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글라스 해고 1000일, 해고노동자 일본 본사 원정투쟁기

해고 노동자 남기웅, 아사히글라스 본사 찾아 "해고 철회" 외치다
일본 아사히글라스 기업 노조는 외면했지만, 따뜻한 손 내민 일본 시민들

19:42

[편집자 주] 아사히글라스 집단 해고 1,000일이 다가옵니다.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2월 21일부터 3월 9일까지 일본 도쿄도, 오사카시에 있는 아사히글라스 공장을 찾아 해고 사태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원정 투쟁을 마쳤습니다. <뉴스민>은 6, 7일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 투쟁 일정에 동행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기사 ‘아사히글라스 해고 천 일, 해고노동자 일본 본사 원정투쟁기’는 해고노동자 남기웅 씨와 일본 원정 투쟁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의 투쟁을 응원하는 일본 시민들을 인터뷰한 기사, 아사히글라스 그룹의 역사를 다룬 기사가 연재됩니다.

각진 기와지붕(카와라부키), 집광판이 선로 주변에 듬성듬성 자리 잡았다. 전철 차창 밖으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봉분 하나 없이 묘비만 빼곡히 들어선 공동묘지도 이따금 스쳤다. 어느덧 3년 차 해고 노동자가 된 구미 아사히글라스 남기웅(34) 씨는 지난 2월 21일, 난생처음 이국땅을 밟았다. 풍경을 훑었지만, 기웅 씨 머릿속은 복잡했다. 대구지방검찰청이 아사히글라스 부당노동행위·불법파견에 대해 불기소했고, 복직 투쟁의 길은 까마득했다. 이제 기웅 씨는 일본 아사히글라스 본사를 방문해 작은 이정표라도 하나 만들어내야 했다.

일본 원정 투쟁 14일 차인 6일, 기웅 씨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2월 23일 도쿄 지요다구의 아사히글라스 본사에 한 번,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의 아사히글라스 사업소에 한 번, 아이치현의 공장에도 한 번 방문했지만, 아사히글라스 본사 관계자들은 어떤 의미 있는 말도 하지 않았다.

노조라도 만나 보려 했지만, 공장마다 있는 아사히글라스 기업노조를 만날 수는 없었다.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이 무너지고서, 일본의 노조는 대개 노사협조주의 성향을 띈다고 듣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난 9일 아사히글라스 치바 공장 노동조합 사무실을 찾은 남기웅 씨. 사전에 연락을 취했으나 문은 잠겨있었다.

담배에 손이 갔다. 흡연이 비교적 자유로운 점 하나는 좋았다. 기웅 씨는 함께 원정투쟁에 나선 송동주(34), 장명주(37) 씨와 수시로 담배를 태웠다. 이날은 아침부터 도쿄도 동쪽의 지바현으로 갈 채비를 했다.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아사히글라스 노조 대신, 같은 업계의 일본이타글라스 공투노조를 통해 유리제조 업계 정보를 알아보기로 했다. 기웅 씨는 담배를 피우며 편의점에서 산 일본판 박카스 ‘리포비탄’ 하나를 들이켰다. 치바현으로 향하는 전철, 이어폰을 꽂은 기웅 씨는 상념에 잠겼다.

‘나는 왜 팔자에도 없는 일본에 와서 금속노조 조끼를 입고 다니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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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남기웅 씨는 원치 않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건설 노동자인 아버지는 출근지가 일정하지 않았고, 섬유공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기웅 씨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할머니 집, 고모 집, 또 아버지 숙소로 옮겨 다녔다. 눈치를 봐야 했고, ‘우리 집’은 자주 옮겨야 했다. 반지하 월세방이라는 점은 늘 같았다.

기웅 씨가 처음 정착한 곳이 공장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판사가 되길 바랐지만, 기웅 씨는 공장 노동자가 됐다. 섬유공장에 나가느라 변변한 뒷바라지를 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기웅 씨를 학원에 보냈다. 기웅 씨는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대신 어릴 적부터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신문 배달, 목욕탕 청소 등 손에 잡히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단란주점 웨이터로 일하면서 한 데 얽혀 노는 판사, 검사와 깡패를 봤다. 판사는 시시껄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물네 살, 기웅 씨가 처음으로 들어간 공장은 엘지 냉장고 하청업체였다. 엄연한 직장이었지만, 불안정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공장에서 만난 형님들은 모두 기계로 찍어낸 듯 피로한 얼굴이었다. 출근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퇴근할 때도 같은 표정이었다.

