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가 되살린 괴로운 기억, 이젠 옅어져” 대구도 ‘위드유’ 운동 시작

대경여연 미투 토론회, 100여 명 참석
미투 어렵게 하는 법적·제도적 문제 지적
미투도 어려운 이주·장애 여성 문제제기
대구, 공개 '미투' 집회 등 본격 '위드유' 나서

15:16

“미투 사건이 터진 후로 저는 기사조차도 읽을 수 없었어요. 다 제 이야기 같고, 얼핏 보이는 문장들이 다 제가 들었던 말이고,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어요”토론회 참석자 A 씨

15일 오후 7시, 대구시 중구 공익활동지원센터 상상홀에서 열린 ‘대구, 미투에 응답하다’ 토론회에 참석한 A 씨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았다. 참석자 100여 명이 숨 죽여 떨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A 씨는 ‘미투(#Me_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 기사를 일부러 피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재현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본인 이야기 같았다.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애써 잊고 살았던 기억을 미투 운동이 끄집어냈다는 생각에 한동안 힘들었다.

A 씨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론화했을 때 학교의 태도는 여러 절벽 중에 어느 절벽에서 뛰어내릴지 묻는 느낌이었다”며 “학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가해자와 교수들에 둘러싸여 합의 도장을 찍으라는 강요를 받았다”고 토로했다.

A 씨는 2008년 대구 모 대학원 재학 중 교수로부터 1년 동안 성폭력을 당했다. 여성단체 도움을 받아 사건을 공론화했지만, 합의를 강요받고 사건을 기억 속에 묻었다. 미투 운동이 벌어지면서 다시 사건 일지를 살펴봤다.

A 씨는 “항상 그때 일을 생각하면 자괴감이 들었다. 사건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것도 내 탓 같았다”며 “다행히 미투 운동 덕분에 늘 나를 따라다니던 괴로운 생각들이 연해지는 것 같다. 10년이 지난 지금 조금 더 바뀐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A 씨는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지난 10년 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미투 운동에 동참하면 성폭력 피해가 제대로 해결될 수 있을까.

성폭력 신고 창구 중구난방
무고죄·명예훼손 역고소 위협

흩어져 있는 성폭력 신고 창구와 가해자의 역고소 위협은 여전히 미투 운동을 어렵게 한다.

직장 내 성희롱 관련 법은 남녀고용평등법(고용노동부), 국가인권위원회법(국가인권위원회), 양성평등기본법(여성가족부)으로 나뉜다. 민간 기업이면 고용노동부, 공공부문이면 여성가족부에 신고할 수 있다. 학교에서 피해를 입으면 교육부로 신고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민간, 공공부문 모두 신고할 수 있지만, 국가인권위는 조사 후 가해자 처벌을 권고하는 데 그친다.

신미영 대구여성회 고용평등상담실장은 “신고 창구가 나누어져 있어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어디에 신고해야 할 지 모를 때가 많다. 범정부적인 대책 기구 마련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말했다.

더구나 직장 내 성희롱은 상급자에 의해 발생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가 직장에 끼칠 피해를 걱정하거나 우울증이 생기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성희롱 관련 법률을 설명하는 신미영 대구여성회 고용평등상담실장

김정순 대구여성의전화 대표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고죄, 명예훼손 제기 등 역고소 위협을 지적했다. 특히 가해자가 무고죄를 제기했을 때, 무죄와 무혐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순 대표는 “무혐의는 성폭력을 증명하는 데 실패한 조사 결과다. 죄가 없다는 무죄의 뜻이 아니”라며 “성폭력 피해 신고율은 여성가족부 기준 2.2%, 전국여성의전화 통계 기준 1.9%로 매우 낮다. 가해자 처벌에 대한 불확실성과 보복의 두려움이 신고율을 낮게 만든다”고 말했다.

신미영 실장은 “가해자가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해야 피해자들이 무고에 대한 두려움 없이 피해 사실을 문제제기 할 수 있다”며 “시민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미투’도 어려운 사각지대
이주 여성과 장애 여성

활발한 미투 운동 속에서도 성폭력 피해 경험을 더 말하기 어려운 사각지대가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이주 여성과 장애 여성의 사례가 나왔다.

최현진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 상담소장은 “비자에 따라 이주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다르다. 미등록 신분임을 알고 단속을 피해야 한다며 유인해 성폭력 당한 사건이 있었다”며 “체류권 제도가 이주 여성을 얼마나 열악한 상황으로 만드는지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주 여성 노동자들은 비닐하우스, 낡은 컨테이너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동료나 사업주에게 성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언어가 서툴러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기도 하고, 사업장 변경을 3번으로 제한하는 고용허가제 때문에 피해 사실을 알리기 어렵다.

최현진 소장은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참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며 “성폭력 피해 사실이 입증되면 사업장 변경을 위해 3개월 여유가 있지만, 그 동안 자신의 체류가 불분명해질까 하는 두려움도 크다”고 꼬집었다.

이정미 대구여성장애인연대 대표는 “여성 장애인 성폭력 피해 사건은 오래가고 애매하게 된다. 지적 여성 장애인의 낮은 인지력으로 진술이 오락가락하기도 하고, 피해자가 저항해도 가볍게 제지할 수 있다”며 “또 쉽게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라는 식으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에, 피해 여부를 판단하고 처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정미 대표는 장애 여성의 성폭력 문제에 대한 재해석을 제안했다. 이 대표는 “장애 여성 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은 노인이거나 장애 남성이다. 사회적으로 권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남성들이 자기보다 약한 장애 여성에게 위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권력형 성범죄라고 볼 수 있다. 성폭력 가해와 피해 원인을 장애가 있기 때문으로 부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미 대구여성장애인연대 대표

빨간 편지·홍벽서, 공개 ‘미투’ 집회
대경여연, 본격 ‘위드유’ 나선다
나쁜페미니스트, 17일 독서행동

미투 특별위원위를 꾸린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은 본격적인 ‘위드유(#With_you, 피해자와 함께하겠다)’ 행동에 나선다.

남은주 대구여성회 대표는 “지금까지는 피해를 고소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현재 미투 운동으로 우리는 가해자가 사회적으로 거세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며 “성폭력 피해 경험 없는 (여성들은) 없을 거다. 피해자, 목격자, 지지자와 함께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경여연 미투특위는 이른바 ‘붉은 편지’로 성폭력 가해자에게 피해 사실을 고발하고, 동성로 일대에 붉은 편지를 붙이는 ‘홍벽서’를 설치해 피해자들이 두려움 없이 성폭력 피해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오는 4월 7일 오후 6시 대구여성주의그룹 ‘나쁜페미니스트’와 함께 대구백화점 민주광장에서 “다 같이 싸우면 아무도 지치지 않는다”는 슬로건으로 공개 미투 집회를 연다. (미투 발언 신청은 여기로 하면 된다)

나쁜페미니스트도 다양한 위드유 행동을 이어간다. 이들은 오는 17일 오후 1시 대구백화점 민주광장에서 독서행동을 한다. 발언과 구호를 이어가는 무거운 분위기 집회가 아니라 앉아서 성폭력 관련 책을 읽는다. 또, 오는 21일 ‘우리는 안전한 공간에 있는가’를 주제로 집담회도 열 계획이다.

▲사진=나쁜페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