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여성 대상 폭력은 왜 사적인 일로 여겨지는가 /이재훈

13:30

#1.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야구선수 ㄱ 씨가 사귀던 여자친구 ㄴ 씨를 폭행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됐다. ㄱ 씨는 지난해 12월 31일 대구 동성로에서 ㄴ 씨를 발로 차고 목을 조르는 등의 폭력을 휘두른 혐의를 받고 있다. ㄱ 씨의 집착과 욕설을 힘겨워한 ㄴ 씨가 친구에게 ‘사귀기 힘들다’고 호소한 메신저 내용을 ㄱ 씨가 엿보면서, 이날의 물리적 폭력이 시작됐다. 사건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에서 피해자인 ㄴ 씨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당시 남자친구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든 시기였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걸 거야’ ‘날 정말 좋아하면 고치겠지’하며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 했고, 수차례 다시 만났다. 몸에 생긴 멍 자국을 본 친구들이 ‘이게 무슨 상처냐’고 물었을 때도 그냥 벽에 부딪힌 거라고 둘러댔다.”

“그만 만나자고 하면 자꾸 ‘자살한다’고 말해 헤어지지도 못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때는 ‘나 때문에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ㄱ 씨. [사진=MLB.com 갈무리, 편집 이재훈]

#2.
2016년 5월 결혼한 ㄷ 씨는 남편에게 상습 폭행을 당했다. 평소 “사람들이 아내를 쳐다보는 것도 싫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에게 집착하고,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ㄷ 씨는 커다란 공포를 느꼈다. 남편이 앞에 있으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남편이 주변에 없어도 두려움에 떨면서 친구에게 남편에 대한 험담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ㄷ 씨는 지난해 9월 남편이 흉기를 들고 폭력을 행사한 날 출동한 경찰에게 “남편에 대한 처벌이나 임시조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폭력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이혼을 결심한 뒤에는 남편에 대한 두려움을 잊은 듯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협의이혼 숙려기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딸을 돌봐야 하므로 남편이 있는 신혼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친구가 “또 맞으면 어떡해. 언제 행패를 부릴지 알고”라며 걱정했다. ㄷ 씨는 전과 달리 “어차피 이혼 서류 제출했고, 숙려 기간에 또 손찌검하면 제 살만 깎아 먹는 짓이야. 이제 나한테 함부로 못할 거야”라고 말하며 되레 친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뒤, ㄷ 씨는 남편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를 경찰에 신고한 직후 남편 ㄹ 씨에게 흉기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두 개의 폭력 사건에서 우리는 어떤 전형성을 읽을 수 있다. 우선 가해 남성. 두 명의 가해 남성은 공히 피해 여성을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통제와 지배, 소유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메이저리그 진출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은 야구선수는 정작 스트레스를 준 대상인 메이저리그 야구계를 향해 저항하거나 문제 해결을 시도하지 않고 애꿎은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메이저리그 야구계는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인 반면 눈앞의 여자친구는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됐다. 그는 여자친구에게 집착하고, 여자친구의 친구 관계까지 지배하려 했으며, 결별을 요구하는 여자친구에게 자살 협박을 해서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 상태를 이어가려고 했다.

협의이혼 기간 동안 아내를 스토킹하다 결국 아내를 살해한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람들이 아내를 쳐다보는 것도 싫다”고 말할 만큼 아내를 물건처럼 소유하려 했다. 폭력을 행사한 뒤에는 “나랑 해야 한다. 소독해야 한다”고 말하며 아내를 성폭행하기도 했다. 소유욕과 폭력은 아내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성폭행은 지배를 확인하려는 행동이다.

그 다음은 피해 여성. 피해 여성은 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든 시기였다”는 식으로 남성의 처지에서 폭행 발생 원인을 이해하려고 했다. ‘날 정말 좋아하면 고치겠지’라며, 폭력이 발생해도 관계를 곧 복원할 수 있으리라 희망하기도 했다. 남편이 흉기를 들고 폭력을 행사해도 경찰에게 “남편에 대한 처벌이나 임시조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행위 역시 자신에게 행해진 폭행에 대한 법적 처벌보다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피해 여성들의 전형적인 대처다.

