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칼럼] 미국인도 ‘태극기 부대’가 흔드는 성조기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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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3년 만에 다시 ‘엄마의 나라’를 찾은 것이다. 그동안 훌쩍 커버린 아이들에게 관광객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국이 아닌,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하고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덕수궁 대한문 옆에 마련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故 김주중 님 추모 분향소를 찾았다. 2009년 단행된 정리해고로 지금까지 30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지만, 아직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쌍용차 투쟁. ‘해고는 살인’이라며 다시 거리에 분향소를 설치해야만 했다. 2018년 여름,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대한문에 이르러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건 태극기 물결이었다. 소위 ‘태극기 부대’가 대한문 앞을 점령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복직을 기다리다 끝내 세상을 등진 노동자의 분향소에 일부 극우단체가 ‘시체팔이’ 운운하며 행패를 부린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태극기 부대’를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7월 7일 오후 2시, 서울 대한문 앞에 700여 명의 태극기 부대가 모였다. 이들은 남북정상회담 반대, 좌파 사회주의 개헌 반대, 동성애 합법화 반대 등을 요구했다. [사진=오마이뉴스 곽우신 기자]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또한 태극기와 함께 펄럭이는 성조기 물결이었다. 극우 시위대가 왜 성조기를 들고 나왔는지 배경을 대략 설명해 주었지만, 고인의 죽음을 모욕하는 시위에 왜 성조기가 동원되었는지 아이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사회 문제에 부쩍 관심을 가지게 된 큰 아이는 상황을 잘 모르는 미국인들이 성조기를 보면 좋은 집회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며 불쾌해했다.

비슷한 풍경은 7월 14일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광장 주변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올해 19번째로 치뤄진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울광장 주변에 모여 소위 동성애 반대 집회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도 여지없이 태극기와 함께 등장한 성조기 물결이 보였다.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겠다며 성조기를 들고나온 모습에 학교에서 성소수자 권리를 옹호하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큰 아이는 어이가 없다며 한숨을 지었다.

성조기를 들고나온 ‘태극기 부대’에 미국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보루이자 ‘우방’이며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위협에서 지켜준 고마운 ‘혈맹’일 것이다. 미국 지원 하에 반공을 빌미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올해 70주년을 맞은 제주 4.3을 비롯해 해방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수없이 많이 있었다. 1980년, 군부가 저지른 광주 민중에 대한 학살도 미국 용인 없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미국의 만행은 한반도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다. 세계 곳곳에서 보수 우익 정권의 뒤를 봐주고,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지만 미국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부를 전복하는 데 미국이 앞장 서 왔다는 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미국의 이런 추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소위 태극기집회에 등장한 성조기는 자기 자리를 제대로 찾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미국인들이 자국 정부가 저지르는 범죄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베트남 전쟁만 보더라도 미국 내 반전운동과 미군 사병들의 반란이 미국이 전쟁에서 패배하는데 한몫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미국에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부가하는 고통에 반대하면서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미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 퍼지고 있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지난 대선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 샌더스를 열렬히 지지했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라는 말이 정치적 반대자에게 가하는 큰 오명이었던 미국에서 (공화당이 ‘오바마케어’를 ‘사회주의’적 실험이라고 비난한 것을 기억해보자)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 후보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내가 90년대 중반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한국처럼 사상이 ‘불온’하다며 국가보안법 하에 감옥에 가두는 억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당시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는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받았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회 분위기는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만큼이나 가혹했으리라. 사반세기가 흘러 사회주의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는 미국 젊은 세대에게 대안으로 사회주의가 어필하게 된 것은 하루아침에 벌어진 이변이 아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계속된 경제 위기는 미국인 대다수 삶을 절망의 나락에 빠뜨렸고, 그 결과 빈부 격차와 양극화는 가속화되어 왔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 앞에 놓인 현실은 더 암담하다. 실질 임금의 하락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은 대학 등록금 덕분에 미국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평생 갚기 힘든 학자금 빚을 지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부모 세대가 이룰 수 있었던 ‘아메리카 드림’은 이들에게 더이상 꿀 수조차 없는 꿈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미국 노동자들이 가만히 앉아서 체념만 하지 않았다. 2011년 벌어진 이집트 혁명과 아랍의 봄에 고무받아 시작된 위스콘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정부청사 점거투쟁이 월가 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으로 번졌고, 이듬해에는 25년 만에 시카고 교사들이 대규모 파업에 돌입해 소중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2014년 이후 계속되어온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과 비정규 알바 노동자가 다수인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이 주도한 최저임금 15달러 인상 캠페인, 올해 초 미국의 ‘러스트벨트’를 마비시킨 교사 파업까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2012년 3월 미국에서 벌어진 월가 점령 운동. [사진=flick.com Michael Fleshman]

