윤리적인 삶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다양한 삶을 관통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긍정과 욕망의 흐름, 그것의 표현으로 기쁨, 즐거움, 신명남, 매력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삶이 치열함, 숭고함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 순간의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긍정의 힘을 같이하고 있는 성주주민들의 투쟁과 삶에서 또한 느낍니다. 이는 매우 오래된 습속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감각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드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나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러니까 청주교도소에서 탈옥 계획까지 하게 된, 내가 감방 생활을 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학생운동 등 민주화운동이 한참이던 1984년 일이었다. 나는 경북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조직은 ‘민주화추진위원회’라는 조직으로 전국적 연대를 하고 있었다. 경북대도 ‘경북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경민추)’라는 조직이 있었다.

전두환 방일반대 시위를 계획했다. 나와 선배가 시위 물품을 만들기 위해 대구 칠성시장에서 전두환 화형식을 위한 허수아비 제작에 필요한 물품을 사서 학교로 들어오고 있었다. 학교당국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학생회관 현관에 교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편집자 덧붙임. 1984년 8월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등 3개 대학은 ‘전두환 매국방일반대 연합시위’를 벌였고, 그해 9월 3일 경북대 민주화추진위원회 발족식이 열렸다. 9월 6일 경민추는 신군국주의, 식민주의 관 화형식을 진행했고, 이 사건으로 재학생 2명 제적, 3명 무기정학, 3명 유기정학 징계가 내려졌다.) 

나와 선배가 잡히고 물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싸움을 하다가 탈진해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교직원과 교수들이 서른 명 남짓, 바닥에 누워있는 우리를 둘러쌌다. 실눈을 뜨고 쳐다보니 지도교수도 와 있었다. 내가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선배가 나보고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가라고 눈짓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변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고 있던 여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어떻하노 기절했는 모양이다.”
“그렇지, 우짜노”

기절했다고 하는데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기에는 너무나 염치없는(?) 상황이었다. 진심으로 이야기하지만 내가 거기에서 나오지 않고 비타협적(?)으로 버텼던 것은 조국의 민주화 또는 물품을 꼭 사수해야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쪽 팔릴 수는 없었다.

시간이 제법 되었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연락했는지 아버지가 학교까지 달려왔다. 당시에는 시위하는 학생들을 막기 위해서 시위에 참여하는 부모님에게 연락해서 자기 자식을 데려가도록 하고는 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도 여학생 동기가 시위대열에 있다가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현장에 도착한 아버지는 그분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셨다.

“동인아 괜찮나?”
“예”
“이런 것들이 교수가? 내 우리 아들 이런 더러운 학교 안 보낸다. 가자”

아버지는 주변에 있던 교수들과 교직원들을 째려보셨다. 아버지는 누워있던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나도 슬그머니 아버지 손을 잡고 일어났다.

광주에서 큰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하나 남은 아들이 너무나 걱정되셨던 것 같다. 몸이 편치 않고, 기억력도 쇠퇴한 아흔이 넘으신 지금도 집에 찾아가면 침대에 누우셔서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주신다.

“우리 아들 잘 생겼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잘생긴 것은 맞다.

그 뒤로 나는 소위 ‘권고휴학’이라는 것을 당했다. 권고휴학이란 제적을 당할 것인지 아니면 휴학하고 그 상황을 모면할 것인가 양 갈래 선택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강제휴학이었다.

‘경민추’가 ‘삼민투(삼민헌법 쟁취투쟁위원회)’로 바뀌었다. 삼민투 위원장은 2년 위 선배가 맡았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마음은 간절했지만, 선뜻 운동에 온전히 참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삼민투 위원장을 맡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경북대학교 북문 앞은 주요한 시위 장소였다. [사진=경북대신문]

하루는 시위대열이 학교 북문으로 가서 시위하는데 그 선배보고 그보다 1년 위 선배가 교문 기둥 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그 선배가 얼떨결에 올라가서 있으니 밑에서 메가폰을 던져주었다. 메가폰을 받고서도 멀뚱하게 있으니 1년 위 선배가 밑에서 그를 보고 말했다.

“야! 그냥 있으면 우짜노? 주께야지”
“???”

삼민투 위원장이 된 선배의 말솜씨는 사실 청산유수였다. 그 선배와 오리라는 별명을 가진 지금까지 꾸준히 인권운동을 하는 선배, 그리고 지금은 브라질에서 건설업을 하는 선배 세 명이 모여 떠들면 주변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그렇게 시끄러운 말솜씨로 졸지에 소위 ‘동’을 뜨게 된 것이다. 동을 뜬다는 말은 주동자가 되어 시위를 이끈다는 것이었다. 이 선배에 대한 에피소드 또한 많다. 교도소에서 학교 후배인 경비교도대로부터 담배를 뺏어서 그걸로 장사했다는 둥 믿기지 않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그렇게 휴학 중에도 여전히 학교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탁월한 ‘몸조’였다. 화염병 만들기, 현수막 쓰기, 시위용품 만들기, 시위가 있으면 앞으로 나가 화염병 던지기, 각목, 쇠 파이프 이런 것들로 싸우기 등이 주로 내가 하던 일이었다.

이런 우리를 보고 ‘단과반’이라고 불렀다. 단순과격의 줄임말이다. ‘종합반’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있었다. 유인물 내용을 쓰거나 조직을 관리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구분은 당시에 서로 자기가 종합반이라고 우기거나 아니면 상대를 단과반이라고 주장하며 서로가 잘난 척을 하는 재미있는 농담이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