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22) 죄와 벌

09:07

[=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삶에서 주어진 일들, 파도처럼 그치지 않고 밀려드는 사건들에서 볕만 본다든가 그림자만 보는 일은 노예의 관점이다. 주인은 그 일과 사건의 다양한 맥락과 의미를 동시를 읽는다. “물기둥을 몰고 와/ 거만한 바위에 항의하는 너/ 6월의 파도”에게서 “끝없는 에네르기”를 보는 것은 그래서 가능하다.(「너…… 세찬 에네르기」) 이렇게 되면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친근”이 되고, “휴식의 갈망도 나의 오랜 친근한 친구”가 된다.(「후란넬 저고리」) 이렇게 내면의 땅이 단단해진 후에야 다음과 같은 시를 두려움 없이 쓸 수 있는 것이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_「죄와 벌」 전문

아포리즘 같은 1연에 이어 2연은 “그러나”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1연의 아포리즘과는 반대되는 시적 정황이 2연에 펼쳐진다는 것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연에서 김수영은 어떤 명제를 던져놓고 2연에서는 그 명제를 위태롭게 하는 진술을 하고 있다.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범죄에도 사회적인 혹은 심리적인 맥락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살인”을 저지르는 자의 마음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이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김수영의 내면에서 사건에 대한 긍정이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 그 용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2연에서 진술되는 상황은 다르다.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히고 나서 찾아온 것은 사회적으로 받을 비난에 대한 두려움뿐이다. 사실 이 시의 첫 번째 느낌은 자신이 가진 관념이 실제 사건 앞에서 얼마나 허약하고 또 허위인가를 ‘자기고발’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김수영은 거기에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라는 진술까지 덧붙임으로써 자신을 새로운 윤리의 저울 위에 올려놓으려는 무의식을 밝혀놓고 있다.

이 작품은 세간에서 여성 비하와 여성 혐오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는데, 바로 2연의 “여편네를 때려눕혔”다는 고백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일종의 시적 과장이다. 실제로 폭행을 했는지 어쨌는지에 대해서는 유보할 필요가 있다. 시의 내용에서 곧바로 시인의 행위를 유추하는 것은 시를 읽을 때 우리에게 먼저 도덕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작품을 읽지 못하게 하는 가림막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작품을 통해서 시인을 만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시의 화자의 행위가 최대한 크게, 또 자신의 생각을 세밀하게 드러냄으로써 발생되는 드라마 같은 효과를 통해 1연에 제시된 자신의 관념이 얼마나 허약하고 허위에 가까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김영희는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에서, 김수영의 여성혐오 혐의에 대해, “특정한 시와 문장을 토대로 여성혐오를 성급하게 재단하거나 여성의 대상화와 자기혐오를 기계적으로 절충하는 논의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여성혐오라는 틀을 적용하여 김수영 시를 읽고자 할 때, 우리는 ‘누구를/무엇을 혐오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시인의 자기혐오와 아내라는 알레고리를 동시에 숙고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영희는 기본적으로 이 작품을 “가부장적인 남성의 신경증적 폭행과 여성혐오의 무도한 목소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읽는다. 또 이 작품이 “어떻게 읽더라도 이 시는 한편의 ‘아이러니’ 연극으로 읽힌다”고 말한다.

해방 전에 자신이 연극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고백한 바 있다. 김수영 시에 연극적 요소가 얼마나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 시보다 조금 늦게 쓴 산문 「장마 풍경」에 그는 「죄와 벌」의 구도에 힌트를 줄 만한 구절을, 자기도 모르게(?) 적어 놓았다. 그 산문에서 풍경을 보는 일과 풍경을 사는 일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과 연관해 영화와 연극의 성격을 짧게 비교한 것이다. “연극은 관객의 참여가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그러나 영화는 연극에 비하면 참여의 면에서 훨씬 소극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풍경을 보는 것은 영화에 속하고 풍경을 사는 것은 연극에 속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면 「죄와 벌」에는 시의 화자가 “셰익스피어 시대의” “에이프런 식 무대”1에 직접 올라와 풍경을 사는 시도를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그 무대에서 끊임없이 관객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단속하는 역을 자처한다. 반성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타의 작품과 다른 점은 반성을 직접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이 작품이 윤리적인 관점에서 읽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일단 시의 화자가 라스꼴리니꼬프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논의되고 있는 심급에서 한 계단 더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자기폭로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가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로 돌연 종료되면서 아직 씌어지지 않은 시가 더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김수영이 이 시의 마지막을 침묵으로 채운 것은 무슨 연유일까?

니체는 ‘선’과 ‘진실’을 대비시키면서 『차라투스트라』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한 자들은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처럼 선하게 되는 것, 정신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병이다. 이 선한 자들은 양보하며 참고 견디나. 그들의 마음은 따라 하며 그들의 바탕은 순종한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하나의 진리가 태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선한 자들이 악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한데 모여야 한다.”(326) 또 『선악의 저편』에서 우리는 “왜 오히려 진리가 아닌 것을 원하지 않는가?”라고 물으면서 “삶의 조건으로 비진리를 용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방식으로 습관화된 가치 감정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15~19)

문제는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힌 일이 정말 “삶의 조건”으로서의 비진리에 해당되는가에 있을 것인데, 이미 김수영은 스스로 가해자의 위치에 섬으로써 어떤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에서 시의 화자의 행위가 얼마간 후경화되고 행위에 대한 뻔뻔한 두려움이 전경화되는 것은 바로 스스로 가해자가 되면서 던지고 싶은 물음 때문일 것이다. 시의 화자가 피해자의 입장에 섰을 때를 상상해보면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게 어떻게 문제적인지 다소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 섰을 때 비윤리적인 행위는 너무도 쉽게 기성 윤리를 통해 비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도덕 일반에 머무르는 사태를 초래할 확률이 높다. 반대로 자신을 가해자의 입장에 세울 때, 즉 직접 라스꼴리니꼬프가 되었을 때 ‘비진리’를 체험할 수 있으며, ‘비진리’의 냉혹함 속에서 ‘비진리’가 가리키는 심연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심연에는 자기혐오가 웅크리고 있을 수도 있고, 가해자의 인면수심이 번득이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의 토대가 드러날 수도 있다. 잔인한 방식이지만 ‘새로운 윤리’는 이런 진통을 통해 태어나기도 한다.

「죄와 벌」이 ‘가해의 역설’의 어느 지점까지 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면 김수영은 끝내 가해자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지우산을 아까워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 작품 전체를 하나의 ‘물음’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마지막에 다른 언어를 첨부했다면, 아마도 반성의 포즈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나쁜-좋은’ 작품으로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메모대로 “나쁜 시만이 가슴에/ 남는다”. ‘나쁜 시’는 소위 ‘좋은 시’에 대한 물음이고, 비진리는 진리에 대한 도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실제로 아내를 폭행했는가만을 따진다면 애당초 김수영이 이 작품을 쓰게 된 의도를 간과하는 것이며, 아예 이 작품을 시로 보지 않고 시인의 일기로 읽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의 자기 고백적 시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1. 『김수영 전집 2-산문』(이영준 엮음, 민음사, 2018)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