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3) 공포의 쇠파이프 2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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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1 20:35 | 최종 업데이트 2018-01-31 20:39

[편집자 주=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류동인 씨가 기억하는 1987년의 기억을 매주 수, 목요일 연재합니다.]

<1987>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려고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과 장소의 중심으로 보이는 것 같은 지점들 외에도 수많은 ‘1987’의 중심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치열한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런 것들과 별 상관없이 살아가는 듯한 삶들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치열하다’ ‘비겁하다’라고 해석된 가치적이고 윤리적인 삶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다양한 삶을 관통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긍정과 욕망의 흐름, 그것의 표현으로 기쁨, 즐거움, 신명남, 매력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삶이 치열함, 숭고함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 순간의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긍정의 힘을 같이하고 있는 성주주민들의 투쟁과 삶에서 또한 느낍니다. 이는 매우 오래된 습속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감각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드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나에게 큰 힘이 됩니다.

시위가 있으면 나와 항상 한 조를 이루어 다니던 1년 후배가 있었다. 그가 페북에서 가끔 ‘단과반’ 시절 정체를 뽀록내는 ‘낮달 정정현’이다. 낮달은 무슨, 제비같이 희멀건 모습이나 하는 짓으로 볼 때면 ‘건달’이 훨씬 어울릴 것 같다. ‘건달 정정현’ 아 그의 별명이 ‘제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나의 정체를 뽀록냈기에 특별히 소심한 복수와 더불어 그의 실명을 쓰기로 했다. 그와 나는 다른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매우 자주 조를 이루며 어울려 싸웠다.

‘공포의 쇠파이프 2인조’ 그는 중학교 때까지 야구선수를 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돌을 던지면 다른 이들 보다 두 배는 더 나갔다. 화염병은 미식축구공처럼 회전하면서 날아갔다. 그것 또한 당연히 두 배로 날아갔다. 나는 정현이가 돌이나 꽃병(화염병)을 던질 위치를 손가락으로 찍어줬다.

“정현아 저기”
“예 형님”

주로 타깃은 전경의 진압대열 뒤쪽에서 확성기를 들고 지휘하던 기동대 중대장 등이다. 그의 투석과 투병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그가 던진 것들은 날아가서는 안 될 곳, 그들이 안심하고 있던 곳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그 때문에 벌어진 상황, 화들짝 놀라는 그들의 모습에서 쾌감이 생겨나는 것은 분명했던 것 같다. 타격 자체가 아니라 안전의 영역, 돌이 날아와서는 안 되는 지점을 뚫고 들어가는 것에 대한 쾌감이었다.

대구에 있는 대학교에서 싸우기 가장 좋은 곳은 영남대였다. 최루탄을 아무리 쏴대도 정문이 워낙 넓어 한쪽으로 피하면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기동대가 진압을 위해 진입하지 않는 한 각목이나 쇠파이프로 싸우는 백병전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기동대의 장갑차가 최루탄을 쏘기 위해 영남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나와 정현이가 각각 쇠파이프를 들고 장갑차 앞 유리창에 붙어있던 쇠창살을 붙잡고 차량 앞쪽에 올라탔다.

그리고 창살 사이로 파이프를 찍어 넣어 유리창을 깨려고 했다. 유리창은 방탄에 가까웠지만, 그 충격에 조금씩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놀란 장갑차 운전사가 급하게 차를 뒤로 후진시켰다. 차량 뒤에는 숨어서 최루탄을 쏘아대던 전경들이 있었다. 그들이 차에 깔릴 처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들이 급하게 차에서 뛰어내렸다.

“스톱, 정지, 야 임마 전경들 깔린다.”

오히려 우리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다행히 별다른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구속된 후 정현이도 다른 사건으로 경찰에 잡혀갔다고 한다. 정현이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내놓은 자료에 정현이와 내가 시위하면서 찍힌 사진이 앨범으로 3권이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채증사진은 열심히 찍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사진 속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새끼는 즈그 학교도 아니면서 와 남의 학교서 이래 지랄하노?”
“이 새끼 꼭 내 손으로 잡아 처넣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나는 이미 방송국 방화미수사건(편집자 덧붙임_1985년 5월 18일 류동인, 최윤영, 이상재 등 대구지역 대학생 3명은 5.18 왜곡에 대한 항의를 위해 대구KBS에 화염병을 던져 공용자동차 방화미수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으로 구속되어 버린 뒤라 그들의 그런 애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경찰들도 우리 쪽을 빠삭하게 알았고 요즘처럼 꼭 증거가 제출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마스크로 가리는 것이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다만 최루탄의 효과를 약화시키기 위해 치약을 코와 눈 밑에 바르거나 랩을 눈 위로 덮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남대에서는 옆으로 비키면 그만이라 그런 것들조차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고스란히 찍힌 잘생긴(?) 인물사진이 그들에게 제공되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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