가끔 다른 표정을 짓는 일도 있었다. 공장에 ‘사람을 자른다’는 소문이 돌 때였다. 나이 든 형님들은 가족이 있었다. 기웅 씨는 챙겨야 할 식구가 없었지만, 잘린다는 건 막연한 두려움을 줬다. 공장을 다닐수록 기웅 씨 얼굴도 그들을 닮아갔다.

2008년, 공장 사정이 어려워지다 폐업했다. 경남 창원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다 2011년 4월 구미공단의 LG 디스플레이 하청업체에 들어갔다. 일은 달랐지만, 신분은 같았다. 자신의 신분을 몸에 익히는 것, 기웅 씨가 하청업체를 옮겨 다니며 배운 것이었다. 잘리는 순간도 대부분 판박이였다. 공장에서는 나이 든 아주머니부터 시작해, 단기 아르바이트, 이주노동자 순으로 모습을 감췄다. 파리목숨이다. 잘려나가는 형님, 누님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이게 사람 사는 건가”

▲아사히글라스 공장 입구에 노조가 내 건 현수막.

옮겨 다닐 때마다 확신이 들었다. 가족 걱정에 찍소리도 못 내는 형님들을 보면서 처자식 만들 엄두는 애당초 나지도 않았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근로기준법이라는 걸 알았다. 주 40시간 노동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시키면 하루 14시간도 일했던 기웅 씨에게는 먼 이야기로 들렸다. 그보다도 불시에 날아들 파리채를 피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다가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인 GTS에 입사했다. 얼마간 일하다 노동조합을 만났고, 그래서 해고당하고,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싸우게 될 줄은 그때만 해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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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웅 씨 일행은 지바역에서 내렸다. 일본의 철도노조 중 하나인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도로치바노조) 사람이 나와 있었다. 도로치바노조는 총평 시절 가장 강력했던 국철노조가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노사협조주의를 선택할 때 떨어져 나온 노동조합이다. 도로치바노조의 도움이 없었다면 애당초 일본 원정투쟁을 올 수 없었다. 투쟁 일정 동안 정성을 보여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웅 씨는 단지 같은 노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는 도움이 먹먹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기웅 씨는 이들의 안내로 이타글라스 공장으로 향했다.

도쿄도의 동남쪽, 북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처럼 펼쳐진 지바현은 공장 밀집 지역으로, 해변을 따라 끝없이 공장과 고압 송전탑이 늘어섰다. 공장 사이로 이따금 파칭코도 보였다. 이타글라스 정문에 도착해 살펴본 공장은 낯이 익었다. 7세대 패널을 만드는 라인, 우뚝 솟은 세 개의 굴뚝. 패널을 만드는 공장을 보며 기웅 씨는 잠시 회상에 젖었다.

이타글라스 공투노조와 면담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정규직 위주 노동조합임에도 비정규직도 가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타글라스 노조 집행위원장인 시카마키 씨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을 보냈다.

▲이타글라스 공투노조와 아사히글라스 해고 노동자들. 제일 오른쪽이 시카마키 씨.

“일본 노조 운동 자체가 침체된 상태긴 합니다. 일본 아사히글라스 노조처럼 회사에 대항해 투쟁하지도 못하는 것이죠. 우리 회사에도 다수 노조는 투쟁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문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기업과 정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연대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간바레(힘내)!”

