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칼럼] 낯설거나, 친밀하거나 가해자는 가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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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2 17:54 | 최종 업데이트 2018-02-12 17:54

지난주 백악관의 대통령 비서관 2명이 연달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결혼 생활 중 배우자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7일 사임한 선임비서관 롭 포터는 대통령 비서실장인 켈리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에게 어떤 정보와 문서를 전달할지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진 백악관의 실세이자 떠오르는 스타였다. 그는 2번의 결혼과 2번의 이혼 전력이 있는데, 전 부인 모두 결혼 기간 포터에게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포터가 사임한 지 이틀 후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온 또 다른 비서관은 데이비드 소렌슨이다. 연설문 담당 비서관이었던 소렌슨 또한 결혼 생활 중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 폭로됐다. 그의 전 부인에 따르면 소렌슨은 그녀를 벽으로 밀치고 머리채를 잡는 등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손을 담뱃불로 지지고 자동차로 발을 밟고 지나가 심각한 상해를 입히기도 했다.

처음 기사가 나오고 나서 포터는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음모라며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와 같이 일해 온 백악관 관계자들도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포터를 옹호하고, 가정폭력을 폭로한 여성들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는 것인 양 대응했다. 하지만, 그에게 맞아서 눈에 멍이 든 첫 부인의 사진이 공개되자 포터는 비서관 자리에서 스스로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일이 공개되기 전에 이미 비서실장 켈리를 비롯한 백악관 관계자들은 포터의 가정폭력 전력을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밀을 다루는 비서관직 수행을 위해 당연히 거쳐야 할 FBI의 신원조회 과정에서 포터의 전 부인들은 이미 그가 저지른 가정폭력에 대해 증언했었다. 그의 두번째 부인은 포터를 상대로 법원에서 접근금지명령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런데도 포터가 기밀을 다루는 백악관 비서관에 임명되고 승진하는데 그의 가정폭력 전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포터가 가정폭력이 아니라 술만 마시면 사람들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가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난 1년 이상 백악관에서 승승장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포터가 거짓 의혹을 받아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위로하며 그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러면서 포터가 ‘결백’을 주장하고 있고, ‘단순한 의혹’ 때문에 그의 커리어와 삶이 무너지고 있다며 포터를 옹호했다. 여성혐오주의자 답게 눈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여성에 대한 위로의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자신에게 성폭력 당했다고 폭로한 여성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운 것처럼 트럼프는 이번에도 여성들이 제시한 증거 사진도, 법원이 내린 접근금지명령도 다 거짓 의혹으로 매도해 버렸다.

ⓒpixabay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에 대한 폭력

친밀한 파트너 사이에 벌어지는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9초마다 1명의 여성이 매를 맞고 있고, 1분마다 스무 명이 다양한 형태의 가정폭력/데이트폭력을 경험하고, 매일 평균 세 명의 여성들이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하고 있다. 미국 여성 4명 중 1명은 살면서 가정폭력/데이트폭력을 경험한다.

특히 여성에 대한 살해 수치는 충격적이다. 2001년과 2012년 사이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사한 미군이 6,488명으로 알려졌는데, 같은 기간 미국에서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11,766명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가 여성들에게는 전쟁터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현실은 한국 등 세계 다른 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2016년 발생한 사건만 집계)을 검색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최소 82명으로 집계됐다. 살인미수로 간신히 살아남은 여성은 105명이다. 전 세계 여성의 약 70%가 살아가는 동안 배우자나 연인에게 신체적, 성적 학대를 경험한다고 한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폭력이 부부나 연인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도 만연해 있지만, 여성들이 이에 대해 입을 열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쉽지가 않다.

“모든 이들이 그를 사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은 (그의 부인인) 내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말해주었다. 그와 같이 외출할 때마다 모르는 사람들도 그를 칭찬했다”…“만약에 그가 괴물이었다면 그를 떠나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친절하고 민감한 사람이었다.”

포터의 두번째 부인이 지난봄 자신의 블로그에 가정폭력을 폭로하며 쓴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지난 며칠 동안 나온 기사들에 따르면,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 로즈 장학생을 거쳐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포터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내 주변 사람들에게 사려 깊고 친절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통해 왔다. 그런 그가 가정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포터가 특별히 예외는 아니다. 아내나 여자친구를 학대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상상과 달리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고, 심지어 포터처럼 선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많다. 오랫동안 가정폭력 사건을 다루면서 내가 만나본 가해자들은 인종과 민족,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대부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의 행동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말 맞았다면 왜 계속 참았냐고 피해자에게 묻는 것처럼 가혹한 일이 없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폭력적인 파트너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 전에 헤어질 시도를 평균 7번 반복한다고 한다. 가정 폭력의 가해자는 어두운 밤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괴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에게 폭력을 당하면 누구나 당장 경찰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이가 가해자일 때 피해자가 당하는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선택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쉽게 가해자를 떠나기 힘들어지도록 만드는 큰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다. 가정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경제력을 독점하고 이를 학대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여성들이 겪는 차별적인 임금과 고용 형태는 특히 노동계급 여성이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미국에서 여성이나 아동이 홈리스가 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가정폭력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구에서도 #MeToo(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미투(#MeToo) 운동이 더 확대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지난 10월 이후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 운동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 특히 일터에서 겪는 성폭력에 대해 폭로하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중적 자각을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전 칼럼: 여성에게 할리우드는 ‘꿈의 도살장’, 한국의 모든 직장은 ‘한샘’ 2017. 11. 13) 한국에서도 최근 서지현 검사와 최영미 시인의 폭로로 미투 운동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갑고 환영할 일이다.

일터는 공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차별과 폭력이 없는 일터에 대한 갈망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기 쉽다. 또한, 성폭력이 범죄라는 데 큰 이견은 없다. 물론 여기까지 쉽게 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 수많은 여성들이 앞장서 싸워온 결과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정이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종종 ‘사적’인 일, 당사자들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겨진다. 데이트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성폭력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 사회 곳곳에 공기처럼 만연해 있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두운 뒷골목이나 붐비는 대중교통에서 낯선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이든, 일터에서 나의 밥줄을 쥐고 있는 보스에 의해 가해지는 폭력이든,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파트너가 가하는 폭력이든 가해자가 그 누구이든 간에 여성에 대한 폭력은 결국 인권을 부정하는 일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가장 친밀한 사이에 벌어지는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이제는 드러내고 사회적으로 논의할 때가 왔다. 가정폭력이 여성 인권을 짓밟는 범죄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미 지난 12월 루시 매킨토시라는 유명 모델이 입술이 터지고 피가 묻은 얼굴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남자 친구임을 폭로하며 미투 대열에 동참한 바 있다. 백악관 비서관들의 연이은 사퇴를 몰고 온 이번 일이 일회적인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고 가정폭력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반대로 더 확대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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