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공정성의 세 층위 /박권일

12:39

공정성(公正性, fairness)을 문제 삼는 것. 그것은 사회적 자원이 얼마나 정의롭게 배분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불공정한 일에 분기탱천하는 일을 반복하면 공정한 사회가 ‘도둑처럼’ 찾아올까? 그럴 리 없다. 분노의 유통기한은 짧고 소셜 미디어에서는 훨씬 더 짧다. 반면 불공정한 사회구조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많다. 그들은 그 구조를 유지하는데 모든 자원을 총동원한다. 그래서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대의를 세워야 한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그려보아야 한다. 여기서 질문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공정성”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그 공정성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불공정한 일을 보고 분노할 때, 그것을 시정하는 기준이자 원칙이 되는 공정성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은, 석학이나 천재 몇몇이 정답을 내는 종류의 질문이 아니다. 구성원 모두가 숙고하며 토론해야 하는 물음이다. 이런 관점에서 공정성을 다시 생각해보자.

공정성은 세 층위로 구분될 수 있다. ‘불공정성’, ‘형식적 공정성’, ‘실질적 공정성’이 그것이다. 이는 이론적‧학문적 구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용적 구분이다. 불공정성은 글자 그대로 공정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목격되는 불공정성의 사례는 얼마 전 은행권 취업비리 사건처럼 공정한 경쟁을 가장한 비리다. 어떤 상황을 떠올려보자. 세 꼬마가 각자의 키보다 높은 울타리 너머로 야구경기를 보려 한다. 그런데 오직 한 명에게만 올라설 받침대를 주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주지 않는다면? 당장 “특혜”라는 비난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렇다. 이런 게 바로 노골적 불공정이다.

다음으로 형식적 공정성이 있다. 위의 세 꼬마 비유를 다시 도입하면, 형식적 공정성이란 야구경기를 보고 싶은 세 꼬마 모두에게 똑같은 받침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회의 형식적 평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흔히 언급되는 “공정성”이나 “공정한 경쟁”은 이 형식적 공정성에 가깝다. 최근 발표된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는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분배에 있어 산술적 평등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였다. 차등분배를 선호하는 응답은 전 계층 및 사회집단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능력주의를 공정성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평창 올림픽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결성이 ‘불공정하다’고 반대한 근거도 정확히 능력주의 원칙이었다. 왜 능력과 노력을 인정받은 선수가 아닌 ‘낙하산’이 와야 하냐는 것이다. 논란이 벌어졌을 당시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와 달리 공정성에 예민하기 때문에 강하게 반발했다는 식의 설명이 많았지만, 이 보고서는 기성세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 꼬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중요하지만 간과된 문제가 있었다. 꼬마들의 키가 달랐다. 한 명은 받침대 위에 올라가면 야구경기를 볼 수 있을 만큼 키가 큰데 반해, 나머지 두 명은 받침대에 올라서도 울타리 너머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어쨌든 똑같은 받침대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줬으니 ‘공정’한 것일까? 울타리 너머 야구경기를 본다는 목적에 비추어보면, 키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능력이다. 키 차이는 곧 능력의 차이다. 능력주의-형식적 공정성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공정하다고 해야 일관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직관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여긴다. 그 직관은 옳다. 그건 허울뿐인 공정성이다.

능력주의-형식적 공정성은 실재하는 불평등을 교정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경우 그것은 구조적 불공정성의 기제로 작동하며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할 뿐 아니라, 노골적‧불법적 불공정을 알리바이 삼아 현존하는 불평등을 ‘정상적인 것’으로 승인한다. 능력주의를 지상명령으로 맹신하는 순간, 구조적 불공정은 은폐되거나 심지어 정의로운 상태로 오인되는 것이다.

돈 많은 부모, 뛰어난 지능, 탁월한 신체능력,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 같은 요소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능은 개인의 성공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과 실패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존 롤즈는 『정의론』에서 “천부적 자질의 배분에서 생겨나는 각자의 위치에 대해 응분의 자격을 갖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쉽게 말해 재능이 불평등하게 나뉘어 사회적 지위의 격차가 생겨나는 상황은 결코 당연하거나 정의로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롤즈는 “(노력할 수 있는) 성격은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할 수 없는 훌륭한 가정이나 사회적 여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응분의 몫이라는 개념은 여기에 적용될 수 없다”면서 ‘노력할 수 있는 성격’ 또한 재능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자유주의자 롤즈보다 왼쪽에 있는 학자들이 형식적 공정성의 한계에 대해 더 급진적으로 비판해왔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목표는 키가 크든 작든, 야구를 보고 싶은 모든 꼬마들이 즐겁게 야구를 볼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형식적 공정성을 넘어 실질적 공정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