이타글라스 공투노조로부터 힘을 얻었지만, 기웅 씨 일행은 얼마 뒤 다시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지바현에 있는 아사히글라스 공장에서 또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사히글라스 해고 문제를 이야기해도, 미소를 띤 관리자들은 한국아사히글라스는 다른 법인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남색 재킷을 입은 아사히글라스 총무부 관계자들. 그리고 이들에게 해고 사태 해결을 요구하는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과 도로치바 노조 관계자들

아사히글라스노조에 협조 요청도 미리 보냈지만,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타글라스 공투노조는 비정규직 해고에 맞서 투쟁에도 나섰다는데, ‘노동자는 하나’라는 말이 허망해졌다. 제조업 공장 노동자 파견을 법으로 보장하는 일본에서 아사히글라스 공장 비정규직은 어떤 상황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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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웅 씨는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로서 억울함을 잘 알고 있다. 비정규직이 노조를 만들면 얼마만큼 압박이 오는지도 몸소 겪었다. 3교대로 일하며 염산 같은 위험물질을 다루고, 야근에 휴일노동, 20분의 식사 시간, 실수라도 한다면 빨간 조끼를 입히는 행태도 벌어진다.

원청인 아사히글라스의 관리자들의 태도를 돌이켜봤다. 제조업에서 불법파견을 가리기 위해 업체 간 도급 계약을 맺었다. 도급 계약을 맺으면 한 업체가 다른 업체의 업무 등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기웅 씨는 입사할 때 하청업체 사장이 원청의 허락을 구하는 것을 봤다. 작업하다 급한 전화를 받을 때 원청 관리자가 욕을 했고, 롤러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내는 세정 작업을 할 때도 원청 관리자가 지시했다. 작업 일정도 마찬가지고, 패널에 거품이 들어갔는지 불량품은 없는지까지 시시콜콜 원청 관리자 지시를 받았다. 하청 관리자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불만이 쌓여가던 차, 기웅 씨는 차헌호(47) 씨를 만났다. 동료의 소개로 밥 먹으러 나간 자리였다. 헌호 씨는 기웅 씨에게 노조 가입을 권했다. 임금이 오르고, 겁먹지 않아도 되고, 연차도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다고 했다. 시도 때도 없는 해고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선뜻 합류할 수는 없었다. 해고가 가장 두려웠다. 고민을 거듭했다. 다른 조합원 형님들도 보였다. 지쳐있는 모습도 발견했다. 일이 너무 힘들었다. 지금보다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작은 희망이 움텄다.

▲일본 지바현의 아사히글라스 공장

노조 활동을 시작하자, 공장은 뒤집힐 정도로 큰 변화가 왔다. 갑자기 원청 관리자가 업무 지시를 하지 않았다. 시시콜콜 따지지도 않았다. 갑자기 작업복을 바꿔준다고 했다. 재질이 나빠 더운 작업복을 입었는데, 원단 다섯 개 가운데 고르라고 했다. 임금이 오른다는 소문도 났다.

진짜? 공장 생활 처음으로 조금 달라질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감이 찾아왔다. 무슨 다툼이었는지, 조합원들이 공장에서 ‘투쟁’을 외치는 모습도 봤다. 기웅 씨 가슴에서도 무엇이 툭 튀어나왔다. 처음으로 공장 안에서 고함을 한 번 쳐 봤다. 이것이 노동조합인가. 어렴풋이 떠올렸던 그 작은 희망이 이제 더 선명해졌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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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자가 된 지금, 2015년 5월 29일 노조가 설립하고 다음 달 아사히글라스가 하청업체와 도급 계약을 해지해버릴 때까지 한 달간 기억은 쓰고, 달았다. 7월 1일부터 공장에 출근하지 못했다. 그달 21일 부당노동행위·불법파견으로 회사를 고소했으나, 노동부는 2년을 넘게 질질 끌다 불법파견 기소, 부당노동행위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긴 세월 동안 1백 명이 넘던 조합원은 20여 명까지 줄었다. 두 번이나 국정감사가 열렸고, 국회의원들은 한국아사히글라스 하라노 다케시 대표를 추궁하거나, 사건을 묵혀두고 있는 노승권 대구지검장을 질타했다. 국회의원들에게 “존경하옵는”이라던 노승권 대구지검장, 그러나 대구지검은 국감이 끝나고 난 2017년 12월, 불기소했다.

