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누가 우리 일자리 43%를 빼앗아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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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는 매월 셋째 주 수요일에 연재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취업자의 43%에 해당하는 일자리가 인공지능(AI)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에 속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LG경제연구원이 5월 15일 발표한 ‘인공지능에 의한 일자리 위험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취업자 2,660만 명(2017년 상반기 기준) 중 1,136만 명이 AI 자동화로 일자리 대체 위험이 높은 것으로 분류됐다. 사무종사자, 판매종사자, 기계조작 및 조립 종사자 등이 고위험 직군으로 조사됐다. 소득 수준별로는 중산층에 일자리 위협이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정부는 AI 기술 개발에 5년간 2조2천억 원을 투자하여 이 분야에서 세계 4대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인공지능 연구개발 전략’을 15일 심의·의결했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이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 확보, 우수 인재 육성, 양질의 일자리 창출 등을 꾀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사진=pixaby.com, 저작권 없음]

AI 시대의 동상이몽

공교롭게도 같은 날, 한쪽에서는 AI가 우리 사회 일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한쪽에서는 AI 기술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이처럼 양립하기 어려운, 모순된 이야기가 횡행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혼란으로 여기지 않고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술발전이 가져오는 위협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다가는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투영된 것이다. AI 기술이 일자리를 빼앗아 가더라도 더 나은 기술 개발로 우위를 점하겠다는 것이다. 시대는 급격히 변했지만, 기술 극복은 기술로만 가능하다는, ‘기술만능주의’가 견고하게 대물림되고 있는 셈이다.

AI와 로봇으로 인한 자동화가 인간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놀랄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기정사실이 됐다. 이 같은 현상은, AI 기술 발전으로 20년 이내에 절반에 가까운 직업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한 옥스포드 마틴스쿨의 연구 보고서, ‘고용의 미래’(2013)가 인류사회에 던진 충격을 생각해 보면, 불과 몇 년 사이에 나타난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서 수시로 쏟아져 나오는 조사와 연구는 관점과 기준은 다르지만, AI 기술 발전이 인간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공통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이 같은 전망이 이미 시대의 상식이 되었음에도, 어느 누구도 AI 기술 발전을 멈춰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고나 직장 폐쇄와 같은 자본의 폭압에 맞서 강인하게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별다른 대응이 없다. 노동자의 고용 안정을 해치는 가장 위협적인 요인이 생산의 자동화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흐름을 막으려는 대안이나 실천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룹 총수 일가의 부도덕과 갑질보다 일자리를 강탈하는 자동화라는 괴물이 노동자에게 훨씬 더 고통스러울 수 있는데도 말이다.

노동운동 진영만이 아니라 이 문제에 가장 민감해야 할 생태운동 진영에서도 기술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거나 피상적인 대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문한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AI나 로봇과 같은 기술 폭주에 제동을 걸고 저항하는 생태운동을 접한 기억이 없다.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시민의 실천이, 여느 나라에 비해서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우리사회가 유독 기술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이처럼 관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시대

지난 세기 기술산업문명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과 비판을 던졌던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20세기를,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일리치는 『전문가들의 사회, Disabling Professions』(1977)에서 이 시대를, “대중들은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고, 전문가들은 ‘해결책’을 소유하고 있으며, 과학자들은 ‘능력’이나 ‘필요’와 같이 잴 수 없는 것들을 측정하려고 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일리치가 말한 전문가들이란 인간의 필요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대중을 상품과 시장 의존 사회에 예속시키는 전문적 제도의 지배적 대리인을 뜻한다.

일리치는 또한 ‘전문가 시대’를, 대중이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배적인 전문가들에게 위임해버린 시대로 보았다. 토착적인 사회와는 달리 상품의존사회, 혹은 기술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대중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전문가들에게 무방비로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학교와 병원에서 교사와 의사가 내린 지시와 처방에 자신의 삶과 생명을 의탁하는 모습은, 대중이 자율과 자유의 권리를 전문가들에게 양도해버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슬프게도 이 시대는 다음과 같이 기억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궁핍을 가져오는 부를 전 세대가 광적으로 추구한 결과 자유마저 양도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시대, 처음에는 정치를 복지 수혜자들의 조직적인 불평의 장으로 만들었다가 결국에는 친절한 전체주의를 통해 정치를 소멸시켜버린 시대로 말이다. 나는 사회 비판의 주된 방향이 또 다른 전문가주의나 더 철저한 전문가주의를 지지하는 데서 벗어나 전문가들에 대해 회의하고 계도하는 태도로 바뀌지 않는다면 기술전체주의(techno fascism)로의 추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책, p.17)

일리치의 진단에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우리의 자율을 상품과 시장 사회로 예속시키는 전문가주의를 벗어나지 않으면 결국 기술전체주의로의 추락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리치가 이러한 생각을 드러낸 이래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기술전체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향해 치닫고 있다. 한계를 모르고 폭주하는 압도적 기술은 이제는 스스로의 무력을 체감할 수조차 없는 지경으로 우리를 끌어내렸다.

누가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거대 기술과 전문가 권력이 사회를 짓누르고 지배하면서 대중은 점점 더 무력해져 왔다. 일리치는 개인의 재능과 공동체의 풍요, 환경자원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현대의 특이한 무능이 우리 삶을 속속들이 감염시킨다고 보았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1978)에서 일리치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산업사회의 ‘현대화된 빈곤’에 주목했다. ‘현대화된 빈곤’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한계점을 지나면서 나타나는데, 이 과정에서 풍요에 맹목적으로 기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이를 두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고 비유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고용되어 있지 않으면 능력과 쓸모를 의심받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상품 구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소비자로 평가받게 될 경우 자신의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자율적이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발적 비고용 상태조차 무력과 무능으로 진단할 뿐이다.

AI와 로봇 기술이 사람과 노동을 배제하는 속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노동이 탄압받던 시대에서 이제는 노동이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시대를 향해 나가고 있다. 기술이 대체해 나가는 인간의 자리는 더 이상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결국 ‘쓸모’를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일관되게 지켜지는 것은, 고용에서 배제된 인간은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을 ‘능력’과 ‘쓸모’로 재단하고 분류해온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다지 길지 않다.

우리가 첨단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물론 그것도 충분한 구매력을 보장받는 고용 상태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극단적 편의와 고기능의 상품일 테지만, 잃어야 할 것은 자율이나 공생과 같은 훨씬 더 근원적인 삶의 능력이다. 일리치가 지난 세기에 이미 갈파한 것처럼 이 세계는 생산과 소비를 위해 생겨난 기계가 황폐화시킨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불모지를 다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터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만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문제는 기술전체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