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팀추월 ‘피해자’ 노선영이 옳았다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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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10:06 | 최종 업데이트 2018-03-12 10:06

지난달 막 내린 평창겨울올림픽에서 컬링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던 경기는 스피드스케이팅 여성 팀추월이었다. 동료 노선영 선수를 따돌린 듯한 모습을 보인 김보름, 박지우 선수가 거센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두 선수에 대한 국가대표 자격 박탈 요구에는 순식간에 61만여 명이 동참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사상 최다 추천을 받은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 씨 출소 반대 청원에 버금가는 추천 수다. 김보름을 광고 모델로 내세우고 용품을 후원해온 한 아웃도어 브랜드는 누리꾼들의 거센 비난이 몰리자 올림픽을 끝으로 김보름과 후원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빙상 선수에게 아동 성폭행범과 버금갈 정도로 거센 질타를 안긴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첫째, TV 화면을 통해 경기 모습과 인터뷰 등을 봤을 때 김보름, 박지우가 팀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버리고 본인들만 앞서간 점이다. 특히 훌륭한 팀워크로 은메달을 따낸 남성 팀추월 경기 모습, 팀추월 경기를 하면서 뒤에 처진 선수를 밀고 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네덜란드의 스피드 스케이팅 전설 스벤 크라머 등의 사례와 견주어 비난의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둘째, 김보름, 박지우가 경기가 끝난 뒤 고개 숙이고 있는 노선영을 달래주지 않고 인터뷰에서 동료를 비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점이다. 이 두 가지 이유는 결국 ‘동료애와 인성이 결여된’ 김보름, 박지우가 노선영을 따돌림했다는 결론으로 수렴된다.

셋째, 빙상연맹의 고질적인 파벌 문제다. 특정 대학이나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뭉친 파벌에 속한 선수들끼리 특혜를 공유하고 끼리끼리 훈련을 하면서 파벌 밖에 있는 실력 있는 선수들의 능력을 사장시키거나 따돌림한다는 얘기다. 앞서 두 가지 이유에서 김보름, 박지우에게 ‘동료애와 인성이 결여됐다’는 지적은 김보름, 박지우가 빙상연맹 특정 파벌의 자장 안에서 혜택을 받았다는 의혹과 만나서 보다 구조적인 문제로 발전한다. 개인의 인성 문제만이 아니라 애초부터 공정하지 못한 시스템이 존재했고, 그 시스템 안에서 따돌림이 발생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김보름, 박지우 국가대표 자격 박탈 국민청원 답변에서 청와대 김홍수 교육문화비서관이 “예전에는 금메달만 따면 그 과정의 문제점은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국민들은 성적이나 결과보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공정했는지, 투명했는지 여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한 이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김보름, 박지우의 ‘동료애와 인성 결여’ 문제를 두고 다른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경기 당일 TV 인터뷰에 연이어 열렸지만, 중계로 공개되지 않은 믹스드존(공동취재구역) 인터뷰를 보면, 김보름이 노선영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되레 “노선영이 아쉬운 게 많을 것”이라고 얘기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아울러 노선영을 달래주지 않은 것도 그를 따돌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선영이 선배 선수이다 보니 먼저 다가가기 어려웠다는 점도 반박 논거로 제시됐다.

이 때문에 노선영이 출연한 지난 8일 SBS 시사 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서 누리꾼들이 기대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김보름, 박지우의 ‘동료애와 인성 결여’를 증명할만한 경험적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빙상연맹의 구조적인 문제를 고발할 수 있는 파벌이나 비리와 관련한 ‘적폐’다.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2018년 3월 8일 방송 중 갈무리.

그런데 노선영이 이 방송에서 던진 핵심 메시지는 누리꾼들의 기대를 외면했다. 그는 김보름, 박지우 같은 개별 선수의 ‘동료애와 인성 결여’ 문제를 지적하지도, 빙상연맹의 파벌이나 비리를 밝혀낼 결정적인 ‘적폐’를 고발하지도 않았다. 다만 노선영은 “메달을 딸 수 있는 종목에만 더 신경을 쓰고 집중하는” 빙상연맹, 그리고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엘리트 중심주의가 바뀌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빙상연맹의 사례를 중심으로, 뛰어난 실력을 갖춰 성공 가능성이 높은 이만 집중 지원하는 한국 사회의 성과 중심주의와 효율성 중심주의라는 근원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여론은 서서히 김보름이 아니라 노선영을 겨냥하고 있다. 누리꾼들은 노선영의 지적이 공허하다고 질타하고 나섰다. 질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국민이 낸 세금을 지원받아 운영되는 빙상연맹이 세금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메달권 선수에게 집중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노선영은 원래 실력이 떨어져 지원받을 자격도 없으면서 피해자인 척 언론 플레이를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6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TV에 짧게 등장한 인터뷰 모습과 순간을 포착한 사진 몇 장으로 두 명의 선수를 아동 성폭행범과 동일한 자리에 놓아둘 만큼 거세게 비난한 어떤 확증편향의 사례다. 앞서 말했듯, 6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김보름, 박지우를 아동 성폭행범과 동일한 자리에 둔 지 채 2주도 지나지 않아 두 선수의 ‘동료애와 인성 결여’를 해명할 반박 팩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만약 김보름, 박지우가 노선영을 따돌림한 것이 사실이라도 해도, 그들이 그렇게 된 문제의 근원은 그들의 ‘동료애와 인성 결여’가 아니라 그들을 성과 중심적이고 자기만 아는 엘리트로 만든 빙상연맹, 그리고 한국 사회에 있다. 그런 점에서 노선영의 따돌림 피해가 있었든 없었든 한국 사회는 먼저 노선영이 방송에서 한 말부터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사안이 청와대 비서관의 말처럼 단순히 ‘과정의 공정성’을 회복하는 선에서 풀어갈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받지 못한 피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피해자되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정하게 평가받을만한 일정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노선영의 경우, 애초부터 김보름, 박지우와 견줘 실력이 모자랐던 것으로 누리꾼들에 의해 ‘판명’ 나면서, 급속도로 피해자의 자리에서 축출당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노선영은 피해자가 될 자격조차 없으면서, 엘리트 중심주의나 성과 중심주의라는 해결이 요원한 구조적 문제나 지적하는 것으로 면피하는 ‘가짜 피해자’인 것이다. 과정의 공정성 회복보다 더 중요한 건 이렇게 능력이라는 특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자에게만 공정함의 세계를 적용하려는 한국 사회의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김보름과 노선영 가운데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경쟁적으로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일보다 더 심각하게 살펴야 할 건 바로 이런 문제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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