검찰이 방대한 조사 자료를 쥐고 뒤늦게 불기소 처분하면서, 이 자료는 아사히글라스가 중앙노동위의 부당노동행위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활용될 수 없었다. 법원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회사 손을 들어줬다. 대구지검 앞에 설치했던 천막농성장은 2018년 1월 12일 강제 철거당했다. 기웅 씨는 웨이터로 일하다 본 장면이 떠올랐다. 판사와 검사, 깡패가 어울리던 그 장면.

▲2016년 4월 21일 구미시청은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 농성장을 강제 철거했다.

기웅 씨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는 동안, 일행은 지바현 공장 항의 방문을 마치고 저녁 밥상 앞에 앉았다. 기웅 씨 일행 맞은편에는 도로치바 노조 활동가들이 모여 앉았다. 기웅 씨 앞에는 도로치바 노조 집행위원장인 다나카 야스히로 씨가 앉았다. 곧이어 해물탕, 파전, 돼지두루치기가 상에 올랐다.

“일본인은 적게 먹어요. 한국 사람들 밥 많이 먹죠? 한국 음식 먹고 위로가 좀 됐으면 좋겠어요.”(야스히로 씨)

야스히로 씨가 말을 이었다. 그는 일본의 노동조합이 전반적으로 약한 상황, 금속 제조업이 아닌 철도 노동조합이 아사히글라스 해고자 원정 투쟁을 돕는 상황이 너무 민망하다고 한다.

▲야스히로 씨

“사실 일본 금속노조가 이 투쟁 지원하는 것이 맞는데, 미안합니다. 우리 같은 작은 노조가 지원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요. 그래도 우리는 할 수 있는 걸 할 거예요. 아사히글라스 해고 문제뿐만 아니라, 전범 기업이라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 제기는 일본 노동자가 해야 합니다. 저희는 2003년부터 민주노총과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정을 알게 되면서,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민영화, 하청 노동 문제. 이런 추세를 보면서, 노동자 연대로 국경을 넘어서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최근 촛불 투쟁에서 민주노총이 선두에 서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도 한국의 투쟁을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야스히로 씨는 한국말로 “노동자는 하나다”라며 말을 맺었다. 얼큰한 해물탕을 먹는 기웅 씨와 해고 노동자의 마음도 헤실헤실 풀어졌다.

▲도로치바 노조와 저녁을 먹는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

숙소로 돌아가는 전철, 기웅 씨 앞에 앉아있던 노부부 한 쌍이 어눌한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기웅 씨가 입은 금속노조 조끼를 알아본 것이었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들은 아사히글라스 해고 사태도 알고 있었다. 가방에는 세월호 리본이 달려 있다. 촛불 시위에도 관심이 많았다며 이야기를 건넸다. 짧은 대화를 뒤로하고 전철에서 내리는 기웅 씨에게 노부부가 외쳤다.

“투쟁!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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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기웅 씨는 도쿄도 지요다구에 있는 아사히글라스 본사를 한 번 더 방문했다. 기웅 씨는 본사가 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고조노 에쯔로라는 총무부 그룹 매니저는 얼굴은 정중했지만,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한국아사히글라스와 아사히글라스그룹은 다른 법인입니다. 다른 법인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일본 도쿄도 아사히글라스 본사 앞. 사설 경비가 아사히글라스 해고 노동자의 건물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

자본과 권력이 겸상하고 밥을 먹는다. 그들은 비슷한 얼굴이다. 노승권 대구지검장, 그래도 기소는 할 줄 알았다. 전화기 너머 불기소 처분 소식을 헌호 씨에게 들었을 때, 기웅 씨는 대구지검 앞 천막 농성장에서 기대하는 형님들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검수권과 작업지시권이라는 게 있단다.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는 그 말로, 아사히글라스의 파견 행위가 정당하다고 했다. 검찰이 그랬다. 법은 우리 편이 아니구나. 기웅 씨는 깨달았다.

일본에 와서 마주한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자기 문제처럼 아파하고, 함께 팔을 걷고 투쟁을 외친 일본인의 얼굴, 세월호 리본을 달고 한국말로 힘을 주던 일본 시민의 얼굴,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치는 일본 노동자의 얼굴이다. 투쟁의 이정표도 언뜻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