이런 일련의 투쟁에 고무받고 급진화된 사람들이 ‘1%에 반대하는 99%’라는 월가 점령운동 구호를 선거캠페인 구호로 채택한 샌더스에게 희망을 보고 그를 지지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2016년 불었던 샌더스 돌풍(정치적으로 그 반대쪽에 있었던 트럼프 돌풍도 마찬가지로)은 경제적 불평등, 억압과 착취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널리 퍼져 있을 뿐 아니라, 기존 정치의 틀이 그런 대중의 불만을 제대로 담을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지난 대선에서 새로운 세대가 지지를 보낸 샌더스가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은 가라앉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음을 지난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6월 27일 뉴욕주 연방 하원의원 14선거구 민주당 후보 예비선거에서 10선 의원인 조 크롤리를 제치고 28세 라티나 여성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테스가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이변이 없는 한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오카시오-코테스는 최연소 하원의원으로 당선될 것이다. 크롤리 의원은 1999년부터 거의 20년 동안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민주당 서열 4위로, 현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인 낸시 펠로시의 후임자로 유력시되던 실세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던 예비선거에서 오카시오-코테스가 15%의 큰 격차로 크롤리를 이긴 것을 주류 언론은 “올해 정치 시즌에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결과”라며 놀라워하고 있다.

▲오카시오-코테스(왼쪽) [사진=오카시오-코테스 트위터 @Ocasio2018]

푸에르토리코 출신 부모에게 태어난 오카시오-코테스는 불과 몇 달 전까지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했고, 정치 경력은 고작해야 2016년 민주당 경선 당시 샌더스 후보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주의 조직인 ‘미국민주사회주의자(DSA)‘ 회원으로 ‘사회주의자’임을 표방하면서, 공공의료보험인 메디케어 전면 확대와 대학 무상 등록금, 이민세관단속국(ICE) 철폐 등 노동계급의 이해에 기반한 급진적인 공약을 내세웠다. 특히,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텍사스로 가서 트럼프 정부의 무관용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밀레니얼 세대의 지향이 단순히 선거에서 표를 더 많이 받는 것에 있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오카시오-코테스의 승리는 다시 한번 미국에서 급진 좌파적 대안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카시오-코테스의 예비선거 승리 후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미국의 메리엄 웹스터 사전 검색어 1위에 올랐고, 그녀가 속한 ‘미국민주사회주의자’ 회원은 며칠 사이에 3만7천에서 4만2천으로 늘어났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10대인 나의 아이는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정치적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있는 미국 신세대이다. 아이와 아이 친구들에게 사회주의는 오명이 아니라 자본주의 모순에 대항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태극기 부대’의 성조기를 보면서, 엄마의 나라 한국에서 자신이 사는 나라 미국이 극우 보수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성조기는 제국주의의 상징이고, 미국 정부가 세계 곳곳에서 깡패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고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해 함께 행진한 자신과 같은 미국인들도 있음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아이는 말한다.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에 반대하고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데 동원된 ‘성조기’는 자신과 같은 미국인들은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태극기 집회에 나온 ‘성조기’가 대변하는 미국이 아닌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싸우며, 여러분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 미국에도 있음을 기억해 주시길. 뜨거운 폭염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멀리 미국에서 보내는 연대의 메시지이다.