어떤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행동에 전형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 행위가 어떤 구조적인 강제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먼저 가해 남성들의 전형성은 저 사건들이 일부 폭력적인 남성들만의 문제도 아니고, 단순히 남성이 여성보다 물리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소유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건 남성을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권력은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을 기본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사회 구조가 남성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식인 남성들마저 “일부 남성의 범죄를 두고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로 묶지 말라”고 말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의 폭력 문제는 ‘잠재적 범죄자’가 되길 거부하는 ‘착한 남성’들이 ‘비정상적인 남성’들을 타자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피해 여성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걸까. 여성학자 정희진은 저서 <아주 친밀한 폭력>에서 ‘남편의 폭력을 수용하는 아내의 심리’에 대해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성은 문화적으로 처벌당하거나 경제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폭력을 당하더라도 가족이나 연인 관계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강요당했다. 그러니 폭력을 당하는 여성이 가족이나 연인 관계를 떠나지 않으면서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폭력을 견뎌내려면, 자신이 당하는 폭력이 남들보다 사소하다고 합리화하거나 혹은 폭력을 범죄가 아니라 치유할 수 있는 질병으로 왜곡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리고 “남편이 언젠가는 나아지리라는 학습된 희망으로 폭력 상황을 견딘다.”

여성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폭력을 사소하다고 합리화하는 행위에는 가족이나 연인 관계를 “사적인 것이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가족이나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흉기로 위협당하거나 목을 졸리면 경찰 처벌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당하면 “처벌이나 임시조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법 제도를 통한 공적 처벌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까닭이다.

만성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이 자기방어적 인지 왜곡 상태에 빠지기 쉽다는 점도 여성이 남성의 폭력을 수용하는 태도의 전형성을 강화한다. 두 번째 사건에서 결국 남편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폭력 피해가 계속되자 어느 순간 체념하는 듯 남편의 폭력을 과소평가하고 두려움을 떨쳐낸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을 두고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성적으로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은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학습된 무기력, 우울증 등이 동시에 진행돼 자신이 처한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죠. 그래야 계속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무서워서 살 수가 없죠. 이런 게 자기방어적 인지 왜곡입니다.” 정희진 역시 <아주 친밀한 폭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고통에 적응하는 다양한 전략을 발달시킨다”는 말로 자기방어적 인지 왜곡론을 뒷받침한다. 정희진이 말하는 ‘고통에 적응하는 다양한 전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수정이 말하는 ‘자기방어적 인지 왜곡’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한국 사회에선 폭력 피해 여성과 관련한 언론 보도가 나오면 “때린 남성도 잘못했지만 어설프게 대응한 여성도 잘못했네”라는 식의 가해자 피해자 공동 책임론이 거론되고 있다. 게다가 피해 여성 주변인들마저 가족이나 연인 관계에서 폭력이 발생해도 “오죽 네가 좋으면 그러겠느냐”라거나 “자식을 생각해서 그래도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위로로 가족이나 연인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주변인들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해자 피해자 공동 책임론과 가족이나 연인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주변인들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이런 태도가 다시 피해자들을 폭력 가해자를 옹호하게 만드는 인지 왜곡 상태로 내몬다. 그러니 중요한 건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처지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폭력 발생이 우려되거나 발생한 직후 피해자를 탈출시키는 제도적 장치들을 만드는 정치적 태도다.

개인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고통의 주체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하지 않고, 비정치적이거나 사적인 문제가 될 수도 없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09년~2017년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사건을 분석한 결과 9년간 824명이 살해되고 602명이 살인미수에서 살아남았다”고 밝혔다. 모두 1426명이다. 죽임을 당하거나 죽음 위기에서 벗어나는 여성이 이틀에 한명 꼴이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도 있음을 감안하면 이마저 최소치다. 이것이 그저 ‘비정상적인 남성’ 일부의 사소하고도 사적인 범죄에 불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