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8) 필경 내가 아직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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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5 12:09 | 최종 업데이트 2018-03-05 12:10

[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과연 1959년에 들어와 남긴 김수영의 작품은 대체로 부진을 면치 못하는데, 반복해 말하자면, 삶의 건강을 잃는 순간에 김수영의 시는 난삽해지는 경향이 있다. 난삽이 문제라기보다 그의 말을 그대로 적용하면, 시의 어느 부분에서고 힘이 맺히질 않는다. 「모리배」의 경우, “모리배(謨利輩)들한테서/ 언어의 단련을 받는다”고 호기롭게 말하고 있지만, 결국 “언어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따라서 2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이데거를/ 읽고” 하는 문장도 가장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히 “나의 팔을 지배하고 나의/ 밥을 지배하고 나의 욕심을 지배”하는 존재는 현실 속에 득실거리는 “모리배”들이라는 냉철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은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우리가 패배주의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김수영에게 피로가 찾아온 것일까? 「생활」에서는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면서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는 자학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즈음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쉽게 예단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1959년에 들어와서 김수영의 내면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은 1959년 한 해에 쓴 시를 검토해보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달밤」 같은 시에서도 그 점은 쉽게 확인된다. 심지어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면서 “서슴지 않고 꿈을 버린다”면서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고까지 한다. 따라서 이런 정서 상태에서 쓴 작품 중 하나인 「사령(死靈)」을 두고 최하림처럼 “사실상 4·19를 맞을 내면의 준비를 끝마치고 있는 셈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작지 않은 오독이다.

분명히 「사령(死靈)」의 처음은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는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로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 연 마지막 행을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로 약간만 변주한 채 처음을 반복함으로써 시의 화자는 자기 조롱과 자기 학대를 동시에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또 “마음에 들지 않아라”의 반복은 시의 화자가 처한 어떤 무기력증을 자탄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다만 이 작품에는 퇴행의 징조를 보이는 자신에 대한 준엄한 물음이 있다. 그러니까 김수영은 자신의 건강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단지 자신의 “정치적 행동의 부재”(최하림) 때문일까?

반대로 “정치적 행동”의 개입이 완전히 봉쇄된 그 당시의 정치적 조건에 더 큰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딱히 김수영에게 “정치적 행동”이 체질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1959년 상황, 즉 이승만 정권이 말기적 상황에서 정치적 상상력은 물론이거니와 시적 상상력마저 질식사할 것만 같은 것을 김수영은 느꼈을 것이다. 「조그마한 세상의 지혜」에서 “조그마한 세상의 지혜를 배운다는 것은/ 설운 일”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내일이 되면 포탄이 되어서/ 휘황하게 날아가야 할 지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조그마한 세상의 지혜”만 있다면 “작렬할 지점을 향하여/ 지극히 정확한 각도로 날아가는/ 포탄”은 그러나 위험한 일인데, “원한이 솟는 가슴속에서 발사되는/ 포탄은” 단지 혼자 “어두운 하늘을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참기 힘든 분노와 원한 감정으로 가득 차 보이는 이 작품을 보면 그러나 “승패의 차이를 계산할 줄 아는” “이성”을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때 당시 현실에 대한 김수영의 내면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데에는 손색이 없다. 특히 “「너의 자결(自決)가 같은 맹렬한 자유가/ 여기 있다」”는 결구는, 결국 “조그마한 세상의 지혜”마저 그 지혜의 소유자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1959년의 상황이 엄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밭 가에서」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보여주는 것도 역시 피로의 정서이다. 「파밭 가에서」에서 읽히는 것은 일종의 체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봄밤」에서 보여줬던 생기와 기쁨은 보이지 않고,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의 반복을 통해서 시의 화자는 한발 비켜서 있으려는 무의식을 내비치고 있다. 특히 3연의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는 그 의심을 더 확고하게 한다. 일단 작품의 구조와 호흡이 닮았다는 면에서 「파밭 가에서」는 「봄밤」과 같이 읽을 만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정동은 확연하게 다르다. 「파밭 가에서」와 비슷한 시기에 쓴 「싸리꽃 핀 벌판」도 이 당시 김수영이 가졌던 피로와 설움을 밑받침해준다,

