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7)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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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저주와 설움과 공허로는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는 법이다. 오로지 이것들을 극복한 자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을 살 수 있고, “조용히 그의 둥지에서 알을 품으려”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02) 그런데 자신의 둥지에서 알을 품는 일은 어떤 고독을 동반하는데, 물론 그것은 병든 자로부터의 도피인 고독이며, 창조를 위한 고독이다. 이미 「네이팜 탄」에서 “창조를 위하여/ 방향은 현대―”라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김수영은 곧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에 있어서도 무시무시한 백의”를 실감하게 된다. 누구는 숭상만 하고 누구는 배척만 하는 “백의”를 김수영은 도리어 “진심으로 사랑”하고 드디어 “백의와 간통”에 이르게 된다.

니체가 말했듯 “위대한 사랑은 연민의 정 이상의 것이다. 위대한 사랑은 사랑을 할 자까지 창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조하는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혹하다.”(위의 책, 145) 다시 말하면, 사랑은 단순한 심리적 상태를 넘어서는 것이며, 그것은 창조의 에너지가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명제는 훗날의 김수영에게서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 채 되돌아온다. 이런 사랑의 의미 때문에 “백의와 간통”은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는 김수영이 무의식적으로 행한 ‘리얼리스트 선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질적인 타자와 접속 가능하다면 곧 “어떤 다른 점과도 접속될 수 있”다.(『천개의 고원』 「리좀」, 새물결) “백의(白蟻)”는 흐름이고 리좀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리좀은 존재 자체가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백의”가 된 자신에게 닥친 것은 다시 고독이 아니었을까? “친구들은 모조리 나를 회피하는 눈치이었”고 급기야는 “더러운 자식” “너는 오늘부터 시인이 아니다”고 “나”를 판결했다. 이때 솟아오른 작품이 「폭포」이다. 「폭포」에서 느낄 수 있는 메시지도 뉘앙스도 “강인성”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시는 청교도적 윤리의식에서는 절대 태어날 수 없는 작품이다. 오로지 넘치는 힘으로, 그리고 그 힘으로 기왕의 것들과 결별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한 작품이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폭포」 전문

이 시는 ‘범람’을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고독을 토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연과 2연 1행에서 3행까지는 바로 범람의 이미지들로 짜져 있다. 그리고 그 범람은 “고매”하기까지 하다. 3연은 그러나 “새로운 목표”를 향해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쉴 사이 없이 떨어”지는 일은 “금잔화도 인가도” 알아보지 못하는 고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고독은 “병든 자의 도피”가 아니라 “병든 자로부터의 도피”이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강조-인용자)”이라고 가정법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상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조건과 상황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진화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퇴화를 겪은 것만이 진화하고, 말하자면 안으로 말린 것만이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다”(『차이와 반복』, 267)라고 말한 이는 들뢰즈이다.) 무규정적인 상태로(“규정할 수 없는”) 굳이 정해진 목적을 두지 않고(“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중단과 계속이” 일치하듯 시간을 초월해(“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폭포가 고독을 얻었을 때, “곧은 소리를” 낸다. 여기서 “곧은 소리”는 고독의 형식(style)이다.

