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준의 육아父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미운 네 살

10:34

생후 36개월, 꽉 찬 네 살 아들 녀석. 그도 한때는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뽀얀 피부와 짙은 쌍꺼풀, 막내 특유의 애교 넘치는 말투와 행동. 종알종알 말은 어찌나 잘하는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두상까지 예뻤다. 부모 눈에 안 예쁜 자식 어디 있겠냐만.

거기에 성격까지 좋았다. 잘 웃어주는 밝은 아이, 무난하고 차분한 성격에 짜증이 별로 없었다. 애 치고는 참을성이 있다고 할까? 목욕을 시켜도 옷을 입혀도 ‘뭐 이쯤이야’ 하는 듯 별다른 저항 없이 몸을 맡겼다. 이런 아들에게 흠뻑 빠져 한 때 ‘딸바보’ 였던 나는 ‘아들바보’로 갈아탔다. 가는 곳마다 아들 자랑을 늘어놓으며 어릴 적 내 모습의 재림이라고 우겨댔다. 오죽하면 아내에게 “여보, 우영이 같은 아이면 하나 더 낳아도 되겠어”라고 했겠는가. 정말 키울 맛이 났다.

그랬던 아이가 달라졌다. 마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오는 아이 같았다. 방긋 웃는 귀염둥이는 어디 가고 까칠한 심술쟁이가 자리를 차지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만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아마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이런 게 아니겠나 싶다. 일단 “싫어”, “안돼”, “미워” 이 세 마디를 주문처럼 외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이 세 마디만으로 모든 대화가 가능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상황 1 : 밥 먹을 때 >
나 : “우영아 밥 먹자.”
아들 : “싫어.”
나 : “밥 안 먹으면 간식 안 줄 거야.”
아들 : “안 돼.”
나 : “우영이 말 안 들어서 아빠 이놈 해야겠다”
아들 : “아빠 미워!”

< 상황 2 : TV 볼 때 >
나 : “우영아 TV 그만 보고 아빠랑 놀자.”
아들 : “싫어.”
나 : “아빠 책 읽어줄까?”
아들 : “안 돼.”
나 : “안 되겠다. 아빠 TV 끈다.”
아들 : “아빠 미워!”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밥 먹을 때, 목욕할 때, 놀 때, 재울 때든 모든 대화가 이 세 마디면 된다. 물론 비극적으로 상황이 강제종료되는 것이 치명적이기는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무슨 설움이 그리도 많은지 눈에 가득 눈물을 머금고는 툭 건드리기만 하면 통곡할 기세다. 몇 차례 실랑이가 오가다보면 속상하고 답답한 나머지 어느새 나도 “싫어”, “안 돼”, “미워”를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심술쟁이 아빠와 아들의 한심한 설전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진다.

심술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호박에 말뚝 박는 놀부의 악행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쌓아놓은 블록 무너뜨리기, 누나 노는데 훼방 놓기, 물건 잡히는 데로 집어던지기, 침 뱉기(그래도 가래침은 아니다), 깨물기, 때리기. 수틀리고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떼를 쓰고 행패를 부렸다. 첫째 딸을 키울 때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심히 당황스러웠다.

딱딱한 물건을 집어 던지고, 흉기에 가까운 물건을 들고 설쳐대는 통에 위험천만한 아찔한 순간이 벌어지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가 때리는 게 얼마나 아프겠나 싶지만 온 힘을 다한 아이의 주먹은 제법 맵다. 눈 같은 곳을 잘못 맞으면 번쩍 별이 보이기도 한다. 화가 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해서 야단이라도 치면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도 잠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슬며시 장난인지 행패인지 모를 행동을 다시 시작한다. 장난인척 슬쩍 툭툭 치고 가는 속내를 들어보니 아까 혼을 낸 아빠에 대한 복수다. 복수심에 불타 이글거리는 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나쁜 것은 아빠를 꼭 빼다 박았다.

또 미운 네 살은 엄마에게 집착했다. 엄마 젖을 만지고, 쭈쭈를 달라했다. 아기 흉내를 내고 우는 시늉을 하며 사랑을 갈구했다. 잠결에도 엄마가 있는지 항상 확인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잠시라도 엄마가 사라지면 후다닥 뛰쳐나와 엄마를 찾았다. 아빠와 애착을 많이 형성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채울 수 없는 한 구석의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엄마 보고 싶어”, “사무실 안 갔으면 좋겠어.”를 연발하며 세상 가장 따뜻한 엄마 품을 항상 그리워했다. 그럴 때마다 미운 네 살 새끼가 너무 불쌍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좀 컸다고 아이에게 소홀했다. 아이가 미운 행동을 하는 것은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 엄마가 함께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아침에 잠이 덜 깬 아이를 엄마가 안아주고 달랬다. 출근 시간을 조정해 어린이집에도 엄마가 데려다주고, 아빠도 전보다 일찍 데리러 갔다. 전보다 많은 관심과 시간을 주었고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해주면 “예뻐서 주는 거야?”라고 묻고 심술 가득했던 얼굴에 웃음기가 조금씩 돌았다. 물론 아직까지 미운 네 살이 백조가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부족한 것이 있으니 불만이 생기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떼를 부린다. 좋고 싫음이 분명 해지고 고집이 생긴다. 누워있던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뛰기 시작하는 것처럼 당연한 성장의 과정이다. 다만 참는 법도, 기다리는 법도, 양보하는 법도 미운 네 살에게는 아직까지 너무 어렵다. 사실 아이가 미워지는 것은 육아에 지친 부모가 미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려 주지 않고 부모의 고집대로 끌고 가려는 조급함이 더 미워지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운 네 살, 미친 다섯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라고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다.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면서 미운 네 살이 다시 우리 집의 자랑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또 미워도 어떡할 텐가. 미워도 다시 한 번,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