그 전해인 1958년의 「사치」에서 김수영은 자연과 이웃에 기대는 어떤 낙관을 보여주었었다. 예를 들어 “자연이 하라는 대로 나는 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이 느끼라는 대로 느끼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앞에서 또 “새로 파는 우물전에서 도배를 하고 난 귀얄을 씻고 간 두붓집 아가씨에게/ 무어라고 수고의 인사를 해야 한다지” 하며 명랑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도 보여줬다. 물론 이 작품은 ‘아내의 몸’에 대한 솟구치는 생기를 표현한 작품이지만 일반적으로 ‘모더니스트’라는 이미지 안에 갇힌 그에게 자연주의적 낙관도 생생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작품마다 숨어 있는 어떤 비밀을 읽어내지 못하는 한 김수영을 모더니즘의 흐름이라는 문학사 속에 박제화시키는 우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사치」에서 보여주었던 자연을 통한 나름의 생기가 「싸리꽃 핀 벌판」에 와서는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 당시 김수영이 가졌던 “피로”의 깊이가 전해에 비해 훨씬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것은 “문명”과 “형이상학” 같은 어휘의 등장일 것이다. 어쩌면 이 당시 김수영은 추상적인 ‘문명 비판’과 형이상학적 관조의 자리로 후퇴할 의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야(凍夜)」에서 “개울은 달빛으로 얼음 위에/ 얼음을 놓았는데” “내가 비는 것은” “그 얼음이 더 얼라는/ 내일의 주부(呪符)이었다”는 자기포기 냄새가 나는 진술과 「미스터 리에게」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그것을 추측하게 한다. 「미스터 리에게」에서 나타나는 “「태양이 하나이듯이/ 생활은 어디에 가보나 하나이다”는 환원주의적 관점에 이어,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는 진술에서 김수영이 구체성의 세계에서 얼마간 비켜서려는 태도도 읽힌다.

그렇다고 해서 이즈음의 김수영이 현실에 등을 돌리며 노골적인 퇴행을 감행한 것은 아니다. 침몰하지 않으려는 의지만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병을 생각하는 것은
병에 매어달리는 것은
필경 내가 아직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비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저 광막한 양지 쪽에 반짝거리는
파리의 소리 없는 소리처럼
나는 죽어가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_「파리와 더불어」 부분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아직은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이 병에 걸리는 일은 확실히 “비애”를 심어준다. 확실히 “비애”라는 정서는 깊은 격절감을 느낄 때, 또는 건강과 병이 공존할 때 발생한다. 물론 비애는 부정적 정서이지만 비애가 아니라면 건강과 병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다. 거꾸로 건강과 병을 동시적으로 느끼는 것 자체가 비애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비애”가 “죽어가는 법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은 확실히 건강의 증표이기도 하다. 이런 건강이 없었더라면 김수영에게 1960년의 사건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4·19혁명을 혁명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상태가 조금 더 지속되었다면 김수영은 그저 그런 딜레탕트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4·19혁명이 “병”을 얻은 김수영을 구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수영 자신이 이미 1950년 후반에 들어와서 ‘혁명적 존재’가 된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1959년 어름에는 자신의 존재 양태와 현실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무력감과 비애 등이 다시 엄습했지만, 만일 그가 정말 소시민적인 삶에 전전긍긍하기에 바빴다면 4·19혁명을 그렇게 맹렬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며, 4·19혁명을 맞아 빤한 행사시만 남겼을 것이다. 전쟁의 막바지에 쓴 「달나라의 장난」에서 말했듯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1950년대 내내 잊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이 보이지 않는 시기에 ‘혁명적 존재’가 되는 일만큼 혁명적인 사건은 없다. 혁명적 존재가 되는 일은, 창조와 생성을 그치지 않는 일이다. 이 말은 다시 김수영식으로 번역하면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야 주어진 현실적 조건에 불퇴전의 자세를 가질 수가 있다. 「기호와 사건」에서 들뢰즈가 “혁명적인 존재가 되기 시작해야 치욕을 불사하고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1956년 즈음부터 김수영에게 현실은 “치욕”을 강요했던 사실은 그의 시를 통해서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지금껏 구성된 전집에 의하면 1950년에는 그럴듯한 산문 한 편이 없다. 오로지 1950년의 김수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도 그가 처한 구체적 현실과 어떻게 대결하면서 나아갔느냐는 내재적 관점이 필요하다. 김수영이 리얼리스트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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