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8) 슬기로운 기결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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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1 20:49 | 최종 업데이트 2018-02-21 20:49

형이 확정되자 기결1사라고 명명된 독방으로 이루어진 기결수 사동으로 전방(방을 옮기는 것)되어 또 다른 생활이 시작됐다. 1평 남짓한 독방으로 이루어진 사동이었다. 그곳에는 이십 수년째 수형 생활을 하는 장○○ 영감님,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들어온 이○○ 형, 어부로 납북됐다가 국가보안법으로 두 번째 수형 생활을 하는 최○○ 형, 그리고 절도범으로 들어왔다가 소위 ‘만세’를 불러 국가보안법 사범이 된 윤○○ 노인, 그리고 우리 3명이 있었다.

장○○ 영감님은 소년 빨치산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15년인가 살고 나갔다가 다시 잡혀 들어와 계속 수형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환갑이 넘었지만, 여전히 무언가 열심히 공부하고 계셨다. 때로 우리에게 요즘 바깥은 어떤가 묻고는 했다.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들어온 이○○ 형은 일본에서 유학원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온 학생들을 일본 대학에 연결해주는 사업이었다. 아마도 조총련 쪽 사람들하고도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사단이 됐다. 소위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터지면서 그를 거쳐 간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엮였다. 그도 한국에 들어왔다가 체포돼 7년을 선고 받았다. 그가 간첩이었다고 자백한 유학생 1명도 대구교도소에 같이 있었다. 하루는 운동하다가 우리가 운동하는 담 너머로 그 유학생이 보였다. 이○○ 형이 그를 보고 분통을 터트렸다.

“저 새끼 때문에 내가 …. 어휴”

그 유학생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황급해 이○○ 형의 눈길을 피해 오던 길을 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도망갔다. 아마 그 유학생도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간첩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고 ‘사상’같은 것은 발견할 수조차 없었다.

어부였던 최○○ 형은 인천 쪽에서 고깃배를 탔다가 배가 납북됐다. 우리보다 나이가 서너 살 많을 뿐이었다. 북한에서 돌아온 후 하루는 친구들이 불러 술을 사주면서 물었다고 한다.

“야 북한 어떻던데?”
“뭐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데지.”

그 말로 그는 국가보안법 고무찬양죄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형기를 마치고 나갔는데 또 친구들이 술을 사주면서 취하게 만든 후 같은 말을 물어왔고, 취기에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다시 4년을 선고받고 두 번째 수형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이것이 소위 ‘막걸리 보안법’의 전형이었다. 막걸리 마시다가 북한 이야기를 했는데 국가보안법이 되는 것이었다. 술을 사주고 그런 답을 끌어낸 친구들 뒤에는 실적을 올리려던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기관원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간첩죄는 이후 재심청구를 통해 모두 무죄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윤○○ 노인은 17년째 수형 생활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절도범으로 들어와 1년 6개월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교도소의 처우에 불만이 있어 항의했는데 들어주지 않자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

당시 국가보안법에는 불고지죄라는 게 있었다. 국가보안법을 인지하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됐다. 만세를 불렀는데 신고하지 않으면 교도관이나 그것을 보고받은 지휘계통이 국가보안법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었다. 교도소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수사당국에 고발해야 했다. 그렇게 고무찬양죄로 1년 6개월을 추가로 받았다.

보안법으로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검사에게 자신이 당한 교도소에서의 부당함을 이야기했지만 들어줄리 없었다. 그렇게 계속 만세를 불러 2년, 2년, 3년, 3년, 그리고 4년을 더 받아서 총 17년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는 독종이었다. 교도소에서 거꾸로 매달아 물에 처박아 놓아도 기절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뒤로 교도소는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어 더 이상 ‘만세’를 불러도 처벌되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는 우리가 있을 때도 불만이 생기면 ‘만세’를 불러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법을 위반하지만 처벌받지 않는 존재, 매우 이상한 존재가 생겨난 것이었다.

하루는 잡지 쪼가리를 들고 와 사진을 보여주면서 요즘 세상이 이러냐고 물어왔다.

“영감님, 이제 사고 그만 치고 밖에 한 번 나가보이소. 뭐 나갔다가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들어오면 되잖아요.”
“그럴까?”

어디서 났는지 그의 방에는 먹지도 않은, 무척이나 오래된 건빵이 쌓여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특별면회를 왔다. 특별면회는 일반 접견실에서 하는 면회와 달리 보안과나 교무과 등에서 직접 만나 면회하도록 해주는 특혜였다. 나와 부모님의 특별면회는 조금 편한 교무과에서 했다.

어머니가 잡채, 갈비, 전, 사라다 등 잔치음식을 잔뜩 해서 오셨다.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감방 안 동료들이 마음에 걸렸다. 몰래 알루미늄 호일에 쌓인 갈비를 러닝셔츠 안으로 집어넣었다. 배에 꺼끌거리는 호일 감촉이 느껴져 왔다. 교도관과 교무과 직원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만, 적극적으로 저지하지는 않았다. 대충 모르는 척해주었다. 그래 봤자 다섯 토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동으로 돌아와 동료들과 사동에 있던 이들에게 한 토막씩 나누어주었다. 공범인 이○○ 형이 다 먹고는 소리를 지른다.

“동인아 더 없나?”
“그래”
“이빨 사이에 낑기고 없다.”

그의 그 큰 입과 배에는 턱도 없는 양이었을 것이다. 그는 입이 컸다. 나와 선배는 그것으로 자주 놀려댔다. 마당에 갓 피어나는 싹을 보면서 이야기한다.

“야 입 크다. 입 커”
“우씨”
“아니, 니 입 말고 저 잎”

그렇게 키득거리며 기결수 생활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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