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다정한 무관심, 소수자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하여 / 이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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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뫼르소는 세상의 문법을 거부하는 존재다. 그는 세상이 자신에게 보내는 어설픈 관심에 염증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문법으로 개인을 재단하는 것을 거부한다. 뫼르소는 어설픈 관심으로 섣부른 동정이나 이해를 비치는 대신, 다정한 무관심으로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려 한다. ‘다정한 무관심’은 수치나 통계로 개인을 묶어버리는 대신, 개개인의 발화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뫼르소의 선언이기도 하다. 뫼르소가 염증을 느꼈던 세상과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많이 닮아 있다. 우리 사회도 습관적으로 보편성에 기대어 개인의 존재를 지운다. 소수자를 바라보고 규정하는 방식은 특히 그렇다.

지난 6월 28일,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5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법적으로 정당성을 얻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호명하는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모든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버리고 난민이 되어가면서까지 집총을 거부한다거나, 심리적 부담감으로 인해 집총하는 상상만 해도 졸도를 한다거나, 신에 대한 나의 믿음을 타인이 증명해줘야 한다거나 하는 방식의 양심증명과정이 그 예다. 증명과정에 ‘왜 그들이 병역을 거부하는지’에 대한 서사는 부재한다. 설령 있다 해도 조명 받지 못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오직 끔찍함에 대한 것뿐이다.

사람들이 끔찍한 이야기만을 소구하는 이유는 병역‘회피’와 병역‘거부’를 가려내기 위함에 있다. 속임수를 걸러낼 제도적 장치는 분명 필요하지만, 폭력적 방식으로 작동할 필요는 없다. 상처의 전시는 통제의 방식으로 작동해 결국 차별과 배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적 서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법이다. 피해사실을 입증해내야만 피해자가 된다.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당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설명해야 하듯 말이다. 물론 그렇게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리며 일상생활을 할 수 없어야 한다. 약자는 약자다워야 한다.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스마트폰과 에어팟을 사용하는 난민은 조롱받아 마땅하듯 말이다. 그들은 소수자의 윤리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그 이후에도 소수자들의 삶은 다수가 상상하는 그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평화주의 운동을 하는 혁명가로, 성폭력 피해자들은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선 여성주의 활동가로, 난민들은 1등 시민의 역할을 수행해내는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루트를 감히 우리가 정할 수 있는가? 개인의 이야기를 지운 채 멋대로 상황을 재단할 권리는 있는가? 소수자를 향한 어설픈 호기심은 폭력적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뫼르소식의 다정한 무관심일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지배 논리에서 벗어나겠다는, 함부로 당신의 상황을 재단하지 않겠다는, 그런 다정한 선언 이후에야 그다음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다정한 무관심에서 경청은 시작된다. 그리고 경청할 준비가 된 시민에게는 이야기를 들려줄 언론이 필요하다. 수치와 통계로 개인을 뭉뚱그리는 대신 개인의 서사를 알려주는 언론 말이다. 상처를 전시하는 대신 상처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줄, 폭력적 시선 대신 공감의 시선을 이끌어 내줄 보도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화의 주체는 시민이지만, 변화의 씨앗을 퍼뜨리는 것은 언론이다. ‘그다음’은 우리 모두가 상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리라. 불특정다수가 아닌 특정한 개인의 온전한 이야기가 살아나고, 인간적인 공감이 시작되며, 개인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아지는 사회, 그러한 사회가 도래할 때 소수자는 포용의 존재가 아닌 공존의 존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