“병든 자로부터의 도피”로서의 고독은, 니체식으로 말하면, ‘힘에의 의지’가 외화된 것이고, 이 ‘힘에의 의지’가 펼쳐질 수 있는 전제 사항은 사물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힘에의 의지가 “가는 오솔길이요, 발자국”이다.(위의 책, 190) 하지만 “고매한 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양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195) 여기서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명백히 “고양”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김수영이 어떤 절정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르다. 분명히 김수영은 5연에서, 윤리적 결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은 소리”가 고독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윤리적 목소리로 받아들여졌다면 그것은 5연 탓이 크다. 하지만 지금 당장 김수영의 고독은 “나타(懶惰)와 안정”에게 가장 크게 위협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폭포」에 대한 시적 성과에 대해서 약간의 이견이 있는 줄 알고 있다. 김수영 특유의 속도감과 힘을 평가하자면 뛰어난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김수영 특유의 관념성을 지적하자면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1964년의 「난해의 장막」에서 김수영은 “도대체가 시라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자유를 행사하는 진정한 시인 경우에는 어디엔가 힘이 맺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힘은 초행(初行)에 있는 수도 있고 종행(從行)에 있는 수도 있고 중간의 어느 행에 있는 수도 있고 행간에 있는 수도 있다―이것이 시의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진정한 시를 식별하는 가장 손쉬운 첩경이 이 힘의 소재를 밝혀내는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 1965년에 발표된 산문 「예술작품에서의 한국인의 애수」에서 김수영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것 같으면 예술의 본질에는 애수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애수를 넘어선 힘의 세계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1968년의 산문 「시여, 힘을 뱉어라」는 부제 자체가 아예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이다. 특히 이 산문에서 제기된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언명은 그 자체로 ‘힘’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몸’이란 것이 사실 힘의 상호관계와 속도의 미분비적 비율로 생성된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밀고 나가는 것” 자체가 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힘은 생명의 본질로서의 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다른 것을 잉태할 수 있는 생식력으로서의 힘이기도 하다.

김수영의 말대로 “진정한 시를 식별하는 가장 손쉬운 첩경이 이 힘의 소재를 밝혀내는 일”이라면, 「폭포」에서는 2연과 3연이 이에 해당된다. 앞에서도 말했듯, 2연과 3연은 힘이 넘쳐 범람하는 언어적 형식이다. 범람하는 힘의 특징은 무규정적이고, 무목적적이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언제든 “쉴 사이 없이” 운동한다. 이 작품에서 “떨어진다”가 기표와는 다르게 낙하, 하강, 추락의 이미지가 아닌 것은 이런 이유이다. 다만 김수영은 이것이 곧 “고매한 정신”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즉 힘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고매”(고귀)한 일인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지적은, 1957년 작품을 그 훗날의 시론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한 일이냐는 것일 게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직 1957년은 김수영이 ‘힘’에 대한 인식을 얻기 이전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1957년과 1965~1968년 사이에 김수영에게는 엄청난 사건인 4·19혁명과 그 반동인 5·16쿠데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김수영의 급진적인 정치시는 4·19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의 극복과 자신의 극복을 동시적 문제로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4·19혁명이 일어나자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4·19혁명은 그에게 엄청난 도약대였지만 이미 김수영 자신이 도약대를 발명하는 도정에 들어선 다음 그 도약대가 그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혁명을 창조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이미 혁명적 존재로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폭포」는 그 관점으로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니체는 다시 “고매한 자”, “영웅”이 된 후의 휴식을 말한다. “그는 괴수를 제압하고 수수께끼도 풀었”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괴물과 수수께끼도 구제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는 그들을 천상의 어린아이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제 “팔을 머리 위에 얹고, 영웅은 이렇게 쉬어야 하며, 그렇게 하여 그 자신의 휴식까지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영웅에게는 아름다움이란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봄밤」이 일종의 ‘영웅의 휴식’인 줄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시의 화자가 자신에게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고,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고 자신을 다독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확실히 지금 그는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다. 그리고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명백해 보인다. 비록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즉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더라도 이제 그에게는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이다.

아직 자신은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라는 겸사(謙辭)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지만, “꿈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현실의 제한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서둘지 말라”의 반복이 단지 조바심을 다독이는 독백이었다면 작품 자체가 이렇게 활달할 리가 없다. 1연의 “무거운 몸”이 2연에서는 “나의 빛으로”, 다시 3연에서는 “귀여운 아들”로 변주되는 것도 또한 그것을 증명하거니와, 각 연의 마지막 행도 “오오 봄이여”에서 “오오 인생이여”로, 다시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로 변주할 때 우리는 각 언어들에서 어떤 부정적인 그림자를 느끼지 못한다. 도리어 반복과 변주를 통해 경쾌한 느낌마저 얻는다. 이런 느낌은 「채소밭 가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